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 지속돼야 할 우리의 전통
무형문화재, 지속돼야 할 우리의 전통
  • 나태원 기자, 이다영 기자, 이재희 기자
  • 승인 2021.11.29
  • 호수 1540
  • 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2008년, 우리나라 국보 1호인 숭례문이 화재로 무너지는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했다. 형태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타버린 숭례문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건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들 덕분이었다. 성곽이나 석공예품을 다듬는 석장과 궁궐의 천장이나 기둥 등에 문양을 새기고 채색하는 단청장 등 국가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이들의 노력으로 인해 숭례문은 다시 설 수 있었다.

무형문화재란 연극·음악·무용·공예기술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무형문화재 가운데 그 중요성을 인정해 국가에서 지정한 문화재를 의미한다. 이는 형태로 헤아릴 수 없는 문화적인 소산으로서 역사상·예술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형체가 없기 때문에 그 기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지정 대상이 된다. 다 타버린 숭례문을 다시 세운 것처럼,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존재다.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이들을 통해, 우린 과거 우리 민족의 역사를 향유할 수 있다.
 

인연. 삶의 길을 걷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던, 가사 천재 이준아. 그녀의 재능은 국악과 한문에 조예가 깊었던 할아버지의 눈에 일찍 띄어 일곱 살이란 어린 나이에 정가(正歌)에 입문했다. 정가란 과거 사대부와 선비 계층에서 인격 수양을 위해 불렀던 우리나라 전통 성악 중 하나로 △가곡 △가사 △시조가 이에 속한다.

조부의 권유로 정가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그녀는 55년째 가사 외길인생을 걷고 있다. 그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본격적으로 가사와 가곡을 배우기 시작했고, 국립국악고에서 이양교 가사 보유자에게 가사를 전수받았다. 이어 국립국악원에서 32년 동안 재직했고 퇴직 후엔 무형문화재 가사 보유자로 지정돼 공연 활동과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녀는 “가사가 무엇인지도 모를 때부터 문화재 보유자가 된 지금까지를 생각해보면 상황이 녹록지 않을 때도 가사를 할 수 있게 해주셨던 할아버지와 선생님들의 영향이 컸단 사실을 매번 느낀다”며 그녀가 가사와 연을 이어갈 수 있게 해준 모든 인연에 감사함을 전했다.
 

가사, 풍성한 이야기에 운율을 곁들이다
가사는 가사 문학이라는 문학 장르에서 출발한 갈래로 ‘운율이 있는 산문형식의 시’다. 이는 총 12 가사로 가곡이나 시조에 비해 긴 장편 가요 형식을 갖고 있어 풍성한 이야기를 통해 다채로운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단 특징을 지닌다. 이 보유자는 “가곡과 시조는 고정된 가락이 있지만 가사는 노래 부르는 사람이 자유롭게 박자를 구성해 부르면 악기 연주자가 그 노래에 맞춰 반주를 뒷받침해주는 구조로 돼 있다”며 “다른 정가 갈래보다 가창자가 가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전달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 사진 가운데 앉은 이준아 가사 보유자와 그녀의 전수교육생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다.
▲ 사진 가운데 앉은 이준아 가사 보유자와 그녀의 전수교육생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다.

지난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된 가사는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만이 보유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국가주요문화재로 등재돼있단 사실이 무색할 만큼 대중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가사와 같은 정가 갈래인 가곡은 지난 2015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뒤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으며, 시조 역시 각종 매체에서 자주 다뤄지고 있다. 이에 비해 가사는 독보적인 매력을 가졌지만 대중화되지 못하고 있는 탓에 지난 2018년, ‘국가긴급보호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하지만 가사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호하려는 움직임에도 가사의 가치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이 보유자는 “대중들의 관심 부족과 재정적 어려움으로 가사가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위태로워지는 현실”이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다.
 

오롯하게 이어지는 가사, 더 널리 더 많이
평생을 오직 가사에 몸 담은 이 보유자는 가사란 이름이 익숙지 않던 지난 1997년, 한 공연으로 정가의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된다. 그녀는 12 가사 중 음악적 요소가 가장 까다롭고 한문으로 이뤄져 전체를 암기하기 어려운 「권주가」를 익혀 완창했다. 이 공연은 한 무대에 12 가사를 모두 올린 첫 시도로, 당시 △뉴스 △방송 △신문 곳곳에 실리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사람들에게 가사를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 보유자는 “해당 공연을 마친 후 ‘한국정가단’이란 단체를 만들어 사라져 가는 우리의 전통 성악곡을 지켜나갈 수 있는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고 전했다. 
 

▲ 무대 중앙에서 이준아 가사 보유자가 공연중인 모습이다.
▲ 무대 중앙에서 이준아 가사 보유자가 공연중인 모습이다.

이 보유자는 더 많은 사람이 쉽게 가사를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주로 한문으로 이뤄져 있어 한번 듣고 이해하기 어려운 가사 대사를 순우리말로 풀어내는 작업을 진행하는 등 자신이 전수교육생 시절 겪었던 어려움을 최소화하고자 가사계의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녀는 “앞으로 후진 양성을 통해 전승자가 없어 가사가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전수 교육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 전했다. 그녀의 확고한 다짐과 노력이 무색하지 않도록 무형문화유산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국내 유일 사기장 무형문화재, 김정옥

도자기는 사용되는 흙과 굽는 온도에 따라 도기와 사기로 구분된다. 사기는 입자가 굵은 흙을 사용해 1천 250℃ 이상의 고온에서 굽는다. 사기장이란, 전통적인 사기 제작 기술을 보유한 장인을 이르는 말이다. 
김정옥 사기장은 삼 형제 중 막내였지만 도자기 제작 솜씨가 탁월해 가업을 7대째 이어온 계승자다. 올해 80세인 그는 17세부터 사기장으로서의 길을 걸었다.

사기장으로서 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스테인리스 △양은 △플라스틱 등의 상용화로 전통 도자기를 찾는 이들이 갈수록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종일 도자기를 만들었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피할 수 없었다.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던 그는 도자기 제작과 집안 농사일을 병행해야 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도 김 사기장은 도자기 제작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도자기 제작이 쉽진 않으나, 적성에 맞는 일이기에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고 전했다.

묵묵히 도자기를 만들던 그는 지난 1984년, 서울 잠실에서 열린 무역 박람회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작품 10점을 출품한 김 사기장은 한 일본 바이어를 만났다. 그는 김 사기장의 작품에 관심을 보이더니 이내 거래를 제안했다. 김 사기장은 “거래를 시작하면서 내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후 지난 1991년 우리나라 1호 도예명장, 1996년 제105호 국가지정무형문화재에 지정됐다.
 

천천히, 완벽하게 만들어지는 전통 사기
전통 사기 제작 과정은 굉장히 복잡하다. 먼저, 흙을 물에 씻어 이물질을 제거한 다음 반죽한다. 이후 형태를 잡고 한 번 굽는다. 초벌이 끝난 그릇에 문양을 그리고 유약을 바른 후 한 번 더 구우면 사기가 완성된다. 이 과정을 거쳐 도자기가 만들어지는 덴 무려 두 달의 시간이 걸린다.

김 사기장은 이 중 △재벌구이 △형태 잡기 △초벌구이에 가장 큰 공을 들인다. 기계식 물레를 이용해 쉽게 형태를 잡을 수 있지만, 그는 전통적인 발물레를 고집한다. 그릇을 구울 때도 여전히 나무를 이용해 불을 땐다. 그는 “옛 방식을 유지해야 전통적인 도자기의 멋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 도자기를 제작하는 김정옥 사기장의 모습이다.
▲ 도자기를 제작하는 김정옥 사기장의 모습이다.

그는 전통 도자기의 가치가 수수함에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전통 도자기는 해외 도자기완 달리 색소를 거의 사용하지 않아 자연적인 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는 “해외 전시회에 가면 우리의 도자기가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다”며 “전통을 유지해 가장 한국적인 멋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사기장은 전통 사기의 실용적인 가치에도 주목했다. 실제로 물을 담고 오래 두면 썩는 대부분의 그릇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그릇은 여러 해가 지나도 변질되지 않는데 그는 이를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만들어낸 선물”이라 설명했다. 
 

인식 변화가 필요한 전통 사기
그러나 최근 국내 도자기 업계는 위기에 빠졌다. 한국세라믹기술원에 따르면 올해 외국산 도자기가 국내 시장의 약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이는 국내 도자기를 예술품으로만 여기는 대중들의 인식에 기인한다. 플라스틱, 스테인리스 등의 용기가 상용화되면서 전통 도자기 사용자가 감소하자 그것의 예술적 가치만 주목받게 된 것이다. 이에 제작자들 역시, 예술성이 강조된 도자기 생산에만 치중했다. 김 사기장은 “사람들이 도자기를 예술품으로만 여기면서 최근엔 전통 도자기 하나가 1억 원이 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중들이 도자기를 실용품으로도 여길 수 있게끔 인식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어 그는 “도자기 제작자 역시, 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그릇을 제작해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 김정옥 사기장의 작업실 모습이다.

도자기에 평생을 바친 그의 노력 덕분에 전통 사기는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바람처럼 앞으로 국내 생활 도자기가 일상에 자리 잡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길 바란다.


현재 무형문화재는 사람들의 관심 부족과 더불어 전승·후계자를 찾지 못해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이에 국가에선 지난 2013년 무형문화유산에 대한 보존·전승·연구 등 여러 활동을 목적으로 국립무형유산원을 설립했다. 또 문화재청은 내년부터 2026년까지 5년간 각 지역 무형문화유산 100개 종목을 대상으로 ‘미래 무형문화유산 발굴·육성 계획’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에 최진아<국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국가의 노력이 최근 활발하게 이뤄졌기에 그 결과가 당장 드러나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 노력의 결실이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국가에서 공연과 전시회를 통해 이들의 무대를 마련해주더라도, 사람들의 관심이 없다면 여전히 국가문화재의 보존가능성은 희미해보인다. 국립무형유산원에선 여러 △공연 △교육 △전시 △행사의 장을 마련하고 있지만, 이를 찾는 발걸음이 없다면 결국 무형문화재를 잇는 명맥 역시 자연스레 끊기게 될 것이다.

최근 무형문화재는 무형유산이란 용어로 사용되곤 한다. 이에 최 교수는 “무형문화재(財)속 재는 재물 재로, 재화를 의미하지만 이들의 존재는 경제적인 가치로 따질 수 없다”며 “이들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남겨줄 문화유산 그 자체로 여겨 무형 유산이란 용어로 점차 바뀌고 있는 것”이라 설명했다. “지혜가 쌓이면 전통이 된다”라는 말처럼 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은 오랫동안 계승한 그들의 지혜로 우리에게 전통문화를 향유하게 해주는 ‘살아있는 문화유산’ 그 자체다. 앞으로 우리의 역사를 밝히는 이들의 존재에 더욱 많은 관심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도움: 최진아<국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사진 제공: 백산도자문화연구소
이준아 가사 보존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