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나를 망가뜨려 버리지만 그를 사랑하는 것 같아
[장산곶매] 나를 망가뜨려 버리지만 그를 사랑하는 것 같아
  • 정채은 편집국장
  • 승인 2021.03.07
  • 호수 1525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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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채은<편집국장>

2017년 개봉한 영화 「베를린 신드롬」은 베를린으로 배낭여행을 간 ‘클레어’가 ‘앤디’를 만나 불꽃 같은 사랑을 나누며 그의 집에 머물다, 그곳에 갇히게 되는 내용이다. 앤디는 클레어를 가둬두고는 그녀를 자기 마음대로 꾸미며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고, 그녀에게 신체적·정신적 학대를 가한다. 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지만 굳게 닫힌 여러 겹의 문과 창문을 넘지 못한 클레어는 앤디의 집에서 고립돼 간다. 그녀가 처음 앤디의 집에 갇혔을 때 느낀 공포는 증오로 바뀌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증오마저 무뎌지고 그녀의 심리상태는 속절없이 무너진다. 

영화 「베를린 신드롬」은 ‘공포심이 극에 달한 상황 속에서 이 같은 상황을 만든 이들에게 동조하는 비정상적인 감정을 가지는 현상’인 스톡홀름 신드롬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추운 겨울 어느 날, 부모님을 만나러 나간 앤디가 집에 돌아오지 않고, 하필 이때 집이 정전되며 클레어는 얼어 죽을 위기에 처한다. 며칠 뒤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던 앤디가 돌아오고, 클레어는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앤디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에게 다시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이 둘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앤디에 대한 클레어의 이 같은 감정 변화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비정상적이다. 또한, 이때 클레어의 모습엔 앤디의 집에 감금됐다는 것에 대한 분노 혹은 이와 관련된 일말의 의식마저 없어 보였다.

증오와 사랑이 공존하는 이 둘의 이상한 관계는 스릴러 영화라서 극적으로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지만, 현실에도 충분히 있을법한 이야기다. 실제로 필자가 즐겨보는 연애 상담 프로그램에선 이 같은 사연이 자주 소개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려는 남자친구에 대한 걱정, 자신을 노예처럼 부려먹는 여자친구에 대한 고민, 자꾸만 상하관계를 요구하는 남자친구에 관한 사연 등등 정상적이지 않은 연인 관계 속에서 괴로워하는 이들은 상상 이상으로 많다. 그리고 이는 스톡홀름 신드롬과 비슷한 심리학적 현상인 가스라이팅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가스라이팅은 자신이 신체적 또는 정신적인 학대를 당하면서도 그것이 폭력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런 상황을 만든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이 상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클레어가 앤디의 집에서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채로 주변 상황으로부터 고립되는 것과 같이 가스라이팅이 발생할 때도 가해자에 의해 주변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스톡홀름 신드롬이든 가스라이팅이든 이 모든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영화와 같이 연인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친한 친구, 심지어 가족 사이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이 나를 망가뜨려도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더욱 알아차리기 어렵다. 사랑하기에 이뤄지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되돌아봤다. ‘사랑해서’, ‘모두 너 잘되라고’라며 나를 무너트리려 드는 관계는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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