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학, 죽은 자의 못 다한 이야기를 듣다
법의학, 죽은 자의 못 다한 이야기를 듣다
  • 임윤지 기자
  • 승인 2021.04.05
  • 호수 1527
  • 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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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이란 △사망 시각 △사인 △질병 등의 조사로 의문스러운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학문이다. 특히, 법의학은 그동안 시체 부검과 법의학적 증거물 분석을 통해 범죄사실의 규명 및 범인 검거에 이바지해 왔다. 죽은 자의 침묵 속 진실을 밝혀낸단 점에서 ‘인권 존중의 의학’이라고도 불린다. 오늘날 우리나라 법의학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법의학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법의학은 오래전부터 죽은 자의 인권을 지켜주는 마지막 열쇠와도 같았다. 지난 19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힌 일, 지난 2016년 미제로 남을 뻔했던 대부도 토막살인 사건의 범인을 붙잡은 일 모두 법의학이 사건 해결의 중심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법의학은 지난 2014년 윤 일병 사망 사건의 진실을 알려 우리나라 군대 내 인권문제를 수면 위로 올리기도 했다. 법의학자들의 부검으로 고인이 선임 병사들의 폭행 및 가혹 행위로 사망했단 사실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법의학은 부검을 통해 각 시체에 담긴 수많은 사연을 읽어냄으로써 우리 사회상을 비추기도 한다. 지난해 5월 경남의 한 컨테이너 박스에서 심하게 부패한 시신 한 구가 발견된 바 있다. 사인은 기아사였다. 세 달 전엔 한 60대 여성이 사망한 지 반년 만에 ‘지병으로 인한 변사’ 상태로 발견됐다. 오래전부터 앓고 있던 병을 치료할 돈이 없어 홀로 쓸쓸히 사망한 것이다. 이외에도 사망 후 2년이 훌쩍 지나 미라화된 상태로 발견된 사례도 있다. 이들의 죽음에 담긴 사연이 부검을 통해 밝혀지자 이는 곧 우리 사회의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소외 계층 전반을 향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죽은 자가 삶의 무게에 짓눌러 미처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법의학이 대신 말해준 셈이다.

죽음 전에 있던 과거를 되짚는 것에서 나아가 법의학은 장래에 발생할 사고를 예방하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 법의학적 데이터가 우리에게 필요한 정책이 무엇일지 시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김원규<의대 의학과> 교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에선 1년마다 시체의 사망 종류와 원인에 대한 데이터를 모아 매년 보고한다”며 “이를 활용해 우리나라 인구가 어떤 질병으로 사망하는지 등을 확보해 통계를 내면 보건정책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런 데이터들이 정책에 반영된 사례도 있다. 최영식<국립과학수사연구원> 전 원장은 “국과수 연구 결과, 일반 약국에서 판매되던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많은 청소년이 사망했단 사실이 드러나자 국과수에서 해당 의약품의 환각 가능성을 경고해 이후 판매가 금지된 적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여전히 제도적 한계 커
이처럼 날이 갈수록 법의학은 그 쓰임새가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하지만 법의학의 발달에 비해 관련 제도나 정책은 이를 제대로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법의학자들은 정확하고 공정한 사인규명을 위한 *검시 권한이 법의관에 집중해 있지 않고 여러 부처에 분산돼 있는 점을 지적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사건 현장에 나간 검사와 경찰 등 수사기관이 먼저 시체를 본 뒤 필요할 경우 국과수에 부검을 의뢰하는 식으로 운영된다. 최 전 원장은 “현행법률상 우리나라는 법의학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발생하더라도 ‘법의’ 전문가가 아닌 ‘법률’ 전문가인 검사의 판단에 따라 부검 여부가 결정된다”고 밝혔다. 이어 “이 때문에 정작 법의관들은 가장 중요한 사건 현장에 가보지도 못한 채 사진 설명만 보고 부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고 전했다. 이렇듯 처음부터 사망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법의관들은 사인을 밝히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일이 빈번하다.

검시 제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전부터 여러 번 시도가 있었지만, 매번 국회에서 개정안이 통과되지 못했다. 유성호<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지난 2005년 유시민 전 의원이 입법한 △검시관 독립성 확보 △검시관 자격요건의 엄격화 △정부 산하 검시위원회 설치 등을 골자로 제도를 개선하는 방안이 현실적으로 바람직해 보인다”고 말했다. 

법의학, 더 높이 비상하려면
흔히 법의학은 ‘죽은 자들을 위한 의학’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오늘날 법의학은 억울한 죽음을 밝힐뿐 아니라, 사각지대에 놓인 사회구성원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동시에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 보탬이 되기도 한다. 이미 지나간 죽음이라 해도 이를 연구하는 건 분명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기여하는 일인 것이다.

무엇보다 법의학은 공익 차원의 성격이 강한 만큼 다른 의학 분야들보다도 국가의 적극적인 재정 지원이 절실하다. 김 교수는 “충분한 예산으로 법의 전문 인력과 장비를 마련하는 것이 곧 법의학 수준과 국과수의 공신력을 높이는 일”이라 밝혔다. 정호진<정의당> 전 대변인 역시 “법의학이 발전하면서 사회공동체로부터 단절된 채 기아사나 고독사로 사망하는 사례들이 점점 수면 위로 오르고 있다”며 “자칫 드러나지 못할뻔했던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법의학을 비롯해 국과수에서 밝혀내는 만큼 앞으로 이들이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활발한 지원이 필요할 것”이라 전했다. 앞으로 더 많은 관심과 후원 속에서 법의학이 우리 사회에서 더 높이 비상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검시: 사망의 원인을 법률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시체 및 주변 현장 등을 조사하는 행위를 말한다. 

도움: 김원규<의대 의학과> 교수 
유성호<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
정호진<정의당> 전 대변인
최영식<국립과학수사연구원> 전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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