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보이는 밤하늘 아래 방 한 칸에서
달이 보이는 밤하늘 아래 방 한 칸에서
  • 임윤지 기자
  • 승인 2022.03.02
  • 호수 1542
  • 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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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도시, 서울의 중심엔 여전히 예스러움을 간직한 동네가 있다. 재개발로 인해 옛 동네의 정취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 여든을 넘긴 주민들에겐 여전히 ‘우리 동네’다. 4~50년이 넘게 서울 달동네에서 지낸 주민들은 이제 정든 동네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사라져가는 서울 달동네의 풍경을 담고 이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기자는 백사마을로 떠났다.

▲ 불암산 기슭을 따라 백사마을을 올라 바라본 풍경이다.

월몰을 앞둔 ‘서울의 달’
이른 아침, 4호선 노원역에서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한참을 달려 도착한 백사마을.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 일대에 있는 이 마을은 지난 1967년 도시 개발과 함께 청계천과 영등포 등지의 판자촌에서 넘어오거나 과거 산업화 시기 지방에서 상경한 주민들이 정착한 곳이다.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모여든 곳이었지만 이웃들은 서로를 돌보고 보듬으며 지난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삶을 이어왔다. 

그러나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던 백사마을은 곧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지난 2009년 주택재개발 정비사업구역으로 지정된 지 12년 만인 지난해 3월, 서울시에선 오는 2025년까지 백사마을 일대에 대규모 주거단지를 조성하겠단 재개발 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한때 1천 200세대에 가까웠던 마을이었지만 이제는 100세대 정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다. 

▲ 대부분 백사마을에 있는 집들은 노후화돼 있어 붕괴위험이 크다.
▲ 백사마을 지붕이 날아가지 않게 여러 판자나 물건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백사마을 주민들을 만나다
기자가 한낮에 백사마을을 방문했을 때 마을 전체에는 적막이 흘렀다. 공가임을 알리는 ‘빨간 동그라미’ 표시가 이 고요함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불암산 기슭을 따라 들어선 집들엔 금이 가고 부서진 벽과 빛바랜 페인트칠 등 50년이 훌쩍 넘은 세월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집집마다 지붕이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벽돌과 나무판자를 올려놓은 모습도 눈에 띄었다. 대문에 붙어 빈집임을 알려주는 공가안내문은 백사마을이 본격적인 재개발 공사를 앞두고 있음을 더욱 실감나게 했다.

현재 주민의 약 90%가 거주 이전을 마친 상태였지만, 극히 일부 주민들은 이곳에 남아 삶을 살아가는 중이었다. 백사마을에 방문한 지 2시간여 만에 기자는 겨우 한 주민을 만나 가정집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근처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불과 이틀 앞두고 있던 김상복 씨는 이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백사마을에 산지 40여 년 됐다는 그는 “이제 정말 이 집을 떠난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네요”라 운을 뗐다. 이어 김 씨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그저 산비탈에 판자촌 하나 의지한 채로 8평씩 쪼개 오갈 데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살았습니다. 전기나 물 공급 등 각종 정부 지원이 여의치 않아 우물을 길어다가 쓰고, 슬레이트나 폐지를 가져와 천막을 만들어 비를 막곤 했죠.”라 전했다.

▲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앞둔 김씨의 집에선 여전히 연탄을 떼고 있다.

고된 노동으로 몸은 힘들어도 사과 한 쪽 나눠먹을 수 있을 만큼 끈끈하고 북적거렸던 마을 공동체의 분위기가 점차 변하기 시작한 건 백사마을이 재개발 대상으로 지정되면서부터다. 재개발 하나를 둘러싼 채로 서로 각자의 이해관계만을 주장하다 보니 갈등이 쉽게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던 기관이 사업성 저하를 이유로 포기하며 백사마을 재개발논의는 하염없이 길어졌다. 결국 주민갈등과 사업성 문제 등으로 10년 넘게 여러 난항을 거쳐 오다 지난해 비로소 재개발 사업이 재개됐다.

백사마을 주민들은 재개발 사업 소식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김 씨는 “오랜 갈등으로 인해 사실 주민들이 지쳤고, 현실에 순응하게 되면서 ‘그냥 떠나고 말지’란 반응이 대다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지인의 꾐에 넘어가 헐값에 집을 판 채 마을을 떠나야만 했고요.”라며 씁쓸함을 표했다. 

재개발로 나가 살던 주민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여전히 각종 보상금을 비롯해 분담금 문제도 걱정거리이기 때문이다. 주민 A씨는 “사람들은 재개발이 되면 더 좋은 새 아파트로 들어올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해요. 그런데 다시 아파트에 들어오려면 아무리 이 마을 주민이었다고 해도 분담금 3~4억 이상은 더 내야 합니다. 일반 분양가보다 싸게 들어올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큰돈을 얼마나 다들 갖고 있겠어요.”라 말했다.

내년 상반기 재개발 사업 착공까지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백사마을 주민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장순분 씨는 “갓난아기였던 아이들 셋 안고 추운 겨울날 남편과 함께 이문동에서 백사마을로 왔어요. 그리고 목수 일을 했던 남편이 살아생전 손수 지은 이 집에서만 60년 가까이 살았습니다.”라며 “얼마 뒤면 아흔을 앞두고 있는데 다른 데서 어떻게 살아요. 최대한 끝까지 이 마을에 있고 싶죠.”라 말했다. 김 씨도 “허술하고 무너지기 직전의 집이 많긴 해도 그때 당시 누군가에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고 유일한 보금자리였어요. 심리적으로 참 정든 땅인데 여러모로 싱숭생숭하죠.”라 전했다.

▲ 백사마을은 1970년대 당시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1970년대 당시 서울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해 온 백사마을은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장 씨는 “예전엔 마을이 재개발 된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많이 관심 갖고 찾아왔는데 지금은 또 드문드문해요.”라며 “이제 나이도 있으니 나가면 언제 또 이 마을을 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만은 못 잊죠.”라 말했다.

기자는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해가 저물어가는 백사마을 입구를 다시 돌아봤다. 백사마을 재개발 사업시행인가와 명품 주거단지로의 탈바꿈을 축하하는 현수막들이 변화의 서막을 본격적으로 알리고 있었다.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변화를 앞둔, 기자가 눈에 담은 백사마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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