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사유는 사유를 모르고 나는 나를 모른다.
[장산곶매] 사유는 사유를 모르고 나는 나를 모른다.
  • 배준영 편집국장
  • 승인 2021.08.30
  • 호수 1533
  • 7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배준영
▲ 배준영<편집국장>

고갱의 역작 <Doù Venons Nous? Que Sommes Nous? Où Allons Nous?(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는 총 세 가지의 질문을 캔버스에 유채로 담아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질문 가운데, 필자의 이목을 끈 것은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과거와 미래에 대한 조망이라면, ‘우리는 누구인가’란 물음은 그야말로 현실을 직조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에 대한 물음은 ‘나’에 대한 존재 의미를 앞세워 새로운 물음을 강요했다.

돌이켜보면 필자는 단 한 번도 올곧이 ‘나의 나’로서 존재한 적이 없다. 그것은 앞선 날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러할 것이다. 어느 곳에나 필자는 서 있었고, 또 서 있겠지만 지평선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킨(킬) ‘나’가 ‘나의’ 것은 결코 아닐 테다. 

어색한 표현으로 장황히 늘어놓았지만, 결국 우린 반박의 여지가 없는 사회적 존재다. “다양한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정당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아 도덕적 출발점을 구성한다”는 매킨타이어의 말은 곧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로 대변되는 니부어의 논리와 충돌하지만, 도덕이나 윤리와는 무관하게 사회란 거대한 세상에서 호흡하는 ‘나’가 온전한 ‘나’일 수 없는 것은 받아들여야 할 슬픈 운명이다.

다시, 우리는 누구인가. 아니, 그에 앞서 필자의 삶으로 틈입해온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해야 한다. 이것은 내가 온전히 ‘나’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단 자명한 이치를 기저에 깔고, 그럼에도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최초의 사유이자 최후의 몸부림이다. 긴 사유의 시간 동안 정신은 피폐해지고, 격렬한 몸부림으로 성한 곳 없이 멍들겠지만, 우리는 철저히 이 시간 속에서 살아야 한다. 무엇을 위해서라기보다 무엇으로 존재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피해선 안 될 필연의 시간이다.  

이처럼 끊임없이 ‘나’를 알아가는 사유의 시간은 그 자체로 필자의 소중한 성장동력이 되어주었다. 무던히 애쓴 시간이었지만, 필자가 1897년의 고갱과 머리를 맞대어 이뤄낸 분명한 성취다.

물음은 집요하게 필자를 물고 늘어져 끊임없는 사유를 강요한다. 어느 순간, 필자가 ‘나는 누구인가’란 물음에 답할 수 있게 된다면 고갱의 물음에 몇 마디의 답을 보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기름에 물감을 풀어 보스턴에 찾아볼 계획이다. 하지만 그의 캔버스에 필자의 색을 덧칠하기엔 아직 필자는 작고 어리다. 그런 탓에 우선은 작고한 원로 시인 이승훈의 말을 빌려 물음에 반쪽짜리 답변을 남겨둔다. 지금의 필자가 답할 수 있는 최선의 형태로.

“사유는 사유를 모르고 나는 나를 모른다.”

조금은 무책임하게도 느껴지는 이 말에 몇 자의 말을 더하거나 빼 고쳐 적기 위해선 숱한 인고의 시간을 거닐어야 할 터, 막연함과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모두가 잠든 이 밤에도 물음은 좀처럼 쉽게 필자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필자는 존재 이유와 의미를 곱씹으며, 짧은 글로 지독한 성장통을 기록한다. 물음은 긴 밤처럼 이어질 것이다. 사유하는 ‘나’를 잃어버릴 정도(無我之境)로 치열한 시간을 보내볼 계획이다.

물음으로 점철되어 창밖으로 피어난 백야(白夜)에 금세라도 더께가 앉을듯한 원고를 털어 보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