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가작] 나를 넘어서는 실천
[2020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가작] 나를 넘어서는 실천
  • 김명윤<인문대 독어독문학과 17> 씨
  • 승인 2020.11.30
  • 호수 1522
  • 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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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누군가에게는 낭만이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재난이 되는 사회는, 그 저변에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이 깔려 있다. 사회 구조상,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내적 모순은, 일상의 꿈결 같은 환락을 깨고 들어오는 비극의 원천이 된다. 영원불멸할 것 같은 사회도, 실은 태생적으로 이러한 자기 파멸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틈’ 내지는 원천적인 비극성을 이미 항상 (always already)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상충하는 두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사회가 이미 자신의 뒤틀림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은 양립 불가능한 앙숙관계다. 자유가 범람하는 사회일수록 개인은 표면적으로는 평등을 추구하면서도, 속으로는 오히려 타자와의 ‘차이’를 욕망하는 데, 이러한 ‘차이’야말로 개인의 지워지지 않는 공백 위로 ‘의미’를 발생시키는 촉매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의미는 ‘나’와 ‘너’라는 차이 속 벌어진 틈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다. 공백을 참을 수 없는 ‘개인’은 자신에게 덧붙일 의미를 항상 갈망하며, 이를 토대로 자기인식을 하려는 주체, 라캉식으로 다시 말 할 것 같으면 ‘빗금이 그어진 주체’로 다시 태어나려 하는 것이다. 이를 정리해보면, 개인은 결국 자신의 존재를 담보해줄 내용물이 있는 주체 혹은 존재(공백)의 무게가 경감된 듯한 느낌에 도취된 주체, 혹은 자기 인식이 가능한 주체가 되기 위해, 불가피하게 하지만 흔쾌히 이런 차이를 벌려 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보았을 때, 차이야말로 주체 탄생의 가능조건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나를 인식할 줄 아는 ‘나’는 이미 ‘너’와의 차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극단에 치달을 경우, 최종적으로 ‘나와 너’를 ‘나’하고 ‘너’로 영원히 갈라놓을 이분법을 일상에 도입하게 된다. 이분법은 개념화된 차이라 삶을 체계화시키는 견고한 하지만 약한 틀이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위의 일련의 과정이 의식적인 절차를 밟으며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존본능처럼 자동적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이다. 자유는 인간의 방어기제를 강화시키는 요인들 중 하나다. 그리고 자유로부터 촉발된 이 과도한 심리적 방어기제 속에 약자와 강자, 선과 악, 문명과 야만식의 단순화된 이분법의 과대 망상적 변형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분법은 자유의 부작용으로부터 파생된 결과물인 셈(Calculation)이다. 이런 과대망상의 첫 희생양이 되는 것은 언제나 평등주의다. 자신을 옥죄는 평등을 배척하는 기제를 타고난 자유는 평등을 암살해야 각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가 주창하는 평등주의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말라버린 것이다. 이를 인지하기 어려운 것은, 사회가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그 시체를 박제하여 살아있는 것으로 (living dead)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 떳떳하게 서 있는 평등주의의 눈을 보라. 그것은 『모래 사나이』 속 초점 없는 올림피아의 눈이다. 정치인이 오늘날 평등과 관련해서 구사하는 언어 또한 이미 죽어서 박제된 기표들의 나열에 불과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차이에 이미 중독되었기에 시도 때도 없이 차이를 갈망하며, 차이가 없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기생충>의 비극적 사건들은 바로 이러한 ‘차이’에 중독된 캐릭터들이 빚어낸 결과라 볼 수 있다. 관계를 맺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공생이고 다른 하나는 기생이다. 공생은 차이가 정형화되지 않아서, 아직 이분법으로 고착되지 않은 관계망에서만 가능하다. 모든 감정을 마비시켜버리는 이분법의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운 이곳 사람들은 타인을 ‘동정’(Sympathy, Mitgefühl)할 줄 알며, 공생의 삶을 지향한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 동정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나를 넘어서는 실천임과 동시에 ‘나와 너’라는 공동의 가치를 고취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기생적 삶은 이분법의 언어가 이미 통용되고 있는 관계망 위에서 펼쳐지는 삶이다. 이곳에서는 자신의 실리를 챙기기 위해 이분법적 구분 잣대를 들이미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미덕으로 통용된다. 동익(이선균)과 기택(송강호)의 가족은 결국 이 미덕에 지나치게 충실하여 파국에 치달은 것이다. 이들이 남과 자신을 구분 짓는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상대를 ‘동정’할 줄 아는 심적 여유가 있었다면, 비극은 그들의 삶을 비껴갔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지탱해준 이분법에 평생 의지하며 살다 죽은 동익과 지하 벙커 생활을 하게 된 기택은 자신이 행하는 모든 행위가 결국 비극을 초래하는 행위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오이디푸스와 오버랩 된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기택은 비극이 비극인줄 모르기에 더욱 비극스러운 삶의 굴레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는 영화 플롯 상 ‘급전과 발견’이 나타나는 부분이기도 하고 가족영화가 급작스럽게 공포영화로 변주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바로 집에서 내쫓겼던 문광이 비 맞으며 돌아와 같은 처지의 사람끼리 도와달라고 부탁했을 때이다. 그때 기택가족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인상 찌푸리며 그녀를 문전박대했다. 비극의 서막은 그렇게 열리지 않았던가?

<기생충>은 우화의 형식을 빌려 차이에 대한 강박이 암시하는 필연적 비극을 제대로 조명하는 몇 안 되는 영화다. 봉준호 감독은 한 대담에서 극영화가 구조를 다루는 방식은 사회과학서적처럼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비롯되는 “재앙들이 개인들에게 얼마나 비극적으로 전이되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알고 있던 것이다. 비극은 언제나 우리가 자초하는 것이기에 더욱 비극적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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