[칼럼] 좋은어른 VS 소년심판
[칼럼] 좋은어른 VS 소년심판
  • 김대희 기자
  • 승인 2022.04.04
  • 호수 1545
  • 7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대희<OBS> 기자

평소 넷플릭스를 즐기진 않는다. 그나마 드라마 「나의 아저씨」와 「소년심판」을 정주행해 본 게 전부다. 사달이 난 건 이 둘을 엮으면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하는 궁금증이 생긴 것이다. 뚱딴지같은 소린 맞는데, 속내를 들어 보시고 각자 판단해 주시길. 

「나의 아저씨」 박동훈 부장은 이지안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 ‘좋은 어른’이란 숙제를 남긴 채 말이다. 한 켠에서 심은석 판사는 이런 말을 내뱉는다. “이래서 내가 너희들을 혐오하는 거야. 갱생이 안 돼!”

드라마 의도와 무관하게 ‘소년심판’은 정치판으로 소환됐다. 촉법소년 연령을 만 12살로 낮춰야 한단 명분이 된 것이다. 소년법 개정 움직임엔 후보자들의 대선 공약도 한몫 했다. 급기야 법무부가 대통령직 인수위에 법 개정 참여 의사를 보고하면서 현실화에 바짝 다가섰다. 

드라마에서 촉법소년은 그야말로 악마로 표현된다. 재판정에서 소리 높여 “촉법소년이니까 감옥 안 간다, 신난다!”라며 웃는 장면이 끔찍하긴 했다. 하지만 연령을 낮추면 범죄가 줄 것이란 점은 아직 증명된 바 없다. 유엔에선 재범방지 효과가 없다며 오히려 상향할 것을 권고했다.

한 켠에서 또 심 판사가 강한 어조로 내뱉는다. “소년은 결코 혼자 자라지 않습니다. 오늘 처분은 소년에게 내렸지만 그 처분의 무게는 보호자들도 함께 느끼셔야 할 겁니다.” 우리 사회를 그대로 뻥 뚫어 버리는 주제이자 숙제다. 불필요한 ‘주홍글자’를 늘릴 뿐이란 생각이 든 이유다. ‘좋은 어른’이 이때 등장해야 한다. 박동훈 부장이 좋은 어른인진 차치하더라도 1차적으로 부모와 어른들, 그리고 온 마을이 ‘아이’를 키운단 점에서 최소 좋은 어른이 필요하다. 

‘현저성’ 일부 특성이 전체 인상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심리 현상을 뜻한다. 첫 인상으로 판단할 때 오류가 있듯, 빙산의 일각으로 전체를 잘 아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드라마와 달리 소년사건 중 흉악범죄는 1%에 불과한데, 지나치게 보도가 집중돼 흔한 일로 생각된 것이다. 이는 ‘부모와 좋은 어른이 없던 건 아닐까’하는 구조적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실제 천종호 부산지법 판사는 소년범죄는 ‘어른들 잘못’이라 단정했다. 앞서 박종택 판사도 이를 ‘사회구조의 산물’이라 강조했다. 좋은 어른 없이 내팽겨져 학대, 빈곤 등을 겪은 소년범 10명 중 7명은 또 법정에 선다. 50여 곳인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소년원이 10곳에 불과하다. 

‘컵라면 재판’부터 끓여 버리자. 소년, 소녀 한 사람당 재판에 할애되는 시간이 고작 3분 안팎. 그리도 짧은 시간에 소년원에 가든, 집으로 가든 한 아이의 운명이 결정된다. 너무 가혹하다. 한 겨울 광화문 이순신 장군 왼쪽 건물 외벽을 지켰던 나석주 시인의 읊조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희도 그렇다.”

이수정 교수는 소년범에게 제과제빵 기술을 가르치면 재범방지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제빵의 재미는 물론 다른 이와 빵을 먹으며 나눔에 대해 배울 수 있단 것이다. 순식간에 만든 ‘컵라면’이 아니라 오랜 시간 뭉글뭉글 정성스레 만든 ‘따뜻한 빵’이 새로운 내일일 수 있지 않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