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 우수상] 13월
[2021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 우수상] 13월
  • 구본성<인문대 국어국문학과 16> 씨
  • 승인 2021.11.29
  • 호수 1540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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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을 개키듯 올해를 털어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해 연화는 커피를 독하게 내렸다. 상 위에는 하룻밤 사이 미지근하게 식어버려 쓸모를 잃은 맥주 캔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아래에 흐트러진 서류 더미도 이제는 받침대의 자리가 익숙해보였다. 검버섯마냥 단단히 자리 잡은 얼룩들이 딱딱했다. 마시던 찬물을 잔에 깔고 그 위로 커피를 부었다. 빈속에 새금한 커피향이 나리자 꾸덕하던 내장들이 슬며시 풀리는 듯했다. 간밤에 눈이라도 왔는지 암막 커튼 사이로 내질러진 밝은 잿빛 막대기가 부옇게 상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커피를 상에 내려놓고 소파에 기대듯 앉았다. 방금 일어났음에도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할 것 같은 혼곤함에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내쉬는 숨이 깊었다.

후광마냥 커튼 끝자락에 은은하게 비치는 색의 명도와 채도로 바깥의 때를 가늠해왔을 뿐, 벽에 바를 정 자라도 새긴 것은 아닌 까닭에 시간 감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가라앉을 때면 맥주를 마셨고 눈을 뜨면 커피를 마셨고 출출하면 찬장에 남은 통조림을 까먹었다. 산다기보다는 살아내는, 살아낸다기보다는 살아지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남은 현실 감각이라고는 아직 공과금과 월세 납입까지는 여유가 있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이 와중에 금전 감각만큼은 죽지 않고 빛을 내고 있었다.

예정에 없던 휴식이라 계획이랄 것도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아무 것도 안 할 수 있을까 싶은 심정이었다. 처음 하루 이틀 간은 폐인처럼 사는 스스로가 썩 흔쾌하지 않았지만 며칠이 지나며 그런 기분들은 낡은 책장에 꽂힌 위인전마냥 바래갔다. 무기력한 것은 아니었으나 무력한 느낌이었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다 보니 어느 순간 옆을 돌아보면 백골이 누워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요즘 욜로니 뭐니 다들 제 인생 즐기고 살자고 난리인데, 인생의 낭비가 고작 며칠 길어진다고 해서 별 문제 있나. 다음 학기 수업 준비는 어떻게든 몰아서 할 수 있겠지. 이런 생각들도 어느새 저편으로 넘어가버린 지 오래였고 그저 혼곤한 정신 속에서 숨을 쉬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다만 오늘은 커피의 쓴 맛이 유독 강했고, 그 때문인지 기분 나쁘리 만큼 정신이 멀쩡했다. 사실 휴식이라고는 하지만 반 강제로 부여받은 시간이니 휴식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했다. 연화에게 갑작스런 휴식을 안겨준 교수는 지금쯤 영국에서 안식년을 즐기고 있을 터였다. 버러지 같은 년. 그가 평소에 일삼았던 자잘한 희롱들은 괘념치 않았지만 그 순간의 억양과 입모양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이 들었고, 참지 않았다. 연화의 분노에 대한 학교 측의 답변은 계절 학기에 배정되어 있던 수업의 휴강 권고였다. 통보와 다를 바 없는 권고에 연화는 다시 한 번 모욕감과, 조금의 두려움을 느꼈다. 학교는 양측 모두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 적절한 조취로 시간 강사인 자신은 방학 동안의 벌이를 잃었고 교수는 후내년에 예정되어 있던 안식년을 당겨 출국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 보는 거래였고, 그럼에도 자신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곱씹는 뒷맛이 썼다.

연화는 그 더러운 혓바닥을 생각하며 날짜를 확인했다. 대충 짐작했던 대로 오늘이 동창회가 있는 날이었다. 송년회를 명목으로 한 동창회였는데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약속까지는 몇 시간이 남아 있었다. 꽤 오래 전에 도착한 모임에 대한 연락에 연화는 회신하지 않았는데, 그녀로서는 딱히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도 없었을 뿐더러 보고 싶은 얼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하필 그 혓바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탓에 범우를 떠올린 것이었다. 그래서 어리석은 선택이라며 후회할 것이라 직감하면서도 연화는 채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옷을 고르며 새해가 되기까지 집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것은 어딘가 스스로의 처지를 불우한 것으로 만드는 것 같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마음 한편에 묻어두었던 추억을 들춰내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지 의문이었지만, 시도하지 않고 염려하는 것과 부딪치고 후회하는 것은 결코 동류라 할 수 없다.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며 그녀는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나오는 바깥은 여전한 날씨였다. 오랜만에 돌아온 대학교 앞 가게들은 군데군데 생경한 프랜차이즈들이 들어서있었다. 익숙한 간판의 가게로 들어서자 먼저 온 동기들 몇이 놀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연화를 맞았다. 다들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지만 그때 그 시절의 면면들이 묻어나왔다. 꽤나 격 없이 지냈던 동기들도 나이대가 바뀌고 입는 옷이 바뀌니 데면데면했다. 그래도 그 어색함 속에서 묻어나는 지난 시절의 기억들은 적이 반갑고 어쩐지 그리운 기분이었다. 어색한 웃음이 몇 번 오가고 그보다 조금 더 많이 술잔이 오가는 사이 동기들은 세월을 조금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고 딱딱했던 분위기는 이내 흐트러졌다. 새내기 시절로부터 물꼬를 튼 대화는 순차적으로 진행되다 간혹 누군가의 무용담과 흑역사로 잠시 빠졌다가 어느새 자리에 오지 않은 동기들 근황으로 옮아갔다. 그런 중에 범우의 이름은 나오지 않아 연화는 의아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지만 자신은 그의 근황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으므로 먼저 그의 이름을 꺼낼 수는 없었다.

 

범우는 연화가 가장 빨리 친해진 대학교 동기이자 가장 늦게까지 친했던 대학교 동기였다. 그는 늘 입고 다니는 통기성 좋아 보이는 기능성 티셔츠처럼 어디서든 편하게 지내는 류의 사람이었다. 흘끗 보기에는 수업시간에 엎어져 자다가 체육시간에만 날아다니는 학창 시절의 친구와 흡사했지만 보통 그를 생각했을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모습은 역시 체육복 차림으로 맨 앞줄에 앉아 수업을 듣는 모습이었다. 그의 뒷모습만 봐도 서글서글한 그의 미소와 미소 지을 때 깊게 패던 눈가의 주름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무리의 중심에 있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레 무리에 녹아드는 아이였다. 처음 나간 학과 행사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탓에 둘은 쉽게 친해졌는데 그 또한 범우의 공이 컸다. 범우는 유쾌하면서도 행실은 바른, 알맞은 균형을 가진 아이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범우를 좋아했고, 연화 또한 그 대부분에 속했다. 연화가 범우와 한층 가깝게 지내기 시작한 것은 중간고사 기간 즈음해서였다. 시험공부가 지독하게 싫었던 동기들 중 몇몇이 모여 학교 앞 가장 저렴한 술집에 모여 과자에 소주를 마셨다. 학교에서 지하철로 다섯 정거장 거리에 살던 연화와 자취를 하던 범우도 함께 자리했다. 무릇 신입생들의 술자리가 그렇듯 미숙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들이 붓는 술자리였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정해진 수순처럼 멀쩡한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지하철 마지막 열차 시간이 다 되어가는 연화가 간신히 제 몸을 가누며 홀로 일어서려하자 범우가 따라나섰다. 역까지 가는 길에 범우는 어쩐 일로 한 마디 말이 없었다. 걸음걸이로 보아 연화보다는 멀쩡해 보였는데 개찰구에 도착할 때까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걷기만 했다. 연화는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중심을 잃었는데, 어어 하는 순간 몸이 붕 하고 뒤로 떴다. 앞으로 기울어지던 몸이 급격하게 뒤로 젖혀졌고 곧이어 적당히 물렁한 감촉이 등에 닿았다. 범우가 연화를 받느라 엉덩이뼈에 금이 가서 한동안 고생했다는 것은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범우는 술에 취한 탓에 흐리멍텅한 발음으로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연화를 빤히 쳐다봤다. 마주본 범우는 어릴 적 기르던 강아지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아마 불콰한 얼굴에 반쯤 풀린 눈을 하고 있었을 텐데 뭘 볼 게 있었는지 몇 분 동안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다. 둘은 마지막 열차가 전역을 출발할 때쯤에서야 정신을 차렸다. 연화는 열차에서 취기를 걷어내며 조금 전 범우의 감촉과 표정을 되뇌었다.

 

범우는 오지랖이 넓었다. 계단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오르시는 어르신을 보고 연화가 도와드려도 될까 걱정하고 있으면 어느새 범우는 다가가 짐을 들어드리고 있는 그런 아이였다. 학창 시절에 아이들은 학교 주소로 문제집들을 배송하곤 했는데, 자신의 교재를 찾으러 가서 아는 친구들의 이름이 적힌 모든 택배를 들고 교실들을 돌아다녀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고 그는 두어 번 얘기했다. 당시에는 친구들이 그의 이름을 따서 우지랖이라고 짓궂게 놀렸다고 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그의 표정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둘은 여느 대학교 신입생 커플들이 밟는 수순을 따라갔다. 연화가 감사 인사로 밥을 샀고 범우는 커피를 샀다. 카페에서 두어 시간 이야기를 하다보니 보고 싶은 영화가 같았고 주말에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연화는 자신이 영화표를 사겠다고 했고 범우는 팝콘을 자신이 사겠다고 했다. 그렇게 시나브로, 둘은 서로에게 젖어갔다. 한강에 가서 자전거를 탄 뒤 맥주를 마셨고 시험기간에는 도서관에서 밤을 새웠다. 그러다 먼저 고백한 것은 범우였다. 그것은 연화가 막 불안감 내지는 의구심 같은 것을 느낄 때였으므로 썩 괜찮은 시점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둘은 평소처럼 도서관에서 지하철역으로 내려가고 있었고 그때 범우가 연화의 손을 잡았다.

, 너도 나 좋아하냐?”

 

그렇게 둘은 연인이 되었다. 범우와 연화는 꽤 오랫동안 만났다. 대학교 일 학년 때 만남을 시작한 연인들이 하나둘 결별을 맞아 각자의 길을 가는 동안 둘은 여전히 함께였다. 주변에서 너네 결혼해야 되겠는데, 하던 농담들이 어느새 반쯤 진담의 형태로 바뀌어 갔다. 너무나 까마득한 일이어서 실감조차 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범우와 결혼하면 어떤 삶일까 하는 생각도 종종 하곤 했다. 그렇게 함께 한 시간이 근 4년이었다. 연화와 범우는 서로에게 20대의 전부에 다름 아니었다. 23살에게 4년은 인생에서 2할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문득 그 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떠올리면 어쩐지 막연하고 숙연해지는 것이었다.

 

4학년이 된 둘은 함께 석사를 밟을 학교를 물색하기에 이르렀다. 둘 다 유복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외국에서 석사를 하고 돌아와 박사까지 밟는다면 지방 대학의 교수 자리 정도는 무난하게 가져갈 수 있었으므로 유학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범우는 유학 시기가 엇갈리는 게 싫어 입대를 미루었다. 휴학 없이 4학년까지 달려오는 것은 적지 않게 고된 일이었다. 동기들은 각자 다른 때에 한 학기 혹은 한 년도를 휴학했고 각자 다른 시기에 학교로 돌아왔다. 동기들이 풀어 놓는 휴학 동안의 행복감을 들으며 연화는 그런 공백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일종의 유예였다. 일정 기간 동안 잠시 속박과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그러나 그것은 허상일 것이었다. 유예 속에서도 굴레를 생각해야 할 것이었고 끝끝내 무언가를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었다. 연화는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쫓기듯 마지막 학기가 되었다.

마지막 학기의 어느 날, 범우는 입대를 선언했다. 아버지께서 하시던 사업이 끝끝내 무너졌다고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학기의 절반이 지나가는 시점이었다. 연화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입대를 전하는 범우의 모습은 장고 끝에 결정을 전하는 비장한 것이라기보다도 거역할 수 없는 전언을 읊조리는 독백에 가까웠다. 범우는 무너진 잔해 속에서 끝까지 연화의 대학원 진학을 도왔다. 이듬해 1월 범우는 입대했다. 연화의 출국 일주일 전이었다. 범우와 범우의 아버지와 연화는 같은 차로 육군훈련소로 이동했다. 까까머리의 범우가 슬프게 웃었다. 경례를 하고 열을 맞춰가는 범우의 뒷모습이 멀어져갔다. 돌아오는 길에 범우의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연화는 자신의 집으로 차를 모는 범우의 아버지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지막 가는 길의 선물과 같은 것이어서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성질을 가졌다. 아버지께서는 연화의 아파트 단지 입구에 연화를 내려 주었다. 애썼다.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차는 멀어져 갔다. 그렇게 일주일 뒤 연화는 비행기에 올랐고 다시는 범우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러니 남의 입에서 범우의 이름을 듣는 것도 몇 년만의 일이었다. 이미 무르익은 자리의 분위기에 올라탄 이들은 자연스레 새로운 인물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으나 연화는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을 향한 곁눈질을 느낄 수 있었다. 캠퍼스 커플은 하는 게 아니라더니, 저런 시선으로 쳐다보니까 그런 말을 하지. 어쩌면 그런 시선으로 쳐다보려고 미리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뭐 그런 잡다한 생각들을 하고 있던 찰나.

 

, 근데 너 걔 결혼 했던 거 아냐?”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는 거친 방식으로 이야기가 시작된 감이 있었다. 내가 만약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어떻게 반응할 줄 알고, 아니 어떻게 반응하길 기대하고 저런 질문을 한 것일까. 순간적으로 옅은 짜증이 치밀었다.

연화가 유학을 다녀오는 사이 범우는 동기들에게 결혼을 선언했다고 했다. 상대는 연주라고 했다. 연주는 두 학번 위의 선배로 연화도 술자리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어 오고가는 길에 종종 인사 정도 하는 사이였다. 왜 벌써 결혼을 해? 쟤네 언제부터 사귀었었냐? 그 선배 별로지 않았냐?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었고, 어쨌든 범우의 결혼이었으므로 아이들은 모두 축하해주었다. 범우는 결혼식은 따로 올리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는데, 범우의 집안 사정을 아는 주변인들은 그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동기들은 이제 막 사회초년생이 되어 돈을 벌기 시작한 터라 주변에서 ‘1로 결혼하는 범우에게 각자 깜냥에 큰돈을 모아주었다. 식은 못 올려도 축의금 받았으니까 나중에 결혼식 와서 너도 축의금 내라? 그런 즐거운 말들을 하며 동기들은 돈을 모았다. 소식을 들은 학과 선후배들도 결혼을 축하하며 범우에게 돈을 보태주었다고들 했다. 범우의 결혼은 당황스러운 소식이었지만 어쨌든 경사였고, 어쨌든 범우였다.

연화가 이 소식을 들은 것은 물론 귀국을 하고 한참 뒤의 일이었다. 범우를 제외하고는 그나마 가장 친했던 여자동기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며 전한 소식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해주지 않은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고 그런 사이였는데 바다 건너까지 연락을 해서 야 니 전 남친 결혼하더라?’ 같은 말을 전해주었다면 아마 최소 몇 주, 아니 유학 전체 동안 머리를 맴돌았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니었으며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 하고 생각해야지 되새기고 있었다. 적당히 얼버무리는 웃음으로 아 뭐, 하고 말하던 것도 그러한 까닭이었다.

 

근데 걔네 이혼한다는 거 같더라?”

이혼이 뭐야, 그냥 헤어진 건가. 좌중의 시선을 후려잡은 그녀는 그렇게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면면들을 보건데 발언자를 빼고는 모두가 처음 듣는 소식인 듯했다. 자신이 맞게 들은 거라면 이제 결혼한 지 1년 정도 된 것 같은데 벌써 이혼을 했다는 말인가? 그것도 범우가? 아마 짐작컨대 모두가 동일한 생각을 하며 얼른 뒷이야기를 이어라는 눈으로 최초 발언자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최초 발언자는 답지 않게 이을 말을 가다듬고 있는 듯했다. 분명 기억 속 그녀는 적잖은 수다쟁이였으므로 부가적인 설명들이 이어지리라.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는 듯한 침묵이었다. 그 짧은 침묵의 순간 연화를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아까보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자신을 훔쳐보는 몇 시선이었다. 그 시선에는 모종의 걱정 같은 것이 묻어있었는데 그것은 오히려 연화를 불편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다행히 그 친구가 입을 열며 다시금 시선은 그의 입으로 쏠려 연화는 가볍게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두어 달 전 연주가 자기를 찾아왔다고 했다. 그렇게 막역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동아리에 몸 담았던 탓에 종종 연락은 하고 지내는 사이라고 했다. 신혼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나, 하고 나갔는데 그녀의 표정은 무척 장엄했다. 의아해하던 찰나 그녀가 뱉은 첫 마디가 나 이혼한 것 같아, 였다. 아니 이혼했어, 면 이혼했어이고 이혼 할지도 몰라, 면 할지도 모르는 거지 이혼한 것 같아는 당최 무슨 말인가.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고 생각대로 말했다고 했다. 너도 참 솔직하다. 옆에 앉은 친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친하지도 않은 그 친구를 찾아온 것은 그녀가 변호사였기 때문이었다. 연주의 용건은 이혼소송이었는데, 그녀는 자신이 범우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말했다. 자세한 사정은 들려주지 않고 그저 사기를 당했고, 이 경우에 대처할 방법 같은 것들을 물어보았다고 했다. 표정이나 억양으로 보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이야기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저 조언을 구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였다고 그녀는 말했다. 연주는 자신이 궁금한 것만 몇 가지 묻고는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내가 아는 건 그게 다야.”

범우가 사기? 그러게 범우가? 웅성거리는 반응에 친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시원시원한 동작과는 별개로 그의 표정도 여느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범우가. 정적이 돌았고 몇몇은 담배를 피러 밖으로 나갔다. 연화는 자리에 남아 침묵을 지켰다. 불편하고 뻑적지근한 침묵이었다.

 

그날 모임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으면서 술자리는 2, 3차로 이어졌다. 천 원 이천 원에 안주를 바꾸던 시절은 뒤안길로 물러났으므로 그들은 어느 누군가 먼저 꺼낸 이름의 가게를 무작정 찾았고, 먹고 싶은 메뉴를 마구잡이로 시킨 뒤 추억에 까치밥을 남긴다는 돼먹지 않은 소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할증이 끝난 시간의 택시비는 그 안줏값들보다는 저렴했다. 연화는 어느 순간부터 드문드문 자취만 남은 기억을 부여잡은 채로 침대에 고꾸라졌다.

숙취는 의도된 바대로 마땅한 수순이었다. 다만 머리가 지끈거리는 와중에도 복잡한 생각은 가시지 않았다. 가능성의 파편들이 조각조각 뇌 속에 박혀 지끈대는 고통을 한층 더했다. 발화와 발화자 사이의 신뢰가 뒤섞이고 기억 속 표상과 이야기 속 표상이 겹쳐 좀처럼 그 너머를 볼 수 없었다. 나름의 자부심 비슷한 것 때문이었을까. 첫 연애였지만 누구보다 멋지게 사랑했다고 생각했고 첫 이별이지만 누구보다 아름답게 헤어졌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난 인연에 구차하게 매달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 매달림은 미련이라든가 나와 연을 맺었던 사람의 추락에 대한 염려 따위가 아니었다. 다만 생을 통틀어 가장 잘 알았다고 생각했던 사람에 대한 거리감을 견딜 수 없었다. 학창 시절 그 어떤 친구보다, 자신의 부모님보다 자신을 많이 들춰냈고, 그것은 서로에게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의 범우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들은 연화가 아는 그 범우의 결이 아니었다. 그가 변해간 것인지, 아니면 드러낸 것인지 연화로서는 분간할 수 없었다.

 

연화는 유학을 떠나있는 동안 우편을 받은 적이 딱 두 번 있었는데 발신자는 적혀있지 않았다. 긴 편지는 아니었고 짤막한 엽서였다. 생일 축하해. 늘 건강하고. 문체조차 추측할 수 없을 만큼 간결한 엽서였다. 캘리그라피로 적혀 있었는데, 인쇄물이 아니라 자필이었다. 연화 주변에 캘리그라피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연화가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은 한 명 뿐이었다. 엽서는 연화로 하여금 어떤 기대를 품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여 온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어서 어쩐지 흐뭇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것은 과거의 추억이 소멸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확인한 자의 감동 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기억이 되살아나 도리어 연화를 들쑤셨다. 과거의 추억은 과거에 머무를 때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었을까. 연화는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렇게 보내기를 며칠. 얼마 전 새해랍시고 이리저리 복 받으라는 연락을 받았으니 새해임은 확실했다. 새해라. 연화는 스스로가 여전히 작년에 갇혀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작년보다 더 과거의 시절이었다. 연화는 범우와 함께였던 기억에 묻혀있었다. 그것은 작년에 머무르는 것도, 새해를 맞이하는 것도 아닌 종잡을 수 없는 시간대였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그 어딘가를 배회하며 연화는 끝없는 상념을 곱씹었다. 둘은 언제부터 그런 관계였던 것일까. 연주의 말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인 것일까. 사실이 있기는 한 것일까. 범우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언제부터 이렇게 자신으로부터 멀어진 것일까. 둘은 언제부터 만난 걸까. 둘 사이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집에 틀어박혀 혼자 머리를 쥐어뜯어봤자 알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듣는 수밖에는 없다고, 연화는 얼음을 씹어 먹으며 문득 깨달았다.

 

연주는 의외로 흔쾌히 연락에 응했다. 다짜고짜 전화를 걸기는 했지만 생각해보면 정상적인 연락은 아니었다. 남편의 전 여자친구에게서 대뜸 걸려 와서 만나자는 전화라니. 그걸 감안하면 유쾌하지 않은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도 꽤 친절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그녀의 말투에는 자신의 불행을 알림으로써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 특유의 억양이 묻어났다.

일주일만의 외출이었지만 날은 여전했다. 눈은 오지 않았고 바람이 찼다. 연주를 만난 것은 학교 근처 카페였다. 낡은 오두막 같은 내부 방식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연주가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도 있었다고 했으니 10년이 넘은 곳이었다. 연주와 단 둘이 마주앉은 것은 처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것도 벌써 5년 전의 일이었다. 10년과 5. 연화는 그 시간을 헤어보며 연주를 살폈다. 만나기로 한 역 앞에서 연주를 알아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는데 그녀가 여전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제 한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의 면면을 발견할 수 있었으나 얼핏 보기에 그녀는 여전히 젊었다.

어쩐 일이니

연주의 음성은 전화기 너머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울적한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 건조하고 메마른 느낌을 주었다.

잘 지내시나 해서요.”

연화는 최대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지만 연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어떻게 보아도 불편한 대면임은 틀림없었다. 연주에게 연화는 남편의 전 여자친구였고, 적어도 전 남편의 전 여자친구였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연화는 별다른 연주의 표정 변화에 동요하지 않았다.

무슨 얘기가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는데.”

말 그대론데. 잘 지내시나 해서요.”

연주가 지긋이 연화를 응시했다. 적대감이라기보다는 탐색하려는 눈빛이었다. 잠시 간의 정적 뒤 연주가 피식 웃었다.

뭘 들은 게 있나 본데, 굳이 날 찾아온 저의가 뭐니? 애상감에라도 젖었니?”

연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시작했다.

우리 지금 이혼 비슷한 걸 준비 중이야.”

예상과 달리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연화로서 굳이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연주는 자신이 범우에게 속았다고 말했다. 연주가 범우와 감정을 키워간 것은 범우가 휴가를 나와서라고 했다. 범우는 방황하고 있었고 그런 범우를 위로하다 친해졌다고 그녀는 말했다. 둘은 썩 잘 맞았고 범우가 전역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약속했다. 둘은 최소한의 절차만 밟아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들었던 대로 둘은 대학교 동문들로부터, 그리고 각자의 지인들로부터 결코 적지 않은 액수의 축의감이랄 것을 받았다. 어차피 둘은 각자 서울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기에 집을 살 이유도 없었고 차 또한 급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둘은 축의금을 어떻게든 굴려보기로 했고, 취직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바쁜 연주 대신 범우가 이를 담당하기로 합의를 봤다. 그런데 범우가 어느 날 이혼 의사를 전달했다. 그것도 전화로. 둘은 아직 남은 계약 기간 때문에 평소에는 각자의 집에서 살다가 주말에 한쪽으로 가서 함께 지냈다고 했다. 이제 다음 달이면 계약기간이 끝이 나서 보증금을 합쳐 새 집을 구할 생각이었는데 전화로 이혼을 전달받은 것이다.

이혼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니지 않나요?”

맞지. 근데 우리가 혼인신고를 안 해서.”

혼인신고를 안 했다고요? 왜요?”

요즘 다들 혹시 모른다고 일 년 있다가 하고 그러잖아. 그래서 나도 새 집 들어갈 때 하려고 했지.”

연주가 연락을 받고 범우를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었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제서야 다급한 마음이 되어 범우가 가져간 돈이 생각났다. 사실 남은 돈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는데, 범우가 친구와 함께 열었던 가게가 난항을 겪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폐업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 돈의 적지 않은 지분은 자신의 것인데 이렇게 이혼 선언이라니. 사기에 다름없지 않냐는 것이었다.

연주의 말은 여기저기 얼룩진 것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많았다. 우선 연화가 아는 연주네는 꽤나 유복했다. 그 축의금은 연화 자신이나 범우에게는 큰돈이겠지만 연주에게는 그리 큰돈은 아닐 것이다. 푼돈은 아니라 해도 적어도 동네방네 이혼을 소문내고 다닐 만큼의 액수는 아닐 것이다. 학교 사람에게 사기니 이혼이니 알려서 무슨 득이 있을까. 또 범우가 얼굴도 마주하지 않은 채 전화로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한다는 것은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그 범우가.

 

범우와 연인일 당시 연화는 범우의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지향에 적잖이 놀라곤 했다. 그 중 한번은 헤어진 동기에게 위로주를 사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실연당한 남자들의 규범인 듯, 동기는 연거푸 술잔을 비우고 종국에는 여자친구를 원망했다. 돌아오는 길에 범우는 전 여자친구에 대한 동기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여자친구를 욕하는 거지? 여자친구였잖아.”

애써 잊으려고 하는 거지. 저렇게 말하고 집 가서는 보고 싶다고 울 걸?”

그게 뭐야. 다른 사람 앞에서 여자친구를 욕되게 하는 거잖아.”

이별 또한 사랑의 과정이며, 불현듯 떠오르는 함께 했던 시간들이 행복한 모습이든 불행했던 모습이든 어쨌든 그것들은 지금의 자신을 구성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라고 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연화는 그런 그에게 차마 그건 너무 이상론이야, 라고 핀잔을 주거나 상처만 가득한 연애도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그의 손을 쥐어줄 뿐이었다. 혹여나 미래에 자신과 연애가 끝난다고 해도 그가 이러한 가치관을 견지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적어도 연화가 본 범우는 일관된 아이였다. 유연한 것 같으면서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기도 했고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한없이 무겁기도 했다. 대신 그 유연함과 완고함, 가벼움과 무거움은 제 자리를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가벼운 것은 늘 가벼웠고 무거운 것은 늘 무거워 그 위치를 조금씩 바꿀 뿐 크게 요동치는 일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범우는 오히려 단순했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이 그렇게 낭만적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가진 것은 학력밖에 없는 무일푼의 백수와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도, 그것보다도 그런 처지의 범우가 결혼을 마음먹었다는 것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의문이 이어졌지만 입 안에만 머물렀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데요?”

너 내 말 안 믿는구나?”

연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비릿하게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글쎄, 범우가.

애초에 그 사람은 그럴 계획이었던 거지. 고소를 할까 생각 중이야.”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고소를 한 것은 아닌 듯했다. 여전히. 연주는 볼 일이 있다며 먼저 일어났다. 커피 잘 먹었습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연주는 잰걸음으로 가게를 나섰다.

 

연호는 다시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 다시 여기로 돌아오게 되었다. 일단 부딪치면 무엇이든 깨질 것이라는 생각은 번번이 허상임이 드러났다. 전력으로 들이받았더니 저만큼 멀리에서 다시금 상이 나타났다. 신기루를 쫓는 것마냥 허탈한 심정이었다. 알아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달리고보니 제자리 뜀박질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연화는 범우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쯤 그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범우도 직접 만나봐야 할까.

 

연화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다른 사람의 남편이고, 자신은 그 사람의 전 여자친구였다. 직접 연락을 할 수는 없었다. 설렁 연락을 한다고 해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너 언제부터 그 사람이랑 만났어? 왜 결혼할 생각이 들었어? 진짜 연주 선배한테 사기를 쳤어? 집안 사정은 좀 괜찮아졌어?

 

예전에 딱 한 번, 범우는 연화 앞에서 심한 욕을 했던 적이 있다. 연화에게 한 것은 아니었고, 범우는 연화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대학교 2학년 1학기였을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만나기로 했던 2층의 쉼터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안에서 범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누군가와 같이 있는 듯했다. 반가움도 느낄 사이 없이 매서운 음성이 귀에 꽂혔다. 범우의 말투에는 평소에 두드러지지 않는 억양들이 불거져있었다. 연화는 멈춰 서서 벽 너머의 목소리를 들었다. 상대는 범우와 팀 프로젝트를 하는 다른 여학우인 듯했다. 그즈음 범우는 한 학기 동안 하는 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는데, 조원들 중 한 명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시간 약속에 맞춰오는 날은 없고 자료조사는 복사-붙여넣기에 그러면서도 미안한 기색이 없다고 했다. , 범우가 폭발했나보다. 연화는 가볍게 떨었다. 범우도 화를 내는구나. 하긴 사람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범우가 자신에게 화난 건 없을까 생각하던 찰나였다.

버러지 같은 년

또렷한 범우의 목소리가 들렸고, 곧바로 범우가 휴게실 문을 열고 나왔다.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돌렸다. 범우는 곧장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안에서는 여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연화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몇 분을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있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사이 울음소리의 주인공이라고 생각되는 여자는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연화는 휴게실에 앉아 그 목소리를 되뇌었다. 본 적 없는 범우의 표정을 그려보았다.

먼저 와있었네.”

범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원래 연화가 알던 그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 연화는 범우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연화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고, 범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연화는 범우의 그 음성을 곱씹었다. 그러나 단물 빠진 껌 마냥 씹을수록 찝찝한 뒷맛만 남았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상념은 꼬리를 물고 길어졌다. 갖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결국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연화는 그런 생각을 하며 텔레비전을 켰다. 실로 오랜만에 눌러보는 리모컨의 촉감이었다. 휴대폰으로 대부분의 영상 매체를 접하게 된 뒤로 텔레비전은 뉴스채널에 거의 고정되어 있었다. 늘 보던 아나운서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염창역 인근 사거리에서 한 청년이 무단횡단을 하다 차에 치일 뻔한 할머니를 구하고 세상을 떠나 안타까움을 사고 있습니다. 청년은···

 

몸이 굳고 가벼운 소름이 목을 타고 뒤통수로 올라왔다. 염창역은 범우의 집 부근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카메라가 담는 사고 현장은 장을 보러 나가는 대형 마트 근처였다. 이어지는 의인청년에 대한 정보들은 그가 모르는 이야기들이었지만 어쩐지 엄습하는 기시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의인 신상정보에 따르면 그는 범우가 아니었다. 연화는 옅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안도감이 범우가 죽지 않았다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범우에 대한 자신의 의혹들을 풀 수 있는 방법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의인의 행적은 인터넷과 SNS에서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도덕 교과서에 실릴 만한 사건이라는 말과 함께 그를 추모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이 시대의 참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그의 장례식장을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연화는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무엇을 위해. 알 수 없었다. 그저 가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연화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옷을 골랐다.

 

장례식장은 생각만큼 북적이지는 않았다. 인터넷에서 확인했던 그 이름을 확인하고 빈소를 찾았다. 이미 수많은 국화가 그의 영정을 둘러싸고 있었다. 대학교 졸업사진으로 추정되는 그의 미소가 환했다. 연화는 절을 올리고 나와 육개장과 찬 몇 개를 받았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이미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오늘 처음 만난 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생의 정점 근처에서 삶을 마감하는 특권을 가지고 돌아갔다. 그는 여태까지 살아왔던 구체적 삶과 별개로 완연한 의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는 슬퍼할까. 연화는 환하게 웃고 있는 의인의 삶을 멋대로 짐작해보았다.

 

조문객들은 바톤터치를 하는 것처럼 누군가 자리를 뜨면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채워 일정한 수를 유지했다. 장례식장은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낯선 이들이 섞인 채로 머무는 북적임이 있었다. 간간이 구청장이니 국회의원이니 하는 사람들도 여럿 찾아왔다. 그들은 꽤나 그럴 듯하게 슬픈 표정으로 절을 올렸고 하나 같이 나가는 길에 유족들의 손을 잡았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자 장례식장은 한산해졌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가까운 지인으로 보였다. 발인까지 함께 할 생각인지 이미 밤을 지새울 듯한 태도였다. 저마다 다른 채도의 눈시울을 한 소복 차림의 유가족들이 탁자에 둘러앉는 것을 보고 연화는 조용히 식장을 빠져나왔다. 밖은 선선했다. 너르게 구획된 주차장과 그 옆을 채우고 있는 정갈한 수풀을 따라 연화는 몇 발짝 걸었다.

연화는 수풀과 바람과 달 사이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처음에는 이러저런 복잡한 심정으로, 그러다가 피곤함으로, 어느 순간에는 자신도 종잡을 수 없는 생각들로 머리가 가득 찼다. 여기에 왜 왔을까, 여기는 어디일까. 그런 생각들조차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시간은 사라지고 존재만 남은 공간에서 연화는 아주 오래도록 서있었다.

 

일출 시간이 지났음에도 해는 뜨지 않았다. 구름이 짙었다. 동이 틀 때 쯤 식장 안에서 낮게 들썩이는 행렬이 이어졌다. 서로 다른 곡소리가 얽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으면서 가쁘게 이어졌다. 한 명의 울음은 없었고 그것들은 한데모여 하나의 소리를 이루는 듯했다. 곡소리는 건물을 크게 돌아 운구차로 향했다. 의인의 아버지는 제 아들의 영정을 들고 앞좌석으로 밀려들어갔다. 차는 느릿하게 움직였다. 근처 화장터까지는 차로 30분 정도 걸릴 것이었다. 그는 거기서 뭉개진 뼛가루가 될 것이었다. 고작 서너 시간 뒤면 그 모든 게 끝날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의인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연화는 그곳에서 어딘가에 있을 범우를 떠올렸다. 연화가 떠올릴 수 있는 범우는 여전히 대학생 시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연주와 가정을 꾸리고 이제는 다시 혼자가 될 범우는 떠올릴 수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떠올릴 수 없을 터였다.

 

멀리서 구름이 차츰 걷혔다. 희미하게나마 건너편 건물들 위로 볕이 자취를 드러냈다. 연화는 마음속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의 빈자리는 허하면서도 홀가분했다. 이윽고 저 어둑하고 옅은 볕을 올해 자신의 첫 일출로 생각하기로 했다.

 

시린 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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