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어둠을 넘어, 광주에 가다
시대의 어둠을 넘어, 광주에 가다
  • 최시언 기자
  • 승인 2021.05.23
  • 호수 1531
  • 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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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은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마흔한 해가 되던 날이었다.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신군부 세력에 대항해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모여 신군부의 퇴진 및 계엄 철폐,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전개됐다. 기자는 부당한 역사에 맞서 희생된 오월 영령의 뜻을 기리고자 지난 16일부터 19일까지 광주로 떠났다.

광주로 가는 길
이른 새벽, 여러 대학 학생들과 함께 광주로 출발했다. 아직 날씨는 초여름에 가까워 꽤 쌀쌀했고,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5·18의 광주를 기억하고자 출발했지만, 현재까지도 언론에 오르내리는 광주에 대한 서로 다른 평가는 기자에게 혼란을 주었기 때문에, 진실로 다가가는 길이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광주에 도착하다
처음으로 도착한 장소는 국립 5·18민주묘지였다. 하늘도 광주의 슬픔을 기억하려는 듯 비는 그치지 않았다. 추념문을 지나 참배광장에 도착했고, 희생된 영령들을 기리고자 참배단 앞에서 분향한 뒤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거세게 내리는 빗속에서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많은 이들이 우비를 입고 추모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참배단 바로 앞엔 가지런히 모은 두 손과 부활의 알을 형상화한 5·18민중항쟁 추모탑이 있다. 이 추모탑의 형상은 희생된 오월 영령들이 새롭게 태어나길 바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공식명칭인 민주화운동 대신 민중항쟁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5·18민주화운동의 주체였던 민중들의 항쟁 정신과 더불어, 그 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항쟁을 계승하고자 하는 이유에서다. 이 때문에 이날 묘역을 방문한 단체들의 명칭엔 ‘민중항쟁’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오른쪽 끝에 위치한 제10묘역은 5·18 당시 행방불명돼 시신도 찾지 못한 69명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행방불명자 중 초등학생 이창현(당시 8세) 군의 묘석은 어린아이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이뤄졌던 5·18 광주의 비극을 보여줬다.

지난 16일 국립 5·18민주묘지의 모습이다.
▲지난 16일 국립 5·18민주묘지의 모습이다.

현장의 기억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79년, 10·26사태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지만 당해 신군부가 일으킨 12·12 군사 반란은 독재의 연장선이 됐다. 이에 반대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일었고, 대학가에서 특히 시위가 활발했다. 시위에 참여했던 김도원<전남대 사회학과 79> 씨는 당시 대학가를 회상하며 운을 뗐다. “5·18 전엔 ‘서울의 봄’이라 해 민주화를 위해 전국 대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전남대에서도 마찬가지였죠. 당시 대학생들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컸고,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위에 교수와 시민도 동참하면서 민주화를 위한 목소리는 더욱 커졌습니다. 5·18민주화운동 역시 그 연장선에 놓여있었죠.”

김 씨는 80년 5월 16일에 벌어졌던 횃불 행진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은 당시 전남경찰청장이었던 안병하를 찾아가 평화적으로 시위할 것을 약속했고, 이를 받아들여 민주화와 통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평화로운 행진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저도 횃불을 하나 들고 있었는데 시위가 끝나고 버리려 하니 횃불 숫자를 헤아려 경찰에 보고해야 한다며 다른 학생이 가져가 버리더군요. 우리에겐 축제처럼 느껴졌습니다. 주위에 있던 시민들도 박수를 보내면서 지켜봤고요.”

▲ 김도원 씨의 모습이다. 그는 계엄군의 헬기사격이 벌어진 전일빌딩에서 해설가로 활동중이다.
▲ 김도원 씨의 모습이다. 그는 계엄군의 헬기사격이 벌어진 전일빌딩에서 해설가로 활동중이다.

그러나 5월 17일,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확대 조치하면서 상황은 변했다. 전국의 모든 집회가 금지됐고 언론은 사전 검열을 거쳤다. 이에 따라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주요 대학이 계엄군에 의해 점거됐다. 계엄 확대에도 불구하고 5월 18일 광주에선 대학생들이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전남대에서 금남로로 집회를 이어나갔다. 

오후 들어 투입된 계엄군은 학생들을 향해 곤봉을 휘두르고, 집단 폭행을 가하는 등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합류하기 시작하면서 유혈시위로 번졌다. 5·18 당시 차량시위를 주도한 신봉섭<5·18민중항쟁 민주기사 동지회> 초대회장은 대학생과 시민들에 가해진 무차별적인 폭력의 장면을 회상했다. “버스와 택시를 갑자기 세우더니, 기사를 끌어내 곤봉으로 폭력을 가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피 흘리는 동료기사들, 폭력을 말리다 계엄군에 밀쳐 넘어지는 노인들을 보며 화가 치밀어 올랐고, 차량시위를 주도하게 됐죠. 20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후엔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했습니다. 21일 계엄군이 빠져나간 이후 시민군은 직접 치안을 유지하고, 거리를 청소하며 질서를 지켰죠. 필요한 게 있으면 선뜻 내오고, 밥을 지어 모두가 나눠 먹던, 대동 세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후 시민들과 계엄군의 협상은 결렬됐고, 윤상원 열사를 비롯한 마지막 남은 시민군은 구 전남도청에서 계엄군과 맞서 싸웠지만 결국 제압당하면서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의 5·18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다. 

오늘날,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
5·18민주화운동의 발화지였던 전남대와 마지막 항쟁이 있었던 구 전남도청에선 5·18민주화운동을 기억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먼저 5·18과 전후 역사적 사건을 기리고자 조성된 ‘전남대 민주길’에서 해설가인 정민혁<전남대 신문방송학과 16> 씨를 따라 그곳에 담긴 역사를 둘러보며, 김남주 시인, 윤상원 열사와 같은 전남대 학생들의 삶에 대해 알아보았다. 정 씨는 전남대 민주길을 소개하며, 자신이 느끼는 아쉬운 감정을 전했다. “전남대 재학생이라고 해도 5·18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어요. 물론 5·18 당시 전남대생들의 민주화에 대한 염원은 재학생들에게 생소한 느낌이지만, 당시 전남대생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한번쯤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 전남대 정문에 있는 5·18 사적지 기념비다.
▲ 전남대 정문에 있는 5·18 사적지 기념비다.

전남도청 별관에선 5·18 당시 외신기자였던 노먼 소프가 촬영한 사진 특별전이 진행 중이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총격전, 구 전남도청에서의 마지막 항쟁 이후 사망한 학생, 시민들의 처참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볼 수 있었다. 관람이 끝나고 무거운 마음으로 나오던 중 기자는 고등학생 때 만난 적 있는 추혜성<오월어머니회> 회원을 우연히 마주쳤다. 3년 전 추혜성 씨는 구 전남도청의 철거를 막고, 복원을 위해 617일째 농성 중이었는데, 재회한 당일은 1715일째였다. 그녀는 장승처럼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짓는다고 도청을 철거하기로 했다가, 반발이 거세지자 도청을 전당으로 쓰고 있지. 그 때 총격을 페인트로 덧대기도 하면서 많이 훼손됐어. 이 자리를 지키면서 단식도 하고, 삭발도 하며 버텼고, 지난 2019년 정부는 복원사업을 진행하겠다며 조사단을 꾸렸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는 상태여.” 5·18 당시 부상을 입은 추혜성 씨는 그 때 입은 피해와 그 후 진상규명의 어려움, 피해자들이 입은 정신적 고통을 말하며, 5·18이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임을 젊은 세대가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 추혜성 씨(왼쪽에서 두번째)와 오월어머니회 회원들, 당시 현장에 방문한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모습이다. 

외신기자 노먼 소프는 특별사진전에서 ‘5·18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향한 길고 긴 투쟁의 일부다. 앞 세대가 자유선거와 민주주의 확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지금 젊은 세대는 배우고 감사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광주에 찾아가 5·18민주화운동 이전과 당시, 이후의 현장을 돌아보고, 그 당시 현장에 서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1980년의 5·18민주화운동. 이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선’ 민주화의 역사다. 역사 속 민주화의 물결이 바래지지 않도록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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