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예술적인 것은 없고 예술도 없다.
[장산곶매] 예술적인 것은 없고 예술도 없다.
  • 배준영 편집국장
  • 승인 2021.10.11
  • 호수 1537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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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준영<편집국장>

‘돈을 갖고 튀어라(Take the Moeny and Run)’ 덴마크의 쿤스텐 현대 미술관엔 다음과 같은 이름으로 빈 캔버스가 전시돼있다. 덴마크 예술가 엔스 한닝이 미술관에 작품 의뢰를 받고 약 1억 원의 제작비를 받은 뒤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은 빈 캔버스를 제출한 것이다. 이 제작비는 작품 가격으로 책정된 것이 아닌, 전시 이후 반환하는 조건으로 제공된 금액이다. 미술관 측에선 그에게 실제 지폐를 활용해 덴마크와 오스트리아의 연평균 수입 격차를 표현한 작품을 요청했으나, 그는 빈 캔버스를 제출했고, 지급받은 1억 원에 대한 반환 의지가 없음을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이 작품은 예술가가 처한 저임금에 대한 논평이자 계약 위반 역시 작업의 일환”이라며 논란의 불씨를 키웠다. 

이같은 일화를 보고 있자니 불현듯 한 원로 시인이 떠올랐다. 지금은 작고한 고(故) 이승훈 시인이 바로 그다. 이 시인은 한국 시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의 시 세계는 전통성과 체계성에 사로 잡혀있던 이전의 현대시에 부정하며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는 해체주의적 성향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시론은 기존의 보수적 태도를 견지하던 문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문학계 인사 사이의 논쟁으로도 번졌다. 어찌 되었든 그의 독특함은 현대시의 정체성을 해체하며 새로운 사유의 시작을 가능케 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시‘적’인 것은 무엇인가. ‘시(A)란 이러해야 한다(B)(또는 이러한 것(B)이 시(A)다)’는 식의 명제(A=B)가 성립함을 밝히기 위해 이 ‘B’를 누가 규정할 수 있을까. 대개 B로 알려진 내용(이를테면 운율 같은 것)은 시의 형식이지 시가 시이기 위한 성립 조건일 순 없다. 이것이 필자의 단상이라면 이 시인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 써두었다. 

“시든 문학이든 무슨 본질, 순수한 기원이 있다고 믿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그 자체가 문학적인 텍스트도 없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문학도 없고 시도 없다. 비시가 시이며 시가 비시이다. 이승훈 씨의 시는 독자가 읽을 때 시가 된다. 말하자면 시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획득한다. 그러나 다른 독자가 읽을 때도 그 시는 동일한 것인가? 시로서의 아이덴티티, 고유한 본질, 자기 동일성은 한결같이 유지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 같은 이 시인의 시론은 2000년대 들어 권혁웅 시인의 미래파 시론으로 재정립돼 오늘날 시문학계의 한 주축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인의 사유는 어떻게 보면 예술 전반에 걸쳐 동일하게 적용되는 부분이다. 예술‘적’인 것이 있는가? 평범한 소변기가 ‘샘’이란 이름으로 전시 작품으로 제출되는 시대에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며, 예술적인 것은 없고 예술도 없게 된다. 빈 캔버스를 보고 박물관을 비웃는 조소도, 가난한 예술가의 고통을 텅 빈 캔버스로부터 느끼는 마음도 모두 예술이다. 예술계의 골칫덩이자 현대미술을 난해하게 하는 주범인 개념미술(Conceptual Art)이 존속하고 끊임없이 확장되는 것 역시 이와 같은 사유를 이어가는 무수한 예술가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 덴마크 미술관 측은 계약 기간이 만료되기 전까지 1억 원의 돈을 엔스 한닝이 반환하지 않는다면 법적 조치에 나설 것이라 밝혔다. 지금의 사건이 단순히 웃고 넘기지 못할 비화로 흐를 수도 있겠지만, 예술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볼 좋은 사례로 남게될 것이다. 보다 넓은 의미의 예술을 향유하고, 예술이 아닌 예술 속에서 부유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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