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시대적 반성 : 새로운 시대와 마주하기 위하여
[장산곶매] 시대적 반성 : 새로운 시대와 마주하기 위하여
  • 배준영 편집국장
  • 승인 2021.09.13
  • 호수 1535
  • 7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배준영<편집국장>

시대는 흐르고, 세상은 변한다. 어쩌면 ‘변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게 변한다. 또 하나 변치 않는 게 있다면, 시대의 전유물로서 남겨진 기록이다. 하나의 시대를 규정짓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대는 문학 내지 예술에 고스란히 담긴다. 한 사람의 사유 체계에 있어 그것을 구성하는 제반 요소는 바로 그가 발 딛고 서 있는 세계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선이 포착한, 그 포착된 피사체가 옮아온 문학은 곧 그 시대의 표상이기도 하다. 동시에 문학(예술)을 대하는 시대의 태도 역시 그 시대의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마찬가지로 이 태도 또한 동적이다.

지난 5일은 故 마광수 교수의 네 번째 맞는 기일이었다. 그가 일평생 펼친 문학관(文學觀)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에서 빗겨나 그의 삶의 철학은 적어도 필자에게 있어선 언제나 존경해 마지않는 대상이다. 그는 지난 1992년, 책 「즐거운 사라」가 외설 시비에 휘말려 당시 연세대 강단에서 수업 도중 긴급체포됐다. 작가뿐 아니라 해당 책을 출판한 출판사 대표까지 구속된 이 사건은 큰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다. 끝내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선고받고, 교수직을 잃은 ─후에 복직했으나, 퇴직 전까지 그는 ‘왕따 교수’였다─ 마광수는 그야말로 ‘시대’와의 투쟁 가운데서 늙어갔다. 시대와 타협하지 못한 그의 마지막 선택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윤동주 1호 연구가’의 말로는 그렇게 그쳤다.

‘사라’가 세상의 빛을 영영 볼 수 없게 된 일로부터 삼십여 년이 흘렀다. 예술과 외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표현의 자유가 무엇보다 존중받는 이 시대에 마광수의 필화 사건은 우리의 상식과 조금도 부합하지 않는다. 이 시대엔 누군가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흩트릴지라도 ‘긴급체포’하지 않으며, 설사 그가 전적으로 외설의 편에 서 있을지라도 그것이 명백한 ‘범법 행위’가 아니라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 물론 그에 대한 평가는 어디까지나 주관의 영역이지만, 이 주관마저 침해되거나 무엇에 의해 강요된다면 이는 긴급체포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세상은 엔트로피적으로 산발한다. 그러므로 그때는 틀렸던 것이 지금은 맞을 수 있다. 물론 역(逆)의 관계도 성립한다.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의 초상도 필연적으로 과거가 되리란 것, 우리의 상식은 언제든 후대에 의해 부정될 수 있단 것.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시대의 질서를 요구하게 될지니, 누구나 향유하고 있는 ‘대중문화’가 후대의 신예 비평가에겐 그저 조롱의 대상이자 씹을 거리에 지나지 않게 될 수 있다.

이것이 또한 ‘시대적 반성’을 필요로 하는 이유다. 거창한 말처럼 써두었지만, 이런 하나의 사색이 곧 시대에 대한 반성, 시대 속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나’와 지금의 시대를 키워낸 과거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필자는 그 반성을 예술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의 모든 판단은 ‘틀렸을 수도 있다’ 혹은 ‘틀렸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지나온 시대의 부정은 새로운 시대로의 도약을 위한 발구르기와도 같다. 물론 부정‘만’을 일삼는 이는 전례 없는 위협과 마주하게 될 것이고, 조금의 부정도 없이는 속으로부터 곪아가는 이전 시대의 병든 유산을 떨쳐내지 못할 것이다. 

이 몇 자의 글에 갇혀있는 순간에도 세상은 바쁘게 변해간다. 이제 당신의 차례. 당신의 반성은 무엇으로부터 출발시킬 것인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