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 대상] 해아다孩兒茶
[2021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 대상] 해아다孩兒茶
  • 이재은<사범대 교육공학과 19> 씨
  • 승인 2021.11.29
  • 호수 1540
  • 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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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키의 배가 심상치 않았다. 물풍선처럼 부어오른 배를 까뒤집고 키키는 누워서 헐떡댔다. 까만 포도알 같은 눈이 젖어 빛났다. 키키야. 왜 그래. 많이 힘들어? 시간이 지나면서 키키에게선 점점 비린내가 났다. 얼마 전부터 심해지고 있었다. 겨드랑이에 끼고 바닥에 누워 있으면 비릿한 내음이 콧속으로 훅 들어와 불쾌했다. 피부가 다 내비치는 듬성한 털. 이제는 비누로 아무리 세게 문질러도 좋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아빠가 동네까지 내려가 사온 오이 비누도 소용 없었다. 아픈 키키는 가슴팍에 꽉 안아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다. 하지만 눈물이 차면 무른 포도알 같아지는 눈알이 금방이라도 흐무러질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진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물컹거리며 쑤욱 들어가겠지.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풍선 같은 키키의 안에 찬 분홍 액체를 투시하려 애쓴다. 한참 들여다보고 있자니 눈가가 저려왔다. 저것이 뭔데 우리 키키를 힘들게 하는지. 안쓰러운 우리 키키. 저 허연 피부 밑에 무엇이 우글거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임신한 개.

라고 치니 모르는 병원 이름과 강아지 중성화 정보들이 쏟아졌다.

개 임신. 이라 고쳐 치고 이미지를 클릭했다. 털이 풍성한 강아지 가족들이 파란 들판을 뛰어가거나 일렬로 앉아 있는 사진이 나왔다. 동그랗게 모여 배를 까고 누운 사진도 있었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닌데. 아무리 내려도 키키처럼 눅눅한 얼굴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랑이 안이 간지러웠다.

집 대문에서 나와 방향을 틀지 않고 몇 분 내려가면 터널이 나온다. 언제부터 우리 집이 터널 위에 있었는지는 모른다. 태어났을 때부터 터널과 나와 우리 집은 하나였다. 언제부터 기억이 시작됐나요? 누가 묻고 터널 소리로부터요, 내가 새초롬 머리를 꼬며 답하는 상상을 개미굴을 파며 종종 하곤 했었다. 물론 어떤 사람도 내게 그렇게 묻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여기엔 나와 아빠와 키키 외엔 없으니까. 그렇지만 내겐 터널이 있었다. 나에게 물어오는 터널이.

전원을 끄자 컴퓨터가 기계 소리를 내며 힘겹게 돌아갔다. 그 소리에 맞춰 키키가 약한 목소리로 낑낑댔다.

찰랑거리는 열쇠가 주머니 속에서 흔들렸다. 이 곳에서 들리지 않는 소리란 없다. 바람이 이마를 넘어가는 소리도 들리고 벽이 몸을 떠는 소리도 들린다. 가끔 심심할 때 하늘에 대고 소리를 지르면 내 목소리보다 가냘픈 메아리가 여러 개 겹쳐 들려온다. 온통 산뿐인 곳에선 어딜 가도 나무들뿐이어서. 한 번 울린 파장은 나무를 지나 또 다른 나무를 지나 멀리 멀리 퍼져 나간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열쇠 끝을 틱, 틱 소리를 내며 긁었다. 조용한 나무는 조용해서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나는 문을 닫고 집을 나섰다. 키키 옆에 누워 있거나 아빠 옆에 누워 있을 때 말고 나는 항상 걸어 다닌다. 늙어빠진 낙엽을 섞고 진흙을 밟으면서 걷는다. 가만히 있으면 조용해지니까. 조용한 건 싫으니까. 키키도 신음을 내고 아빠도 신음을 낼 때면 나도 소리를 냈다. 더 크게 냈다. 걸을 때는 발가락 마디를 펴서 걸어야 더 소란할 수 있었다.

 

*

 

나는 마루에 앉아 해아 언니를 기다린다. 중앙에 걸터앉자 주머니 속 열쇠가 다시금 소리를 냈다. 파란 물결무늬 판넬 아래 나무 마루가 뻗은 집. 그곳에 해아 언니가 살았다. 뒷문으로 난 커다란 아까시를 따라 몇 분 올라가면 언니네 집이 나온다. 어디까지 아까시가 있나. 대체 언제 아까시가 끝나려나. 오기가 생겨 끝장을 보려던 오후였다. 아빠도 밖에 나가고 없어 심심한 참이었고 키키는 계속 자기만 했다. 정신이 아득해질 때쯤 달큼한 냄새 끝에서 언니를 만났다. 제 몸 만 한 대야를 옆에 끼고 까치발을 뜬 채 가지를 훑고 있는 사람. 파란 대야 위 솜처럼 수북이 쌓인 하얀 아까시. 바닥을 디딘 해아 언니의 발꿈치가 그것보다 새하얘서, 눈이 부실만큼 하얀 발꿈치를 그때 처음 봐서 나는 놀랐다. 그게 벌써 지난봄이다.

삼십초 다 셌어?

온힘을 다해 주먹을 말아 쥔 채로 나는 언니의 신호를 기다린다. 손등 뼈의 굴곡이 벌써 하얘져 있었다. 내가 주먹을 쥐고 마루에 앉아 있는 동안 언니는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몸을 말렸다. 하얗고 마른 언니의 몸이 축축해 보였다. 밖에 나갔다 오면 항상 해아 언니는 오래 씻었다.

.

, 한다.

해아 언니가 발음 모를 주문을 외우고 주먹 위에서 손가락을 두어 번 돌린다.

하나, 두울, .

그러고 나면 찌르르.

일순간 오줌을 누는 것 같이 손끝이 싸해 왔다.

, 진짜 백만볼트에요.

나는 고개를 돌려 펼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작은 반달 같은 손톱자국 네 개가 나 있었다.

 

해가 질 때의 겨울은 춥다. 흰 구름이 사라지고 산 아래로 차가 지나가면 컵과 물주전자가 미세하고 가는 소리를 낸다. 멀리서 들려오는 아가의 발소리 같기도 하고, 물고기가 뻐끔대는 소리 같기도 한. 너무 조심스러워서 귀를 기울여야만 들리기 시작하는 소리가. 그럴 때 나는 옆에 누운 아빠로부터 등을 돌린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속삭인다.

터널이 내게 말을 걸고 있구나.

소리가 이어지는 몇 초 동안을 가만 숨죽이다가 일, , , , , ……, 진동이 끝나면 방바닥을 두 번 두드렸다. 십 초가 지나면 똑똑, 이십 초가 지나면 똑똑, 똑똑. 몇 백 번 쯤 두드리다 보면 사위가 조용해졌고, 그러고 나면 한밤이었다. 그렇게 나는 매일 밤 터널을 만나고 낮에는 터널을 감싸고 있는 차가운 풀들 사이를 뛰어 다녔다. 꽃을 뭉텅이 째로 뜯고 흰 즙이 나오는 줄기 끝을 쪽쪽 빨아 먹었다. 땅에서 솟은 것들은 터널의 머리카락이고 나는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애완견이라는 생각. 그런 걸 떠올리면 뛰어다니는 일이 더 즐거웠다. 진드기라고 해야 하려나, 키키. 그게 좀 더 앙증맞을까? 터널은 내게 거대했고 그 속은 아늑했다. 나무는 촘촘해서 밖으로부터 잘 가려줬고 또 밖을 보이지 않게 했다. 바깥은 위험해서 나가면 안 돼.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새벽엔 그렇게 말하며 뒤에서 나를 꼭 안아주는 아빠도 나는 갖고 있었다.

해아 언니를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와 아빠와 키키 밖에 없다, 고 생각했었다.

버려져 반쯤 무너진 폐가라거나 도통 뭐가 들었는지 짐작도 안 되는 쓰레기봉투는 마주친 적 있지만 사람은 처음이었다. 풀을 진하게 달여 먹기를 좋아하고 이것저것 모르는 나무 이름이 없는 해아 언니가 왜 이 곳에 살고 있는 건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무성한 나무들을 헤치고 어떻게 이 깊은 곳까지 들어 왔는지. 그런 걸 생각하면 수풀을 짓밟고 나아가는 언니의 희끗한 발꿈치가 그려졌다.

왜 여기로 왔어요? 여긴 온통 산뿐인데.

토끼풀 줄기를 가르며 넌지시 물은 게 몇 번이다. 자꾸만 끊어져 여섯 번째로 뽑은 풀이었다. 늘 그렇듯 해아 언니는 제대로 답해주지 않았다. 밖으로 나갔다 오는 금요일이면 항상 어디에 다녀오는 건지. 왜 매번 긴 가발을 눌러 쓰고 나서는 건지. 몰랐지만 언니는 알려주지 않아서 나는 계속 몰랐다. 손톱 아래로 녹즙이 끼어 더러웠다. 언니는 그저 웃기만 했다. 언니의 기억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나요? 아까시를 달이며 서 있는 언니의 숭숭 비어있는 뒤통수를 보고 있으면 가끔 묻고 싶어지지만 나는 꾹 참는다.

 

*

 

나는 터널의 전체를 본 적이 없다. 가파른 모서리까지 내려가야 나무 사이로 터널의 얼굴이 보인다. 그나마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기운 반원이고 반대쪽으로 돌아가면 왼쪽으로 긴 반원이다. 빈틈없이 동그란, 반듯한 터널의 얼굴을 보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나는 한 번도 도로로 내려가 본 적 없었다. 터널을 보려면 터널로부터 떠나야 했다. 그럴 순 없었다. 두꺼운 잿빛 피부 위 초록 머리. 크르릉 거리는 소리를 낼 때마다 눈구멍 깊숙한 곳에서부터 반짝여오는 섬광. 꿈에서 본 터널의 모습은 매번 그렇다.

벌써 동이 트고 있었다. 나는 잠든 해아 언니를 두고 집을 나섰다. 키키에게 아침밥을 줘야 했다. 키키는 아파도 밥은 잘 먹었다. 죽을 개듯 밥알을 뭉개 우유에 타 주면 곧잘 받아먹었다. 발밑의 눈이 바사삭 소리를 내며 바스라진다. 눈은 낙엽 소리가 기억나지 않을 때쯤 쌓인다. 그러므로 난 두 계절의 차이점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영원히 그럴거야. 입김이 피어나서 그렇게 생각했다.

토끼풀로 반지를 만드는 걸 가르쳐준 것도 해아 언니였다. 꽃자루 중앙을 찢어 줄기 끝을 끼워 넣으면 동그랗게 말린 모양이 된다. 알싸한 풀냄새까지 나는 반지. 해아 언니를 만나고 나서는 그런 것도 가질 수 있었다. 아빠는 이런 걸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빠는 거의 집에 없었으니까.

아빠는 일주일에 이틀 빼고는 전부 밖으로 나간다. 한번 나가면 사흘 정도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다 한밤중이 되면 큰소리를 내며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아빠의 휘청이는 발소리는 멀리서부터 섞이는 고함 소리 때문에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씨발, 또 잃었어. 내가 가만있나 봐. 쓰레기 같은 놈들. 그런 소리가 멎으면 철문이 깨지는 충격음이 들리고 아빠의 늙은 얼굴이 문틈으로 나타난다. 말라비틀어진 모과 같은 얼굴이다.

돈을 벌어 오는 거라고 했다. 정말 그럴 적도 있긴 했지만 돈은 들고 나갈 때가 더 많았다. 아빠는 검은 비닐봉투에 초록 지폐를 담아 공기를 눌러 뺀 뒤 가죽 잠바 안에 구겨 넣고 나갔다. 동전이 많을 때에는 쪼그려 앉아 신을 신을 때 짤랑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열쇠보다 맑았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까만 가죽을 찢고 그런 소리가 계속 났다.

돈을 들고 오지 않을 때 대신 아빠는 맛있는 걸 들고 왔다. 아이스크림 빵이나 질겅질겅 계속 씹으면 껌이 되는 캔디. 포도는 조금 물러진 것이 더 달았다. 그래서 난 아빠가 돈을 들고 오지 않는 밤이 더 좋았다. 그런 날 밤에는 집이 더 많이 흔들렸다. 아빠도 소리를 더 냈다.

좇만한 년. 넌 너무 작아.

아빠는 내게 늘 말했다. 나는 내가 그만하게 작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벌레처럼 나는 키가 작았다. 옆에 누우면 내 정수리는 아빠의 겨드랑이에 닿을까 말까 한다. 그러면 아빠는 소리를 내다 말고 간지럽다며 조금 웃었다.

나는 나를 벌레로 여겼다. 어디든 티내지 않고 빠르게 돌아다니는 풀벌레처럼 난 어디든 갈 수 있었으니까. 썩은 나무 등치 안과 빈집을 들어갔다 나오는 일은 일종의 놀이였다. 벌레가 되어, 터널의 모공을 다 헤집고 다니는. 그러니까 터널을 마구 간질이는. 툭 스쳐도 미동도 않는 나무와 달리 해아 언니는 그러지 않았다.

언니는 내게 처음 보는 것들을 많이 알려줬다. 허리가 아프면 몇 번째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야 하는지, 간지러운 곳에는 어떤 풀을 으깨 발라야 하는지. 물 대신 식초나 밀가루를 넣어 개어야 하는 풀이 뭔지. 언니네 집에는 작고 큰 유리병이 많았다. 손가락 마디 크기로 다듬어진 풀들과 마른 꽃들, 까맣고 하얀 가루들이 그 안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게 뭐에요?

물으면 언니는 몸에 좋은 거라고 말했다.

몸을 낫게 하는 거야.

언니의 머리 뒤로 갈색 병에 잠긴 뿌리들을 바라다 보다 언니는 참 똑똑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해아 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얇은 머리카락 사이로 훤히 보이는 언니의 두피는 가늘어서 연약해보였다. 언니는 나아지고 있는 걸까. 나는 털이 많아서 미안했다. 멍청해서 미안했고 언니와 달리 손톱 때처럼 검어서 미안했다.

수도를 틀어 이마를 씻어냈다. 찬 물이 기침처럼 터져 나왔다. 키키에게 아침을 먹이고 수돗가에 앉아 조용히 드는 볕을 지켜보았다. 그래 어디까지 조용하나 보자. 나는 가만있다 볕이 막 들기 시작한 부분으로 돌멩이를 집어던졌다.

 

*

 

키키는 담요 위에 누워있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 외에 다른 건 하지 않는다. 상관은 없었다. 돌아다니는 건 내 일이니까. 가만히 있는 건 키키의 일이었다.

새벽 보다는 아침에 차가 더 많다. 하나 둘 지나가기 시작하는 차들이 발 아래로 느껴졌다. 키키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미 늙어 있었다. 얼굴도 몸도 쭈글거렸다. 불쌍해서 데려왔다고 아빠는 말했다. 도저히 버리고 올 수가 있어야지. 나는 눈가를 훔치며 다짐했다. 너와 나는 운명이구나. 앞으로 내가 잘해줄게. 운명이라는 어감이 듣기 좋았고 아빠는 근처에서 울었다. 그래. 운명이야…….

나는 아까시를 담을 통을 챙겨 집을 나섰다. 냉동된 아까시로 만드는 약은 효과가 좋았다. 얼마 전 만들어 놓은 건 이미 다 동난 참이었다. 요즘엔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간지러웠다. 밥을 먹다가도, 키키를 쓰다듬다가도 오른손을 바지에 넣어 벅벅 긁어야 했다.

얼린 가지와 잎을 졸인 다음 모양을 다져 말리면 딱딱한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메주같이 생긴 걸 처음 마주했을 땐 이걸 어디에 쓰는 건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내게 붙은 피딱지를 보고 해아 언니는 곧장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갔다. 처음 만났을 때였다.

이렇게 하는 거야. 계속 서서 끓여야 해. 여섯 시간이고, 일곱 시간이고.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냐고 묻지 않았다. 쓰라리지 않냐고도. 언니는 그저 불 앞에 서서 계속 국자를 휘저었다. 멍해 보이기도 했고 졸려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낮잠을 자야할 시간인지도 몰랐다. 벌써 해가 낮아져 있었다. 휘젓다 보면 잎과 가지와 꽃이 누렇게 변하다가 점점 짙은 갈색이 된다. 아까시를 달일 때에는 쓰고 단 냄새가 집 밖까지 난다. 해아 언니네 집에는 늘 그 냄새가 났다.

만든 덩이는 갈아서 가루를 내거나 개어 바르면 간지러운 것이 훅 가라앉는다. 언니는 손절구를 들고 와 내 앞에 내려놓았다. 흑설탕 같이 생긴 사각형이 그 안에 잔뜩 들어 있었다. 나는 마루 위로 올라온 개미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이 흑설탕은 너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거야 이 좆만한 개미야. 나는 손등으로 개미를 쓸어버렸다. 왠지 기분이 좋았다.

언니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을 때 나는 청아에요. 청아. 원래 푸른 아이라는 뜻인데, 사실 들을 청이 더 좋아요. 들을 청 알아요, 언니? 했다. 언니는 내 말을 끝까지 다 듣고 말했다.

그렇구나. 듣는 아이구나, .

나도 아는 게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저 쓸 줄도 안다요.

나는 언니의 손바닥 위에서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지만 언니가 알아준 건지는 모르겠다. 언니는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다. 자기 이름도, 내 이름도.

조그만 막대를 들어 짓이기기 시작하자 움직일 때마다 밑에서 와지직, 타들어가는 소리가 올라왔다. 알갱이가 부서지는 게 아니라 타들어가는 듯했다.

근데 언니는 정말 안 말해줄 거예요? 그럼 그냥 이름 언니로 한다요?

언니는 다 빻은 가루를 탁한 액체에 개어 손가락에 푹 찍었다. 벌려. 이렇게 부드러워질 때까지 바르는 거야. 부루퉁한 내 목소리는 오후의 햇빛과 적막에 흡수되어 버렸다. 고요한 볕 사이로 먼지가 떠다니는 마루 위에서, 그렇게 앉아, 무릎 사이로 언니의 머리가 움직였다. 차가운 기운에 아래가 자꾸만 움찔거렸다.

, 이게 뭐에요?

나는 떨리는 숨소리를 고르며 입을 열었다.

해아다孩兒茶.

이제부터 나를 그렇게 불러. 언니는 까만 눈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무릎 위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

그때부터 언니는 해아다. 해아 언니. 아까시의 잎과 가지를 자작하게 졸여 만든 흑색 덩어리. 쓰고 떫지만 끝 맛은 단, 새살이 돋게 하고 습진을 가라앉히는 데 탁월한. 누구는 그걸 아선약이라 부른다 했다. 다른 말로는 아다. 또 다른 말로는 해아다. 나는 그 이후로 약도 말도 잘 듣는 아이가 되었다.

 

*

 

며칠 동안 우박이 심했다. 밖에 나가면 하얀 뭉치가 뚝 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 중 하나를 내치려다가 발목을 삔 밤 아빠는 훌쩍이다 컥, 하고 들끓는 소리를 내곤 뭐라 빠르게 중얼거렸다. 안쓰러운 우리 아빠. 아빠의 머리는 늘 엉겨 있다. 아무렇게나 뻗친 머리카락을 보고 있으면 꼭 엄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엄마도 이렇게 누워서 이렇게 머리를 들여다보았겠지. 이 역겨운 냄새를 맡았겠지.

살만 하냐.

아빠는 자주 그렇게 물었다. 내가 밥을 먹고 있을 때도, 키키를 안고 창가에 앉아 있을 때도, 멀찍이 서서 내가 있는 쪽을 보며 그렇게 말을 걸었다. 나를 바라보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키키의 얼굴이나 창밖을 애매하게 쳐다보며 그리 묻는다. 아빠와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는다. 내가 고개를 들어 아빠의 얼굴을 쳐다보면 아빠는 금방 고개를 돌려 버린다. 술을 먹지 않은 때의 아빠는 그랬다. 아빠가 어젯밤 사온 과일은 너무 물러 있었다. 어둠 사이로 파리가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터널이 엄마를 삼켜버렸다고 했다. 아빠는 터널을 별로 안 좋아해서 나는 늘 터널에게 미안했지만 술을 먹을 때면 아빠는 가끔 터널을 말했다. 그년이 다 버리고 도망간 거야. 터널이 삼켜버린 거다. 잊어버려. 죄다. 허벅지 위쪽으로 오돌토돌한 점이 만져졌다. 키키를 쓰다듬듯 그것을 쓰다듬었다. 나는 구멍이 터널의 눈이라고 생각했다. 까맣고 우묵한 눈. 아빠는 입이라고 했다. 모든 걸 삼켜버리는.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러면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밤도 있어야 했다. 터널의 안에 엄마가 있어야 했으니. 하지만 터널은 엄마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아빠가 계속 코를 훌쩍거려 나까지 시린 기분이 들었다. 커다란 동물이 핥고 지나간 듯 맨살에 소름이 돋았다 사라졌다. 아빠와 잘 때는 아무것도 입으면 안 됐다. 그러지 말라고 했다. 거추장스럽다고. 그날 밤 나는 천 번이 다되도록 바닥을 두드리다 잠들었다.

 

*

 

사실 언니가 없을 때에도 나는 자주 언니네 집을 간다. 해아 언니는 밖에 나갈 때 집에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 가발을 쓰고 나가 시큼한 몸으로 돌아오기까지 언니는 집에 없으니까. 하지만 원래는 금요일마다 나가다가 갑자기 토요일이 되고 또 언제는 일요일이 되어서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언니의 외출은 규칙적이지 않았다. 요즘 들어 더 많이 집을 비웠다. 어쩌면 언니도 돈을 벌어 오는 걸지도 몰랐다. 언니가 없는 집은 별 티가 안 났다. 언니가 없는 티가. 알싸한 공기도 그대로고, 무언가 한참 빻다가 멈춰둔 종지도 그대로다. 컵에 묻은 립스틱도 제 모양이 맞춰지길 기다리듯 사라지지 않는다. 퍼즐 같았다. 그런 것들을 뒤에 두고 마루에 앉아 있으면 욕실 문을 열고 언제고 벌거벗은 언니가 걸어 나올 것 같다.

해아 언니가 없는 집에서 나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그저 쳐다만 보다가 밥통만 안는다. 48H라고 쓰여 있는 전기밥솥을 끌어안으면 따뜻하다. 토실한 가슴을 양쪽으로 밀어 그 사이 가장 얇고 연약한 곳이 밥솥에 닿을 수 있게 한다. 그러면 뜨끈한 기운이 가운데로 스며 온다. 하얀 펄이 들어간 밥통을 끌어안고 있으면 해아 언니의 머리통이 떠오른다.

나도 키키 같았던 적이 있다. 수박 알처럼 날이 갈수록 부어오르던. 몇 달이 지나니 배가 거의 밥통만 해졌다. 그때의 아빠는 지금보다 작았다. 멀찍이 서서 나를 쳐다보기만 하고 가까이 오지 않았다. 내가 방에 누워 있으면 문턱 끝에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럴 때 아빠는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내게선 이상한 냄새까지 나는 것 같았다. 물론 지금의 나는 그러지 않는다. 커다랗지도 않고 냄새도 안 난다. 하지만 한껏 부풀었던 때의 내가 종종 떠오를 때가 있다. 별로였다. 묵직해서 뛰어다니기 어려웠고 나무들이 부대끼는 걸 집에서 바라다보고 있자니 그것도 재미없었다. 조용했다. 심심해서 자꾸만 부르터 오르는 배를 몇 번 주먹으로 내리쳐도 오그라들지 않았다. 아프기만 했다. 심심한 시간과 아픈 시간이 반반 섞이는 나날들을 보냈다.

이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 조용함이 극에 달해 하품만 연이어 세 번 할 수 있었을 때 가장 큰 고통이 찾아왔다. 눈을 떠도 낮밤을 모르겠던 며칠이 지나고 배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다행이었다. 그러는 동안 아빠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던 기억이 난다. 내게서는 더 이상 지린내가 아닌 깨끗한 약 냄새가 났다.

발바닥이 누런 장판에 달라붙어 찌걱대며 떼어졌다. 붙들고 있던 밥솥을 놓자 팔뚝 에 잔뜩 열이 올라 있었다. 그걸 주무르는데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해아 언니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 유리문을 밀었다. 틈새로 내다보니 중년의 여자가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여자는 신발을 신은 채 안으로 들어 왔다. 네모난 구두 뒤로 해아 언니의 맨발이 나타났다.

그동안 여기서 지낸 거니?

이것저것 부스럭 댄 후에 탁, 컵이 바닥에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왕 버린 몸. 병원도 안 다닐 거면 그냥 집에서 지내라니까. 이런다고 되겠니.

몇 초를 사이에 두고 비슷한 소리가 이어졌다. 아예 바짝 모아서 영영 그 판 뜨든가. . 컵이 제자리에 놓이는 둔탁한 소리. 고작 이러고 살려고 그 지랄 한 거니. ?

여러 번 끌끌대는 혓소리 뒤로 샤워기 물이 쏟아지는 동안 나는 방 안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었다. 아직도 귀가 먹먹했다. 해아 언니는 알 수 없는 말을 빠르게 내뱉으며 울었다. 주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고함소리와 물건들 바닥에 부딪히는 마찰음이 뒤섞였다. 울음 사이로 간간히 해아언니의 말소리가 들렸다. 너 같은 년은, 엄마, 걸레 같은 년이야, 제발.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여자와 여자. 바스락거리는 가을과 겨울. 잘 모르겠다. 물소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게 멀리서 들려왔다.

이리저리 흩어진 그릇을 밟지 않으려 노력하며 방에서 나왔다. 나갈 때 포즈 그대로 담요에서 기다리고 있을 키키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키키는 지금쯤 심심할까 아플까. 어쩌면 둘 다일까. 조용하기라도 하면 뺨을 한 대 올려칠 다짐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디 조용하기라도 해 봐. 아무 소리라도 내라고. 제발. 그렇게 생각하니 벌써부터 화가 났다.

 

*

 

기온이 심하게 낮아지면서 언니는 자주 두통을 호소했다. 평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도 일순간 얼굴로 욕을 하는 것 마냥 찌푸렸다. 손발에 하얀 고름이 피어올랐고 나무 둥치에 모인 버섯들처럼 입가에 오소소 반점들이 돋았다. 아픈 언니는 정말 아파 보였다. 나아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언니가 나를 쳐다보지 않을 때마다 울적한 눈빛으로 언니를 조금씩 훔쳐봤다.

그맘때쯤 나는 터널에 다녀왔다. 언니네 집을 찾아갔다가 막 집을 나서는 해아 언니의 뒤통수를 발견했다. 나는 눈을 밟으며 내려가는 언니의 노란 가발을 따라 발소리를 죽였다. 실망스럽게도 별 것이 없었다. 터널은 터널이었다. 거칠고, 회색이었고, 커다랬다. 언니는 아팠다. 조용히 내려가다가 밤나무를 지나칠 때 조용히 주저앉아 울었다. 몇 분 후 조용히 무릎을 털고 발을 빠르게 옮겼다. 모든 게 조용했다. 나는 생각보다 조그만 터널을 바라보다 지루해져 등을 돌렸다.

죽을. 내려가 사온 수많은 죽을 언니는 싱크대에 부어 버리고 플라스틱 통을 아무렇게나 마당에 던졌다. 멀건 액체를 계속해서 토해냈다. 마구 던져진 호박과 야채 죽으로 새하얀 눈이 죄 알록달록해졌다. 가지런히 마루에 앉아 꽃을 만지다 언니는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러면 들어가기 전보다 한껏 흐릿해진 입가를 닦으며 돌아와 내 옆에 걸터앉았다. 역겨운 냄새가 물씬 풍겼다.

해아 언니가 그럴수록 나까지 가려운 기분이었다. 가만히 앉아 언니가 돌아오길 기다리다가 다섯 손가락에 묶은 반지를 내보이면 언니는 얼마동안 혼자 움직거리다 열 손가락을 내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열 개의 흰 꽃송이가 징그럽게 달랑거렸다. . 좆만하다. 그런 말이 문득 튀어나왔다 사라졌다. 언니가 비쩍 마른 등을 돌린 채 꽃을 다 묶을 때까지 모르는 척 기다려주는 건 내 일이었다.

얼마 후 폭설이 시작되었다. 이상한 장마였다. 얇은 눈이 비처럼 내렸다. 아빠는 눈이 오면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더럽다고. 이상하게 언니를 보러 가려 할 때마다 눈이 내렸다. 나는 눈이 와서 언니를 보러 가지 않게 되었다. 더럽다고.

 

*

 

이렇게 하면.

 

아빠가 전날 밤 사온 풍경風磬을 문 위에 매달며 말했다. 어제 돈을 많이 벌었는지 신나 보였다. 말투가 구부러졌다. 황토색 물고기 밑에 작은 물고기가 줄줄이 달려 있는 풍경. 물고기는 아래로 갈수록 조그만 해졌다. 먹을 게 아닌 게 좀 아쉬웠지만 예뻐서 나쁘지 않았다. 아빠는 요새 얼굴이 좋아보였다. 소리를 낼 때도 평소보다 입가가 더 올라갔다. 나는 가끔 몰래 아빠의 표정을 따라했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서 입 끝을 올리면 보기가 좋았다. 거울에서 그랬다. 그러면 확실히 나아 보였다.

-.

아빠의 손끝에서 맑은 소리가 울렸다. 나는 아빠의 옆으로 바짝 다가가 섰다. 가까이서 보니 물고기에 얼굴이 없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미끈했다. 손끝에 쇠 냄새가 배어 비렸다. 키키 같았다.

키키는 다른 개들과 달랐다. 키키에게는 풍성한 털이 없었다. 그래서 피부의 온기가 잘 느껴졌다. 불그레한 몸통 위로 난 솜털은 만질수록 부드럽다. 키키의 배에 손바닥을 가만 대고 있으면 작은 심장이 뛰는 게 바로 아래서 느껴진다. 나는 그러고 있길 좋아했다.

처음 키키를 봤을 때 키키는 지금보다 더 오그라져 있었다. 방 안에 아직 약냄새가 남아있던 때였다. 팔을 휘저으면 공기에서 약기운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먼지처럼 그랬다. 아빠의 두 손바닥에 얹혀 있는 키키는 정말 작았다. 그대로 오그라들어 작은 씨알로 뭉쳐 툭 떨어질 것만 같았다. 쪼그라든 대추알처럼. 가만 두면 정말 그럴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윗몸을 일으키고 키키를 받아 들었다.

도저히버리고 올 수가…….

키키는 작고 뜨거웠다. 그리고 비릿했다. 품 안에서 그것이 한 번에 느껴졌다. 늙은 내 키키.

그래. 앞으로 내가 잘해줄게.

흠씬 물기가 스며든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나는 다짐했다. 이제는 키키의 눈이 그때의 나를 닮아있다.

차랑. 쇳조각이 흔들릴 때마다 바람에서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나는 키키를 올려 안았다. 키키가 칭얼대는 소리를 내며 가만히 안겼다. 나는 부드러운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둥근 배에 손을 얹었다. 씨발…… 불쌍해서그냥 두고 올 수가아빠는 빠르게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여러 번 말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키키를 보고 아무런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 가끔 커다란 손바닥으로 키키를 쓰다듬어준다. 배의 둥근 곡선을 따라 내 손이 착 감겼다. 나는 아빠를 보며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눈이 오면서 키키는 날이 갈수록 살이 붙었다. 나는 매초마다 커지는 키키를 들여다보다가 우박이 내리면 밖에 나가 놀았다. 그런 일들을 반복했다. 죽을 때까지 전력으로 뛰어보기도 하고 풀이 없는 곳을 찾아 맨발가락으로 젖은 진흙을 쥐어보기도 했다. 찾지 못하면 풀을 몽땅 뽑아 동그란 바닥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아빠한테는 들키면 안 됐지만 눈이 오면 더 즐거웠다. 그런 밤엔 터널이 간지러운지 그릉 소리를 냈다. 내 발바닥도 간지러웠다.

어마어마하네.

유난히 어마어마한 날이었다. 나는 언젠가 아빠가 돈뭉치를 쏟으며 했던 말을 천천히 따라했다. 기억이 시작된 이래 이토록 뭐가 많이 내리는 건 처음이었다. 폭우였다. 눈이 너무 많아서 비처럼 보였다. 며칠 내린 눈을 전부 모은다면 그것의 두 배 정도 되는 양이 한 번에 쏟아지고 있었다. 방에 앉아 있으니 머리통이 다 먹먹했다. 키키야. 창밖이 시뿌예. 옆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멀찍하게 느껴졌다.

두 귀는 먹먹하고, 눈앞은 부옜다. 신기했다.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했다. 오늘의 놀이는 이거였다. 나는 엉덩이를 움직여 유리창에 코를 바짝 갖다 댔다. 진짜. 진짜 우유를 뿌리는 것 같아. 몇 시간이고 몇 시간이고 나는 그대로 앉아 창밖을 바라다 봤다.

그래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옆을 살폈을 때 키키는 이미 그러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키키는 그랬다. 감은 눈과 고요한 배가. 나는 담요 째 키키를 감싸 안고 뛰었다. 아빠는 집에 없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눈줄기 때문에 내 발가락이 정말 움직이고 있는건지 불분명했다. 살을 에는 눈 때문에 발가락이 아팠다. 나는 서둘러 마루로 올라섰다.

녹은 눈 때문에 바닥이 흥건해 있었다. 마구 어질러진 병들 위로 하얀 가루가 소복했다. 해아 언니네 집에 온 건 어쩌면 한 달 만이었다. 이주일 만일 수도 있었다. 사실 뭐가 됐든 뚜렷하지 않았다. 아다 냄새가 눈에 섞여 코 끝에 흐릿했다.

언니.

나는 소리쳐 언니를 불렀다. 빗물받이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거슬렸다. 더 크게 소리쳐야 했다.

언니, 키키가 이상해요. 울먹이며 말하자 해아 언니가 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몇 초 후 언니는 키키를 보던 눈을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눈동자가 익숙했다.

찬장에서 누렇고 검은 약들을 꺼내 섞는다거나 냉동실 깊이 넣어둔 덩이를 꺼내 부신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언니는 그저 마른 손을 뻗어 키키를 계속 쓰다듬었다. 머리를 쓰다듬고 배를 쓰다듬었다. 계속해서 그랬다.

나는 키키를 안고 언니는 나를 안은 채로, 벽에 기대 그렇게 앉아 있었다. 못 본 사이 언니의 흰 머리가 늘어 있었다. 구레나룻이 유난히 그랬다. 언니는 이제 아빠처럼 늙어 보였다. 입가에 핀 반점들에 푸른빛이 돌았다.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다 물소리 뒤로 풍경 소리가 들려왔으면, 잠깐 바랐다. 차랑 거리는 소리가 나면 언니에게 물고기 모양 풍경을 설명해줄 수 있을 텐데. 차랑. 나는 마음속으로 그런 소리를 내며 탁해진 키키의 눈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촉감보다 온도가 먼저 닿았다. 미지근했다.

해아 언니.

자세를 바꿔 내가 언니를 안고 언니가 키키를 안았다. 키키를 내려다보는 언니를 내려다 봤다. 젖은 등의 온기가 금방 식어 차가웠다. 물방울이 옷 위로 튀길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나는 키키의 까만 눈이 터널처럼 커져 나와 언니를 바라보는 상상을 했다. 키키는 너무 작아 우리를 삼키질 못했다.

언니가 뭐라고 말했다. 내가 가만히 있자 언니는 다시 한 번 더 말했다. 그래, 같이 가면 돼. 해아 언니는 키키와 나와 떠나자고 했다.

진짜 병원엘 가야지.

뒤에서 안고 있는 나를 향해 목을 비틀어 말했다. 진짜 병원은 뭐고 가짜 병원은 뭘까. 언니의 목에 돋은 소름이 보였다. 문득 다 가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만두었다.

집에 가서 짐을 챙겨 와. 어서.

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

 

내려오는 동안에도 발가락이 이상했다. 앞으로 가고 있는데 발끝이 보이지 않았다. 감각이 없었다. 이것도 나름 재미가 있는 듯 했다. 언젠가 오늘처럼 눈이 많이 오면 다시 이 게임을 해야지. 누구 발가락이 제일 먼저 안 보이는지. 누구 발가락이 제일 먼저 떨어지는지. 언니도 키키도 분명 좋아할 거야.

나는 냉장고를 열고 아까시 통을 꺼냈다. 락앤락에 들어 있는 아다는 비닐봉지에 옮겨 담았다. 키키의 손수건과 아껴둔 체리, 고민하다가 비누를 가방에 넣었다. 바지를 내리고 손에 묻은 아다를 아래에 닦아냈다. 유리병은 너무 무거웠다. 가랑이 사이로 자주색 반점이 영글어 있었다. 내 것도 얼른 푸른색이 되었으면. 파랗고 영롱한. 점들은 손톱으로 누르면 톡 터질 것 같이 동그랬다.

내가 없는 동안 벌써 하늘이 개 버리면 어쩌지.

? 키키야.

나는 조바심이 났다. 천천히 드는 볕 아래 아무런 의지도 없이 누워있을 머리통 두 개를 상상했다. 언니의 듬성한 빈틈 위로 드리우는 볕. 머리카락 사이에서 여러 개의 무늬가 되는 구멍. 나는 아다가 도로 묻어나지 않게끔 조심하며 팬티를 넓힌 채 발을 넣었다.

문을 열자 다시 폭설이 나타났다. 아까와 똑같은 눈이 뿌옇게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조금 서서 그걸 바라보았다. 하얀 배경 위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팔을 뻗었다. 풍경이 쇠소리를 내며 뜯겼다. 가방에 구겨 넣자 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찢고 나왔다. 인중을 쓸자 비린내가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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