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라] 느림과 고통의 미학
[아고라] 느림과 고통의 미학
  • 이재희 기자
  • 승인 2022.03.21
  • 호수 1544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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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희<부편집국장>

시간이 지날수록 느린 것들이 살아남는다. 예를 들면, 자동차가 아닌 자전거, 스마트 워치가 아닌 아날로그 시계, 뛰는 것보다 걷는 것들이다.

언제부턴가 필자는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을 놔두고서도 굳이 먼 길을 빙빙 돌아가는 습관이 생겼다. 이유는 딱히 없는데, 번지르르한 말을 갖다 붙이자면 ‘느림의 미학’을 느끼기 위해서다.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봤을–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는, 열심히 해도 절대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막연한, 결국엔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무기력한-끔찍한 감정들이 있다.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이런 감정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지구가 일직선이 아닌 것처럼 삶도 그렇기 때문이다. 인생은 직선으로 올곧게 그려지지도 않고, 마냥 하늘을 향해 치솟는 것도 아니다. 마치 일정한 주기로 진동이 찾아오는 진자운동처럼 약간의 간격을 두고 상향과 하향의 적당한 조화가 인생의 공백들을 채워낸다. 

그래서 우린 행복과 불행, 조급함과 느긋함, 중압감과 가벼움을 동시에 느끼면서 살아간다. 가끔은 세상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비참한 감정을 느낄 때도 있지만, 이것 역시 충분히 가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것들을 겪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회 전반에 걸쳐 옛것보단 현재의 것을, 문제엔 해결책을 제시하는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느림과 고통의 미학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점차 과거의 정취가 묻어나는 낡은 골목들의 모습은 모조리 사라지고 경리단길, 황리단길 등 새롭게 꾸며지는 골목들이 많아졌다. 주소를 찍고 오지 않으면 도저히 예전의 모습이라 생각하기 어려운, 화려한 네온사인과 건물들이 빼곡하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예능들은 이제 개인의 생활을 보는 것을 넘어 평가하고 지적하기 시작했다. 각자가 가진 고유의 말과 성격을 요리조리 뜯어보면서 심리적인 부분을 문제로 파악하고 솔루션을 제시한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고뇌와 질문이 쓸데없는 시간낭비라는 주입식 지적이 이어지고 사회가 제시하는 올바른 기준을 따라 문제를 해결하라 충고한다. 

느린 속도를 빠르게,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풀어내는 게 마냥 명쾌한 해답일까. 뒤돌아보면 필자 역시 왜 빨리해야 하는지, 또 왜 문제를 풀어야만 하는지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왔던 것 같다. 누구도 이런 방식에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고, 필자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더 나아가 속도가 느려지는 순간에서 인내하며 기다렸더라면,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 인고의 시간을 가졌더라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조급하게 사는 것만이 해답인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틀린 것은 처음부터 틀린 일이 아니었다. 틀린 것이 옳은 것이고 좋은 것이었다.’라는 나태주 시인의 시어처럼, 모두에게 틀린 길이란 없다. 때론 느려질 때도, 고통의 시간이 찾아올 때도 있지만 이것들을 누리는 시간도 우리에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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