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 배준영 기자
  • 승인 2021.05.03
  • 호수 1529
  • 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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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詩作 메모)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詩作 메모')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는 영원한 청춘 시인의 시 제목이자, 단 한권으로 남은 유고시집의 원제(原題)로 고민했던 어구다. 본 기사는 쉼없이 중얼거리며 그를 좇아간 단편의 기억이다. 

하나둘 봄꽃이 피고 지는 때면 그야말로 꽃다운 시기에 낙화한 수많은 작가와 그들의 유산을 읊어보곤 한다. 윤동주, 이상…. 그중 눈에 띄는 것은 빼곡한 서고 사이를 비집고 단 한 권의 시집으로 남은, 상처받은 청춘의 표상이 된 시인. 유고 시집 한편만을 남겨둔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그를 꺼내어 다시 써 내려가고자 한다. 어느 새에 내 삶에 틈입해온 젊은 시인 기형도의 생애를.

1960년에 태어나 1989년, 스물아홉 번 째 생일을 엿새 남겨 둔 젊은 시인 기형도가 종로 부근의 파고다 극장에서 뇌졸증으로 숨졌다. 가장 어둡고 가장 무거운 주제를 미려(美麗)한 시어로 표현한 기형도. 어릴 적 국어 교과서에서 읽은, 일터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그리던 어린 소년을 읽었다면 그것이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기형도의 첫 모습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기형도는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에서 태어나 5세 무렵부터 타계할 때까지 광명시 소하동에서 살았다. 어릴 적부터 다재다능했던 그는 노래와 그림에 소질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유년기는 빛 보다는 어둠에 가까웠다.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가계 전체가 어려워진 일(10세), 바로 위 누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일(16세), 안개가 많이 끼는 안양천이라는 주변 환경 등을 내면에 깊게 체화해야만 했다. 
 

선생님. 가정 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위험한 家系·1969」부분

▲지난달 29일 찾은 안양천의 모습이다. 기형도는 공단이 세워졌던 당시의 길을 오가며 등단작 「안개」의 모티프를 얻었다. 천 주변으로 빼곡히 들어찬 건물 탓에 당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지난달 29일 찾은 안양천의 모습이다. 기형도는 공단이 세워졌던 당시의 길을 오가며 등단작 「안개」의 모티프를 얻었다. 천 주변으로 빼곡히 들어찬 건물 탓에 당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학창 시절 최상위 성적을 유지했던 그는 중앙고를 거쳐 연세대 정법대학에 입학해 정치외교학을 전공한다. 아울러 대학 생활은 주로 ‘연세문학회’와 함께 하며 병든 시대를 헤쳐나갔다. 대학 시절에도 교내 문학상에 소설과 시로 몇 차례 입상하기도 한 그는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1985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가 당선돼 등단한다. 정치부에서 문화부로 부서를 옮겨가며 시작(詩作)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그는 평소 꿈꿔 온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출간 제의를 받고 원고를 정리하던 중 출판사에 보내려던 시 한 편의 원고를 든 채로 타계한다. 그리고 두 달 뒤, 백만 부 이상이 팔리며 지금도 생명력을 지닌 채 많은 사랑을 받는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출간된다.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안개」부분

그가 태어나 자란 1960~70년대는 국가의 기틀이 잡히며 급속한 산업화로 태동하던 시기다. 그가 거닐던 안양천의 짙은 안개는 ‘검은 굴뚝들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공단’을 덮곤 했다. 자본의 편중이 심화되고 가세가 기우는 상황 등은 기형도 시의 *원체험으로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또한 1980년대는 그가 청년기를 보낸 시기다. 민주화에 대한 갈망이 폭력적으로 짓밟히는 처참한 상황에 대해 비극적 인식을 시 세계에 담아냈다. 그 자신이 써둔 약력처럼 그는 참여시와 순수시라는 작의적 이분법에서 벗어나 모든 사물과 그것들이 빚어내는 구조 및 현상에 탐구한 것으로 오늘날 평가된다.
 

(……)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대학 시절」부분

이제는 그대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지요
기자는 조금 더 가까이서 사람 기형도와 시인 기형도를 이해하고 듣고자 광명시 소하동에 위치한 기형도문학관을 찾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기형도의 큰 누님이자 기형도문학관의 명예관장인 기향도 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기형도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형도는 겸손하고 다정다감하면서 세심했습니다. 7살 차이가 나 많이 업고 다니기도 했고, 커서도 제가 보호해야 했던 동생이지만 결코 쉬운 생각이나 마음으로 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형도의 소원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자신의 글이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전해지고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글로 먹고 사는 일은 가난하다’라는 어머니의 말씀엔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 말하기도 했었지요.” 

가족의 목소리로 들어본 사람 기형도를 뒤로하고, 조금 더 시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의 기억에 귀 기울여 봤다. 이승하<중앙대 문예창작전공> 교수가 기억하는 시인 기형도는 그가 했던 다음의 말에서 나타나듯 허세가 없고 진솔한 인물이었다. “이형과 내가 최종심에 겨루어 내가 떨어지고 이형이 붙었지요. <겨울판화> 연작은 내가 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시오? 홧술 마시고 <질투는 나의 힘>을 썼어요.”
 

(……)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부분

“이런 말을 저라면 절대로 못 했을 겁니다. 중앙일보 기자인 기형도 시인이 중앙일보 당선자인 제게 신춘문예 특집 연재물 청탁을 하면서 일부러 중앙일보사로 오게 한 것도 저와 식사하면서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겠죠. 워낙 일찍 작고했기에 ‘신화’가 되고 말았지만, 그는 가식이 없고 솔직해서 인간미가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내면의 그는 우울했습니다. 아픈 가족사와 군부독재로 이어진 현대사가 그를 우울하게 했지만, 생활인 기형도 기자는 늘 밝고 성실했습니다.” “그가 노래를 부르던 일이 인상적으로 남아있습니다. 저와 대학 동기인 남진우 시인의 결혼식장에서 그는 축가를 불렀습니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제곡인 「What is a Youth」를 불렀지요. 정말 노래를 잘 불러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 교수는 기형도의 시를 두고 “개인적인 고뇌와 시대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자 했다는 점, 즉 자아라는 우물과 세상이라는 하늘을 함께 다룬 것”의 위대함을 말했다. 자아의 균열과 내면의 상처를 드러내는 젊은이의 노래이면서도 결코 동시대인의 고통을 침소봉대하지 않은 것이 바로 기형도의 시가 가진 ‘생명력’이었던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기형도는 미안한 마음을 안고 희망을 노래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게 된 계기로서 누이의 죽음과 또 그가 보내온 80년대의 암울함이 차마 희망을 노래하기 어렵게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글들을 찬찬히 읽고 써 내려가다 보면, 어디에선가 희망의 찬가가 은밀하게 그러나 완연히 들려온다. 그의 시에 남겨진 우울과 좌절의 흔적은 희망을 부정하고 지워내려는 것이 아닌, 역설적으로 희망을 갈구하는 마음에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린 절망함으로써 희망의 존재를 환기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희망과 마주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가 떠난 지 삼십 년 하고도 한 해가 더 흘렀다. 문학평론가 오생근 교수의 말마따나 기형도의 육체적 삶은 소멸되었을지라도, 젊은 독자들의 영혼 속에 영원히 젊은 모습으로 각인되어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이 변해도 그의 흔적만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그의 시대로, 시의 세계로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원체험: 기억에 오래 남아 있어 어떤 식으로든 구애를 받게 되는 어린 시절의 체험을 말한다.

도움: 기향도<기형도문학관> 명예관장
이승하<중앙대 문예창작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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