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찰나의 순간을 고대하는 한 마리의 새
[취재일기] 찰나의 순간을 고대하는 한 마리의 새
  • 김유진<대학보도부> 차장
  • 승인 2021.10.11
  • 호수 1537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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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대학보도부> 차장

한대신문에 들어온 지 어언 일 년, 처음 들어왔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생활을 돌이켜본다. 필자는 대학 사회의 이면을 밝히겠다는 다소 거창한 포부를 가지고 들어왔다. 하지만 포부를 이루기는커녕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아이템 발제부터 인터뷰까지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다. 논리의 부족은 자신감 하락으로 이어졌다. 어색함이 담긴 인터뷰 녹취 파일을 들으며 쓴웃음을 짓기도 하고, 기사를 쓰며 느껴지는 단락 간의 어색함을 마주하며 자책했다. 인생에 대해 꽤 낙관적이었던 필자는 어느새 염세적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음에도 필자의 한계를 직면하기엔 아직 한없이 나약한 존재라는 것도 깨달았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 「데미안」 속 구절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회고해보면, 나약한 필자에게 그러한 필사의 순간은 없었다. 주어진 세계에 순응하며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만 들여왔을 뿐이었다.

현재 필자는 처음으로 알을 깨고 있는 중이다. 끊임없이 한계에 부딪히고 그 견고함에 절망하며 혹독한 순간을 겸허히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모든 것을 견뎌내고 아브락사스(Abrasax)에 도달한 새처럼, 열쇠를 발견한 싱클레어처럼 마침내 알을 깨고 나와 더 큰 세상에 대한 혜안을 갖는 찰나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 순간만을 기다리는 필자에게 신문은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동시에 여전히 어렵다. 어떻게 써야 객관성을 잃지 않고 논조를 강조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은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따라서 신문에 명확한 답은 없고 최선만이 존재한다.

깨알같은 글자가 빽빽이 들어찬 흑백 인쇄물엔 최선을 위해 흘린 수많은 땀과 눈물이 응집돼 있다. 사무실에 있는 모두가 신문을 내기 위해 일상의 기저에 깔린 촉박함도 마다하지 않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신문에 함축된 노력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지기란 쉽지 않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차가운 반응만이 남고, 기사가 의도치 않게 논조와 상관없는 논란의 불씨로 소비되는 광경을 접하며 느끼는 충격과 허탈함은 예사였다.

그럼에도 필자와 동료들은 멈추지 않고 글을 쓴다. 신문에 깃든, 근원을 알 수 없는 원동력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학보사 생활의 마무리가 보이는 현시점에서 여전히 원동력의 근원은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이 원동력은 필자가 알을 깨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순간까지도 함께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헤세의 작품 말미에 싱클레어는 “모든 일 역시 내게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열쇠를 발견했고, 때때로 어두운 거울 속, 운명의 형상이 졸고 있는 곳, 내 자신의 내부에 들어가기만 하면, 나는 그 어두운 거울 위에 몸을 굽히기만 하면 되었다”며 깨달음을 얻는다. 오늘도 필자는 알을 깨고 있다. 열쇠를 발견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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