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91, 01, 11, 21학번을 만나다] 라떼는 말이야···
[81, 91, 01, 11, 21학번을 만나다] 라떼는 말이야···
  • 임윤지 기자, 최시언 기자, 이다영 수습기자
  • 승인 2021.05.09
  • 호수 1530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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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서울캠퍼스는 개교 82주년, ERICA캠퍼스는 42주년을 맞았다. 이에 본지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 학교의 모습을 기억하거나 추억을 쌓아가고 있는 동문들을 만나봤다.

Q1. ‘한양대학교’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
강용호<자원공학과 81> 동문: 내게 한양대학교란 ‘터닝포인트’다. 고등학교 때까진 공부만 하다가 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낭만 있는 삶이 시작됐다. 우리 학교 공식 응원단장으로 활동했는데 그땐 운동장에 수천 명이 모여 대학 야구 경기를 응원하곤 했다. 이젠 거의 사라진 문화지만 내게는 한양대학교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다.

임병희<국어국문학과 91> 동문: 한양대학교는 ‘청춘의 공간’이다. 특히 ‘피하지 말고, 일단 부딪혀 보자’는 한양대만의 특유의 분위기가 강했는데, 대학 시절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가슴 속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품고 살아갈 수 있었다. 

송유섭<토목공학과 01> 동문: 한양대는 내게 ‘집’처럼 느껴지는 장소다. 지금은 미국 대학에서 교수직을 맡느라 한국을 떠나 있지만, 종종 한국에 갈 때마다 모교를 들러 구석구석 둘러보곤 한다. 매번 느끼지만, 우리 학교만의 약간 투박하면서도 강인한 색채가 늘 정감이 간다. 

오성택<광고홍보학과 11> 동문: 내게 한양대학교는 ‘많은 것이 시작된 곳’이다. 기숙사에 입사해 처음으로 혼자 살기 시작했고, 원하는 학과에 진학한 덕에 처음으로 하고 싶던 공부를 해 볼 수 있었다. 이처럼 한양대는 나의 20대 시절 다양한 경험과 추억이 깃든 곳이다. 

은희석<국문대 문화인류학과 21> 씨: 우리 학교는 내게 ‘넓은 운동장’ 같다. 아직 대학을 다닌 지 두 달밖에 안 됐지만, 울타리 같았던 고등학교와 달리 자유롭게 나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 1981년 3월 서울캠 입학식 모습이다.

Q2. 다시 오지 않을 대학 시절, 가장 소중한 에피소드나 추억은 무엇인가요?
강 동문(81): 신입생이었던 81년도엔 야간통행금지 제도가 있어 자정이 지나면 아무 곳도 돌아다닐 수 없었다. 그런데 학교 안은 이 제도가 적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학생들은 자정이 지나면 노천극장, 본관 가릴 것 없이 학교 곳곳에 모여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던 추억이 있다.

임 동문(91): 무엇보다도 친구들과 밤새 술 마시며 놀았던 기억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당시 친구들과 함께 90년대 사회 이슈에 푹 빠져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공부 이외에도 무엇이든 무작정 시간과 노력을 바쳤던 대학 시절을 돌이켜 보면 그것이 꼭 소모적인 일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후배들도 무엇이든 마음 가는 대로 도전해봤으면 좋겠다.

송 동문(01): 2002년 월드컵 때 우리나라 경기가 있는 날이면 자연스레 교수님이 휴강하신 덕에 친구들과 노는 재미가 쏠쏠했다. 나는 16강 이탈리아전의 승리에 취해 친구들과 왕십리에서 신촌까지 걸어간 적도 있다. 이렇게 대학 시절에만 가질 수 있는 낭만들이 여전히 내게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오 동문(11): 매해 연말마다 하는 광고홍보학과 학술제의 운영팀장을 맡은 적이 있다. 당시 더 많은 학생이 참여할 수 있도록 생중계 방식을 처음으로 도입해 성황리에 진행했던 기억이 난다. 준비하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대학생 때 이런 일도 했었지’라는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

은 씨(21): 갓 입학한 뒤 새롭게 만난 동기들과 함께 술을 마신 게 가장 소중한 경험이었다. 낯선 환경에 코로나19까지 겹쳐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아 고민이 많았는데, 학우들과 술을 마시며 가까워질 수 있어 앞으로의 학교생활을 기대하게 됐다. 
 

▲ 1999년 안산배움터(현 ERICA캠) 총학생회가 주최한 개교 20주년 기념 및 개강 떡 잔치를 하는 모습이다.

Q3. 대학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강의나 은사님이 있나요?
강 동문(81): 주석복 교수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교수님께서 정년 퇴임할 때까지 내가 제출했던 과제를 버리지 않고 후배들에게 모범사례로 보여줬단 이야기를 나중에서야 들었다. 놀라움과 감사한 마음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임 동문(91): 한 교수님께서 수업을 30분 이상 지각하신 적이 있다. ‘모두 휴강인가 보다’ 하고 나가려는데, 그제야 들어오시더니 대뜸 “인생은 방황인가 봅니다”라 하셨다. 강의실을 못 찾아 한참을 방황하다가 인생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참 독특한 교수님이라 아직도 기억한다. 

송 동문(01): 학부 3학년 때 박대효 교수님의 구조역학이란 과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과목에 흥미를 느껴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고 나 역시 현재 교수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해당 내용을 강의하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박 교수님께선 내가 한양대에서 석사과정을 밟을 때 지도 교수님이었고 결혼식 때 주례를 맡아준 분이다. 지금도 박 교수님께서 인생이나 교육에 있어 항상 덕담을 해주시곤 한다. 

오 동문(11): 2학년 때 문영숙 교수님께서 진행하신 ‘소비자 심리’ 수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위해 현장에 가서 직접 취재하는 등 힘든 과정도 있었지만, 처음으로 강의실을 벗어나 현장에서 이론들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배우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은 씨(21): 대학을 다니는 첫 학기라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내가 공부하고 싶었던 분야의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듣고 있는 수업의 교수님들께서 재치있게 유익한 내용으로 수업하신다. 앞으로 더 많은 수업을 들으며 점점 더 기억에 남는 강의와 은사님들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 2015년 서울캠에서 열린 대동제 모습이다.

Q4. 한양대생으로서 자부심을 느낀 순간은 언제였나요?
강 동문(81): 사회에 진출했을 때 어디에서든 한양대 동문들이 반갑게 맞아주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또한, 졸업 이후에도 홈커밍데이처럼 동문 자격으로 여러 행사에 참여하면서 뿌듯했다.

임 동문(91): 예전에 한양대 상해 센터의 초청으로 중국에 강연하러 간 적이 있었다. 상해에 도착해서 저녁에 강연하고 다음 날 바로 돌아오는 짧은 일정이었는데 그날 동문들이 처음 본 나를 따뜻하게 맞아줘 정말 고마웠다. 외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는 느낌이었다. 

송 동문(01):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내 저명한 석학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이분들이 본인 제자 중에 한양대생이 있다며 그가 뛰어나다는 칭찬을 했을 때 가장 뿌듯했다. 한양대 학생들은 충분히 세계적인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모교 후배들이 항상 자신이 가진 단단한 경쟁력을 믿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바다.

오 동문(11): 한양대에도 자부심이 있지만, 광고홍보학과로서 갖는 자부심도 크다. 당시 밤을 새우면서까지 동기들과 모여 회의하는 일이 잦아 힘들기도 했지만, 사회에 나오니 당시 경험들 덕에 직장에서 수월하게 적응할 수 있었다. 학교에 있을 땐 몰랐는데 돌이켜보면 ‘그때도 우리 꽤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구나’하는 생각에 자부심을 느꼈다.

은 씨(21): ‘합격’이라는 두 글자를 보았을 때 ‘이제 한양대학교 학생이 됐구나’라 생각하며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원하는 학교의 학생이 돼 기뻤고, 앞으로 내가 성장해 나가는 공간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비록 코로나19 때문에 학교생활에 제약이 생겨 아쉽지만, 상황이 나아지면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동기들과 같이 캠퍼스를 거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사진 제공: 한양대학교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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