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간다
  • 김유진 기자
  • 승인 2021.06.06
  • 호수 1532
  • 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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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있다. 그중 대부분은 말할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 고혜인(가명)씨와 강우정(가명)씨는 어린 시절 가정폭력을 당했다. 그들은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가정폭력 피해의 경험과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그러나 가정폭력 피해자는 위축돼 있을 거란 선입견과 달리 평범하게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또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들의 인생을 들어봤다. 

▲ 대학 교양수업에서 혜인 씨가 쓴 용서에 대한 자기분석 보고서

혜인 씨의 이야기
대학생 혜인 씨가 11살이었을 때 그의 언니는 중학교 2학년, 15살이었다. 부모님의 맞벌이로 인해 혜인 씨는 언니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많았다. 혜인 씨에게 집은 휴식의 공간이 아닌 끔찍한 공간이었다. 언니의 심기를 건드릴 때면, 그녀는 벌을 받아야 했다. 그녀는 혜인 씨에게 주먹으로 있는 힘껏 명치를 때리는 등 물리적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또, 혜인 씨에게 몇 시간 동안 “역겨운 X, 넌 나중에 커서 XX밖에 되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의 폭언을 하기도 했다. 언니의 폭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그러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언니가 사과를 받아줄 때까지 용서를 구해야 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언니는 아랫사람을 대하듯 혜인 씨를 대했다. 어린 혜인 씨는 모든 것에 대해 언니의 허락을 맡아야 했고, 그녀가 시키는 모든 일을 해야만 했다. 물 떠오기부터 교복 빨래까지 했다. 언니가 마음에 들 때까지 빨고 또 빨았다. 하루는 떠 온 물에 먼지가 있다며 물을 머리 위에 부어버린 적도 있었다. 

언니의 폭력을 막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업에 실패한 혜인 씨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이었고, 외도를 일삼았으며,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유일하게 기댈 곳이었던 어머니는 그녀가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조금만 참아, 네가 나중에 어른이 되고 힘이 세지면 언니가 널 이렇게 괴롭히지 못할 거야”라며 방관했다. 가족 중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던 그녀는 대학교 4학년이 된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본인의 상처를 말하지 않았다. 

▲ 우정 씨가 블로그에 작성한 아버지에 대한 글

우정 씨의 이야기
대학생 우정 씨의 가족은 겉으로 보기엔 화목한 가정이다. 우정 씨는 대기업 임원의 아버지와 언론인 출신의 어머니 밑에서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가정폭력을 당했다. 우정 씨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매일 술을 먹고 밤늦게 집에 와 술주정을 부렸다. 그의 기분이 안 좋을 때면 딸과 아내에게 시비를 걸며 때렸다. 우정 씨에겐 정확하진 않지만,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일들이 몇 개 있다. 
일곱 살 때, 그날 밤은 평화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어린 우정 씨는 쿵쿵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녀는 술을 먹고 밤늦게 들어온 아버지가 어머니 목에 식칼을 대고 있는 광경을 봤다. 우정 씨의 어머니는 칼을 피하려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는 다른 방으로 도망친 모녀를 따라와 잠근  방문을 부수고 들어와 우정 씨와 그녀의 어머니를 때렸다.
그 다음 날에도 아버지는 술을 먹고 들어왔다. 가스레인지를 켜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 부엌으로 나간 어린 우정 씨에게 아버지는 ‘다 불살라버릴 테니까 죽기 전에 집 나가’라고 말했다. 무작정 맨발로 집을 나간 우정 씨는 그 밤에 이웃집의 문을 두드렸다. 우정 씨가 고등학생 때도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폭력을 휘둘렀다.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왔냐”는 우정 씨의 말에 심기가 불편해진 아버지는 안경이 날아갈 정도로 세게 뺨을 때렸다. 

시간이 지나 우정 씨는 23살이 됐다. 여전히 과거의 일들은 잊히지 않은 채 우정 씨의 내면을 잠식하고 있다. 우정 씨는 종종 새벽에 잠에 깨 몸이 얼어붙는 경험을 한다고 전했다. 우정 씨는 “파편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던 특정 소리와 장면이 떠오르며 숨이 안 쉬어질 때가 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정 씨는 아버지를 신고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정 씨는 “어렸을 때 TV를 통해 가정폭력을 겪은 집안의 모습을 봤던 것이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그들은 유일한 소득원이었던 가해자가 실형을 살자 가난한 삶을 살게 됐다. 우정 씨는 아버지를 신고하는 순간 TV 속 그들처럼 될까 봐 두려웠다. 또한 그는 사람들의 시선도 무서웠다. 우정 씨는 “말하는 순간 나를 있는 그대로가 아닌 불쌍한 가정폭력 피해자로 봤던 친구의 눈빛이 기억난다”며 주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답했다. 

사회는 어떻게 변해야 하나
우리 사회는 모든 가정폭력 피해자를 경제적, 심리적으로 위축된 존재로 치부한다. 우정 씨는 “가정폭력의 피해 경험을 밝히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나를 가정폭력 피해자란 틀에 맞춰 바라본다”며 사회의 왜곡된 인식에 대한 생각을 털어놨다. 가정폭력 피해자라고 모두 위축된 것은 아니므로 그 누구도 가정폭력 피해자를 동정하고 편견으로 바라볼 권리는 없다. 마찬가지로 혜인 씨는 “가정폭력 피해자는 피해자이기 전에 사람인데, 우리의 얘기를 모두 가정폭력과 연결 지어 바라보는 시선이 싫었다”고 전했다. 혜인 씨와 우정 씨는 가정폭력에 대한 얘기를 말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변현주<여성 긴급전화 경기센터> 센터장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가정폭력에 대한 왜곡된 사회적 인식은 가정 폭력 피해자를 더욱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또, 변 센터장은 “가정폭력을 그저 사소한 다툼으로 보는 통념이 피해자들에게 더욱 상처를 준다”고 말했다.  이제는 가정폭력 피해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로잡혀야 할 때다.


도움: 변현주<여성긴급전화 경기센터>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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