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희망의 축
[장산곶매] 희망의 축
  • 배준영 편집국장
  • 승인 2021.11.22
  • 호수 1539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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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준영<편집국장>

신경숙의 「외딴 방」을 거쳐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는다. 제목이 주는 일차원적인 낭만성, 그 낭만성을 잠식시키는 현대의 우울한 비애를 이젠 알고, 읽는다. 컨베이어 위에까지 난장이를 불러내던 그녀의 십 대에 온전히 몰입하기 위해서 혹은 너저분하게 늘어진 사유의 틈으로 또 다른 사유가 틈입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읽는다. 내가 열어둔 나의 외딴 방문을 아직 다 닫거나 다 열지 못한 채로 낙원구 행복동의 다섯 식구를 마주하고, 이젠 보낸다.

그들은 가고, 희망. 희망에 대해 고민한다. 희망이란 글자를 적는다. 어색하게 입을 움직여 발음해본다. 희망의 실체를 고민한다. 희망으로 내일을 사는 사람과 더는 내일을 살 수 없는 사람을 고민한다. 그 가운데에 놓여 호흡하는 나를 고민한다. 고민하는 내 앞에 우뚝 선 물병을 본다. 원기둥, 물병의 축을 생각한다. 희망의 축을 상상한다.

하나의 완성된 무엇이 희망이라면, 그 희망을 구성해가는 순간까지 희망일 수 있을까. 내가 품은 소박하거나 거창한 희망에 대해 고민한다. 희망을 끊임없이 좇는 나는 동시에 비희망의 순간으로 점철된 오늘을 사는 나, 역설적이다. 희망의 실체란 그런 것이다. 희망의 축은 언제나 비희망의 편에 놓여있다. 현실에서 희망을 꿈꾸는 것은 현실이란 비희망의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희망은 그 과정의 끝에 놓인 회전체다. 일생동안 누군가는 단 한 번의 회전을 이룩하거나 또는 수차례의 회전을 이룩하며 희망의 희망성과 마주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단 한 번의 회전도 성사시키지 못하는, 그리하여 희망의 비희망성 속에서 고통스레 사는 이도 있으리라. 희망하는 행위의 주체는 현실의 ‘나’지만, 희망의 객체는 오지 않은 ‘나’다. 주체와 객체, 그 거리만큼이나 고통의 부피를 키워가며 산다.

세로쓰기 되어 77년도 이상문학상 제1회 수상집에 수록된 조세희의 장편. 40년의 세월이 책을 좀먹고 누렇게 물들여도, 여전히 희망의 실체는 전연 희망적이지 않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세상은 움직이고, 죽은 땅 위엔 남을 위해 눈물 흘릴 줄 모르는 욕망만이 숨 쉰다. 난장이 아버지는 여전히 공장 굴뚝의 피뢰침을 붙잡고 종이비행기를 날린다. 그런 그가 굴뚝에서 죽는단 사실조차 다르지 않다. 길 잃은 사람은 언제나 다른 방향으로,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방황의 계보를 잇는다. 희망의 실체는 그런 것이다. 희망은 그 자체로 희망이지만 동시에 절망이다. 양면을 비추며 서 있는 동전에 다름 아니다.

필연적으로 희망은 곧 삶의 축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린 안다. 우려했던 바가 실제로 닥쳤을 때, 우려만큼의 무엇인가를 우린 경험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게 우린 한 걸음 더 나아갈 용기를 얻게 된다는 것을. 희망의 실체엔 희망이 없지만, 희망으로써 희망의 실체를 살아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면 오히려 더욱 들여다보는, 그 방식으로 삶의 용기를 더해갈 뿐이다.

먼지 낀 하늘에 붉은 달이 새겨지면 나는 이 밤을 희망으로 살아야 한다. 내 인생을 길러온 축 역시 비희망에 가까울 것이다. 현실의 고통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크겠지만 그 고통과는 결코 조우하지 않으리란 굳은 믿음과 마음으로, 희망을 향해 내디뎌야 한다. 비희망을 축으로 도는, 그리하여 완성될 희망의 모습을 나는 가만 생각해 본다. 일그러진 표정, 그 표정의 색을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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