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사색하고 고통받기 위해 나는 살고 싶다.
[장산곶매] 사색하고 고통받기 위해 나는 살고 싶다.
  • 배준영 편집국장
  • 승인 2021.09.06
  • 호수 1534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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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준영<편집국장>

하루가 멀게, 매스컴은 우리 주변의 죽음 소식을 물어 나른다. 누군가의 심장에 지지 않는 별을 심어주는 죽음도 있지만, 추모의 가치조차 없는 미물의 죽음도 더러 있다. 언제나 죽음은 ‘나’와 공생하지만, 때론 너무 멀게 느껴지는 탓에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오지 않은 죽음을 예견해보곤 한다. 동시에 죽음의 정반대에 있는, 아니 슈뢰딩거의 고양이나 아인슈타인의 달처럼 죽음과 공존해있는 삶에 대해서도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본다. 죽음에 대한 사유와 삶에 대한 사유가 다를 것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낀다.

“사색하고 고통받기 위해 나는 살고 싶다.” 푸시킨은 다음과 같은 시구로 비극적 허무를 딛고, 삶을 긍정했다. 그는 사색과 고통을 인간다움의 보편적 가치로 내세웠는데, 그같은 가치의 실현을 통해 환경에 예속되지 않는 ‘단독자’로서의 삶을 정립하고, 주어진 삶의 짐을 스스로 지는 ‘자유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의 주체성은 사색과 고통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그의 사유 체계는 필자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괴로움의 시간 속에서 필자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한 힘은 그 순간조차 단독자로 또 자유인으로 이행하는 시간임을 알고 있단 믿음과 신념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시국 속에서 푸시킨의 철학은 그 전제부터 성립하지 못하고 있다. 사색과 고통도, 단독자와 자유인으로의 이행도 살아있음으로써 비로소 실현할 수 있는 것인데, 최근의 날들은 ‘살아있음’ 조차 위협받는 순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절망한 자는 대담해지는 법’이라지만, 죽은 자는 절망할 수도 대담해질 수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 살아야만 한다. ‘잘’ 살지 못하더라도 잘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연일 끊이지 않는 죽음에 대한 보도는 살고 죽는 문제를 우리 삶 깊숙이 끌고 와 대면시켜주었다. 대개는 삶보다 죽음에 우리 자신이 가까이 놓여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안타깝게도 이 죽음(동시에 삶)에 대한 사유는 내가 아닌 타인의 희생으로써 가능했다. 

전자발찌를 끊고 달아난 범죄자에 의해 두 명의 여성이 무참히 목숨을 잃었고, 택배 대리점주가 노조와의 갈등 가운데서 목숨을 끊었다. 백신 접종 후─인과성이 확보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발생한 죽음의 수도 이젠 두 손으로 셀 수 없게 되었으며 차마 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밝혀지지 않은 군 내부의 죽음도 들려온다. 이처럼 불안정한 사회는 불안정한 개인을 낳고, 불안정한 개인은 다시 불안정한 사회로 귀결된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죽음과 더불어 맹목적으로 서로에 총과 칼을 겨누는, 기형 사회의 기원에 대해서도 곰곰이 곱씹어보아야 할 때다. 본질로부터 한참 벗어나 새 군락을 키워내는 다양한 집단간 갈등에 관해, 사색과 고통의 시간을 그 자체로 보낼 수 없게 하는 ‘또 다른 죽음’에 대해서도 이젠 맞서야 하지 않을까. 덮어놓고 삿대질하며 욕지거리를 해대기 전에, 우리의 손끝과 말마디가 향하는 곳엔 무엇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바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뿌리 근처에서 새로운 싹을 틔우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생명일 뿐, 결코 다시 나무가 되지 않는다. 사색과 고통이 사치가 되어버린 이 험준한 사선(死線)에서, 유서처럼 써내려 간다. “나는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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