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 가작] 인생리셋버튼
[2020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 가작] 인생리셋버튼
  • 이종선<사범대 국어교육과 17> 씨
  • 승인 2020.11.30
  • 호수 1522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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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등학교에서 시험이 끝났다는 게 뭘 의미하냐면, 아이들이 어디까지 어수선해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우리 반도 마찬가지였다. 시험이 끝난 날부터 나온 정오표들은 이미 찢어지거나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만큼 모두가 성적에 민감하다. 선생님들도 시험 점수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고, 우리도 저마다 조금이라도 점수를 높여 보려고 선생님에게 이의를 넣으러 찾아간다. 물론 모두가 성공하지는 못한다. 어디서 애매하게 주워듣고 온 근거는 완고한 선생님들을 설득하기 어려웠고, 어설프게 찾아간 친구들은 모두 똑같은 꼴을 하고 돌아왔다. 괜히 더 툴툴대며 시험 문제가 이상하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친구들을 보며, 우리는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그냥 자기가 처음부터 제대로 쓰면 되는 거 아니야?”

내 말에 예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몇 년을 알고 지냈지만, 그애는 여전히 대답보다는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거기서 그애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읽어내곤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저 말을 꺼내지 않을 뿐, 자기 의사 표현은 확실한 친구였다. 가끔 그런 과정이 조금은 번거롭기는 하지만, 그만큼 오랜 시간을 들여 서로 관계를 쌓아왔기에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속삭이고, 조심스러운 이야기를 하나씩 들으면서 서로의 시간을 알아갔으니까 말이다. 이것도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우리는 꽤나 달랐다. 그냥 어디에나 있을 법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나에 비해 예준은 전교에 있는 모두가 알 정도로 유명했다. 언제나 1등을 놓친 적 없는 천재, 선생님들이 제일 기대하는 학생. 그게 그애의 수식어였다. 한 번이라도 부러워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학교에서건 학원에서건, 무슨 일을 해도 선생님들이 이해해주고, 쟤도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서였는지 같은 일을 해도 크게 혼나는 건 나였고, 그애는 어떻게든 잘 빠져나면서 자기 혼자만 살아남는 일이 잦았다. 때론 예준이 얄밉긴 했지만, 크게 부당하다거나 하는 생각은 안 들었다. 어쨌든 착한 애인 건 맞았고, 학생은 어쨌든 공부를 잘해야 대접받는 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우리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뭐 별다른 건 없었고, 그냥 여느 때처럼 잡다한 얘기들이었다. 그러던 중 우리 사이로 미경이 끼어들었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비집고 들어온 미경은 능숙하게 화제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

“얘들아, 너희 인생리셋버튼이라고 들어 봤어?”

“뭐, 어떤 거? 몰라.”

생소한 단어의 조합에 우리 둘은 고개를 저었다. 나나 예준이나 모두 자기가 좋아하는 것 이외에는 쉽게 관심을 두지 않아서 미경과는 달리 신문물에 많이 약했다. SNS를 잘 하지 않는 성향도 그에 한몫했다. 그애는 그런 우리를 보고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에휴, 이 시대에 뒤떨어진 친구들아. 내가 또 알려줄게. 그러니까, 서울 구석 어딘가에 인생리셋버튼이라는 게 있대. 그걸 누르면 말 그대로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살 수 있게 해 준다네.”

“야, 그러면 세상 사람 전부 다 부자 되게? 그럼 다 주식 대박나고 로또 맞고 하겠지.”

“맞아 게다가….”

“아 잠깐, 잠깐!”

미경은 우리에게 더 따질 틈을 주지 않고 말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자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이게 아무나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정말 간절하게 필요한 사람 앞에만 나타나는 거야. 우리가 상상하는 거 이상으로 그걸 갈구해야 하는 거지. 그러니까 해리 포터에 나오는 필요의 방 같은 것처럼. 뭔 느낌인지 알지?”
미경은 그대로 설명을 이어갔다. 게임이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어떤 공간으로 들어가게 된다느니, 그 공간에 들어가서 뭔가를 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그 공간에 들어간 것처럼 뭔가에 홀린 듯 미경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허무맹랑하긴 했지만 이야기엔 왠지 모르게 빠져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러던 중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은근슬쩍 같이 얘기를 듣고 있던 은서가 말했다.

“너 또 이상한 거 보고 왔구나? 어디야 이번엔, 유튜브야?”

“너네 진짜 몰라? 야, 이거 봐봐. 진짜라니까.”

“뭐야, 너 핸드폰 안 냈었네. 잠깐만….”

“아 뭐야, 그냥 장난이잖아. 애도 아니고 왜 아직도 이런 걸 믿어.”

“뭐가. 재밌잖아, 크크. 근데 진짜 있으면 재밌긴 하겠다. 너네는 만약 있으면 누를 거야?”

“난 누를 것 같은데. 애들 장난이긴 하지만, 이거만 봐도 조회수가 5만 번이 넘었잖아?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는데, 굳이 안 누를 사람이 있겠어?”

“나도 아마….”

“야, 뭐해 너네! 어, 김미경! 너 또 핸드폰 안 냈어? 에이…. 그거 가지고 따라와!”

“아, 망했다. 갔다 올게.”

선생님이 소리치자마자 우리는 자연스럽게 떨어져 각자 공부하는 척을 했고, 미경은 잔뜩 화가 난 발걸음으로 선생님을 따라갔다. 잠시간 교실이 조용했다. 그러다 그때까지도 말없이 얘기를 듣고만 있던 예준이 조용히 물었다.

“지우야, 근데 너 진짜 누르고 싶어?”

“글쎄, 별 생각은 없는데, 인생 한 번 다시 살아보는 것도 재밌잖아. 안 그런가?”

예준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다시 조용히 미소지었다. 아까랑은 조금 달라 보이는 미소였고 나는 그 미소의 의미를 알았다.

 

 

 

-2-

여름은 지나갔지만 아직도 한낮은 뜨겁다. 슬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때도 되지 않았나 싶으면 쨍, 하고 햇살이 머리를 내려찍었다. 아이들도 하나둘 부채질을 하다가 늘어져가는 걸 보니,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얘들아, 오늘 너무 더운데 십 분만 쉬었다 할까?”

“네-!”

아이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면서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나는 적당히 눈치를 주고는 아이들을 내보냈고, 곧바로 의자에 늘어져 버렸다. 에어컨이라도 다시 틀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얼마 전부터 날씨가 쌀쌀해졌다며 원장 선생님이 사용을 막아버렸다. 학원에서 감기에 걸려 왔다는 애들 때문에 불평하는 학부모들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잡생각이 지나가고 문득 둘러본 교실은 한적했다. 아이들이 없는 공간은 정말 조용했다. 누군가는 그걸 보고 마음이 허전해진다던가, 아쉬워 괜히 찡해진다던가 하지만, 나는 잠시라도 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선생님들처럼 특별히 사명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이들을 막 좋아해서도 아니었다. 애초에 비교하기도 애매한 게, 가르치는 목적 자체가 달랐으니까 말이다. 아이들을 돈으로 본다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딱히 그것보다 대단한 무언가로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뭐, 아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다는 마음도 크지 않았고, 딱히 스승으로 남고 싶은 욕심도 없었다. 그저 학원을 벗어나 스무 살이 된 아이들이 ‘선생님~’하고 부르며 찾아오는 걸 막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나를 학원에 붙어 있게 하는 건 결국 그런 아이들이었다. 그건 아마 다른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게 돈 때문이건, 아니면 저마다의 다른 이유 때문이건 말이다.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자 아이들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조금은 시원해졌던 교실 공기가 다시 숨 막히게 변해갔다. 아이들은 그마저도 즐거운지 저마다 하하호호 떠들며 교실의 빈자리를 빠르게 메워갔다. 제 학교의 교복을 입었을 뿐 이렇다 할 특색 없는 아이들을 보니 문득 저번 달에 찾아온 아이가 떠올랐다. 분명 그애도 지금 내 앞에 앉은 아이들처럼 별다를 것 없는 한 명이었을 것이다. 누구도 다르지 않겠지만 내가 바로 기억해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애가 겨우 스무 살이 되고 반 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때 잠깐 만난 이후 내가 지금까지도 그애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기억할 수 있을 만큼 색깔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애를 그렇게 바꾼 건 무엇이었을까. 잠깐의 고민 끝에 내렸던 결론은 또다시 한국 입시제도와 제도권 교육에의 지적뿐이었다. 물론 그런 것에 맞서 싸울 만큼 정치적 견해와 교육적 신념이 굳은 것도 아니었기에 그저 소시민의 한탄으로 마무리했다. 누군가에게 한 톨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생각을 가지고, 우리는 오늘 하루도, 그저 그런 하루를 이어간다.

“얘들아, 이제 좀 시원하지? 많이 쉰 것 같으니까 다시 수업하자. 책 펴.”

툴툴대는 아이들과 함께 지겨운 수업은 이어졌다. 책상 밑으로 핸드폰을 한시도 놓지 않는 아이, 책을 보고는 있지만 제멋대로 진도를 나가는 아이, 수업을 듣는 시늉은 하지만 딴 생각만 가득 찬 아이…. 우리는 달라지지 않는 삶을 살고, 그렇기에 우리의 하루는 언제나 같다.

이 주 간의 1회고사 기간이 겨우 끝났다. 하루이틀 간의 땡땡이를 마친 아이들은 또다시 부모님에게 등떠밀려 학원으로 돌아왔다. 입이 코까지 튀어나온 아이들을 데리고 시험문제 풀이를 하고, 문제를 틀린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주고 조금 일찍 수업을 마무리했다. 조금은 여유가 생겨서 그랬을까, 다시 빈 교실이 눈에 들어왔다. 블라인드에 가려진 햇빛은 부서져 교실을 밝혔고, 나는 구석에 처박힌 종이컵을 찾았다. 몇 개 남지 않은 종이컵을 하나 집어 커피포트에 남은 마지막 물을 붓고, 노란색 인스턴트 커피를 녹이면서 가만히 학원을 둘러보았다.

다른 교실에서는 아직도 수업을 하고 있었다. 사실 아이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고, 알 바도 아니었지만 특유의 그 분위기로 봐서는 아마 3학년 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맡은 반보다 좀더 쳐져 있고, 칙칙한 색감도 그렇고 무엇보다 ‘나 건드리지 마세요’라고 써져 있는 얼굴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으려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기억도 잘 나지 않고 해서 금방 그만두었다. 지난 시간이 고스란히 추억이 된다면 참 좋았겠지만, 아쉽게 그럴 여유도, 또 그걸 떠올릴 시간도 없던 사람의 폐해였다. 나는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을까. 그렇게도 열심히 살아온 시간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뭔가에 홀린 듯 옆 교실로 걸어갔다. 3학년은 아니었지만, 남아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말없이 앉아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서너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왜인지 교실이 휑하다는 생각은 들지는 않았다. 그건 아마 전교에서 손가락 안에 꼽는 그 아이들의 면면들 때문이었으리라. 똑같은 학원비를 내고 다녀도 분명히 현수막이나 전광판 따위에 이름이 걸려 언젠가 우리 학원을 홍보해줄, 그런 아이들이었기에 그만큼의 느낌을 준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예준이라는 아이였다. 말이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나름 명문고에 다니면서도 꼬박꼬박 1이라는 숫자가 적힌 성적표를 가져오는 아이였다. 내가 담당하는 반이기도 하고, 원장 선생님이 특히 더 신경 써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해서 그나마 많이 얘기를 나눠본 아이였다. 그래서 일부러 뭔가 더 챙겨주기도 했고, 가끔씩은 개인적인 고민을 들어주기도 했다. 물론 얘기를 나눠봤다고 해서 더 친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공부 잘 하는 부잣집 도련님은 꽤나 다가가기 어려웠고, 나를 부담스러워하는 듯했다. 그런 성격 때문이었을까, 같이 학원에 다니는 다른 아이들과도 별로 친하지 않은 것 같지만, 우리 같은 어른들에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건 그애를 단편적으로만 나타내는 한두 장의 종이였고,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잠깐의 여유를 마치고 다시 내 책상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가져온 시험지를 다시 뒤적이다 보니, 문득 요새는 학교 시험도 정말 어렵게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렵다기보다는 더럽게 나온다고 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건 수능보다도 어려운 것 같네. 그런 생각을 하며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문제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 언제 퇴근해? 저녁 같이 먹자.

제대로 손에 잡히지도 않는 일을 잡고 멍하니 기계적으로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던 나를 깨워준 건 뜬금없이 온 성연의 문자였다. 핸드폰 화면에 뜬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나는 그 문자에 곧바로 답장하지 않았다. 내 앞에 쌓인 시험지들은 아직도 꽤나 많이 남아 있었다. 저녁을 같이 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은 좋아졌다.

“얘들아, 오늘은 선생님이 사 주는 거야. 시험 끝나고 다들 수고했다는 의미에서 먹는 거니까, 다음 시험도 공부 열심히 해야 돼. 알겠지?”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밝고 다급하게 대답을 하고는 치킨에 달려들었다. 요새 시간이 안 맞아서 자꾸 미루고 있었지만, 더 이상 가다가는 2회고사 시작 기념이 될 것 같아 무리해서 날을 잡아 치킨집에 데려왔다. 결국 오늘마저도 몸이 아프다고 빠진 한 명을 빼고, 내가 가르치고 있는 모든 아이들을 데려왔다. 모두가 모이지 못한 건 조금 아쉬웠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빠진 게 원장 선생님이 말한 관리 대상인 아이는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먹을 걸 사준다는 건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단순했지만, 그 나이대 아이들의 효율을 끌어내는 데는 이만한 방법이 없었다. 그다지 공부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 학원에 붙어 있을 구실을 만들어주고, 열심히 하는 아이들에게는 최소한의 응원이 될 수 있었다. 결국 이 잠깐의 투자가 내 일자리를 이어가게 해 준다는 건 너무도 명확했다. 어쩌면 살짝 속물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모두가 행복하다면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매번 같은 일을 반복했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그룹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 지었다. 하고 있는 이야기는 전부 달랐지만 그래도 나름의 행복을 재주껏 추구한다는 건 똑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간만에 인간미 있게 미소지을 수 있었다. 이때만큼은 정말 성적이나 학교와 상관없이, 모두가 함께 어울릴 수 있었다. 물론 언제까지고 그런 모임이 계속될 수는 없겠지만, 굳이 아이들에게 그걸 서둘러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언젠가 너희도 알게 되겠지, 하며 뒤에서 쓴웃음 지을 뿐이었다. 그건 다가올 시간을 먼저 겪은 어른의 씁쓸함이었다.

“선생님, 맥주 사 주시면 안 돼요?”

“죽을래?”

누군가 내뱉은 한 마디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깔깔대며 웃음 지었다. 물론 평소 장난기 많던 아이였던지라, 아마 그 말도 정말 맥주를 바라고 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런 사소한 장난이라도 하면서 자기만의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그건 누구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잠깐의 웃음이 잦아들고, 다시 아이들은 저마다의 주제로 돌아갔다. 나도 다시 내 테이블로 돌아와 치킨 조각들을 깨작깨작 먹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내 앞에 앉아 있던 미경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선생님.”

“응?”

“선생님은 살면서 이것만큼은 안 했어야 했는데, 하면서 후회하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애는 그러면서 장난 반, 진지함 반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느닷없는 질문이 당황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그 질문이 매력적이라고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평소 같으면 적당히 넘어갔겠지만, 이번엔 딱히 대답을 피하지는 않았다.

“나? 수두룩하지. 그거만 아니었어도 여기에서 이러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뭐 이런 거.”

대답을 하면서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둘 지나온 몇 년의 장면이 지나가다가, 순간 얼굴이 찌푸려졌다. 괜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다행히 내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미경은 여전히 흥미로워 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얘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내가 계속 궁금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자 미경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선생님, 인생리셋버튼이라고 들어보셨어요?”

며칠 지나지 않아 성연의 집에서 맥주를 마실 때였다. 한참을 얘기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미경에게 들었던 얘기를 성연에게 해 주었다. 꽤나 흥미롭게 듣던 성연은 내 얘기가 끝나자 코웃음 치면서 말했다.

“뭔 소리야 그게. 요새는 그런 게 유행해? 우리 애들은 막 누를 때마다 누가 죽는 대신 1억이 나오는 버튼 얘기하던데. 별 게 다 있네.”

“그러게 말이야. 진짜 SNS 세대가 재밌긴 재밌어. 안 그래?”

나도 같이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러니까. 근데 그거 되게 철학적으로 얘기해 볼 만하다. 지금까지 자기 잘못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할 수 있는지, 아니면 과거를 바꿔서 생기는 나비효과의 책임은 누구한테 있는가, 뭐 이런 거. 그러고 보니까 요새 애들이 무의식적으로 철학적 고찰에 많이 노출되는 것 같네. 좋다, 이런 것도.”

나는 성연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으, 재수 없어. 누가 윤리 선생님 아니랄까봐.”

“왜, 언제는 같이 선생님 하려고 했던 애가.”
“대체 언제적 얘기야. 임용 그만둔 지는 이미 한참인데, 뭘.”

“하긴, 옆 학교로 교생 나갔다가 교직이랑 안 맞는 거 같다면서 바로 취업할 길 찾던 애한테 할 말은 아니었다. 그치?”

성연은 그렇게 말하곤 다시 물었다.

“근데 이제 와서 묻는 건데, 그렇게 애들 좋아하던 애가 왜 갑자기 진로를 바꿨던 거야?”

나는 대답 없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그 시간들을 떠올릴 때면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좋건 싫건 결국 나한텐 인생이 달라지는 순간 중 하나였다.

한때는 나도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는 선생님, 그러니까 진짜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한 달간의 교생실습은, 내 생각이 얼마나 멍청한 것이었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그동안 학생 입장에서 봐온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섣부르게 결정한 꿈은, 한낱 어린애의 망상일 뿐이었다.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신경 쓰고 돌보는 건 보통 사람이 할 일이 아니었고, 수많은 아이들이 가진 저마다의 사정을 선생님 혼자 다 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한낱 교생일 뿐이었지만, 그 고통을 몸소 느끼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어느 날, 반에서 나름 분위기를 주도하는 아이가 상담을 해줄 수 있냐면서 찾아온 적이 있었다. 별 걱정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상담을 했었는데, 상담을 시작하자 내가 얼마나 경솔한 판단을 내렸는지 잘 알게 됐다. 잘 다니던 직장에서 아버지가 그만두게 될 모양인데,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선생님에게 처음 하는 얘긴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냐고.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고민이었다.

남의 걱정을 들어주는 건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사소한 고민 따위가 아니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해결해 왔던 누군가의 고민들은 전부 그런 모양이었고, 나는 남들 고민을 잘 들어줘, 하고 자부하던 것도 결국 무지한 사람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음을 깨달았다.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에서 허울만 좋은 공감적 대화로 고민을 들어주는 건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날 그애와 어떤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 둘 중 누군가가 한참을 울었던 건 기억하고 있다. 그애는 학교를 며칠간 나오지 않았고, 나는 준비하고 있던 수업 평가를 다른 선생님에게 넘겼다. 결국 교생이 끝나고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는 취업, 사교육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마주하면서 또다시 그런 고민들을 받아들 자신이 없었다. 문득 그런 기억이 스쳐갔지만, 적당한 대답을 찾다가 애들 보기 힘들어서, 라고 변명했다.

성연은 내 속도 모르는 듯 자기 얘기를 이어갔다.

“야, 그냥 애들 하는 거 뻔하다니까. 학기 초에 쓰는 인적사항 같은 거 있잖아. 그거 읽고 또 상담 한두 번 해 주면 웬만한 거 다 알 수 있어. 그러고 나서 적당히 넘겨짚으면서 아는 척만 해 주면 좋아하는 게 애들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물론 교직을 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거나, 종이 쪼가리 몇 장 읽어 놓고 아이의 모든 걸 알고 있는 것마냥 행동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물론 학창 시절 선생님들도 아마 그랬을 거다, 라고 생각하면 측은하다는 생각과 함께 약간의 위로가 되긴 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내가 똑같이 그래도 된다는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날 나를 찾아온 그애의 얼굴을 생각하면, 다시는 교직의 길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솔직하게 아이들에게 관심을 끄고, 성적만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찌들대로 찌들어버린 어른이 되는 게 낫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의문을 거두지 않았고, 그건 성연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너 학벌도 괜찮잖아. K대 정도면 사교육에서도 나름 괜찮은데, 왜 굳이 이런 조그만 학원에서 있는 거야?”

“말해 뭐해, 조그만 데가 편해서 그래. 큰 데 있으면 스트레스나 받더라. 돈 욕심은 없어.”

성연은 내 말에 거짓말, 이라며 코웃음쳤고, 그건 사실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서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학교를 다니면서 쌓아왔던 아르바이트 경험과 학벌, 그리고 약간의 친분을 이용해 잠깐 동안 유명한 사교육에 강사로 들어가기도 했었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 언젠가 1타 강사가 되겠단 생각을 잠깐 동안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민 없이 그 꿈을 버렸다. 은근슬쩍 들어오는 스폰 제안 때문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왜 사교육에 그런 게 있느냐, 하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겪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재희 씨, 해볼 생각 없어, 하고 들어온 제안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당당하게 찾아왔다. 그래서 처음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자세한 얘기를 들은 나는 당황했다. 그 사람의 면전에 대고 꺼지라는 말을 한 후, 나를 데려온 선배를 만나 따지듯 물었다. 그녀는 아직은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하면서 미리 말해주지 않았던 걸 사과했지만, 그 말 하나가 그녀의 모든 잘못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변명 같은 그 말 뒤에 따라온 그녀의 말은, 나를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우리한테 기회라도 돌아오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돼. 지금은 나한테 이러지만, 너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알게 될 걸?”

나는 그 자리에서 선배의 뺨을 때렸고, 그날 바로 일을 그만두었다. 아직 어떤 자리는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결국 내가 이십 대에 쌓아온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그 꿈도 틀린 길이었다. 그렇게 하나 둘 이루지 못하는 꿈들은 늘어갔고, 흘러간 시간과 겪어온 일들만큼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적어졌다. 결국 조금이나마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집 근처에 있는 적당한 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는 이런 내 여정을 보고 실패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결국 나도 복잡한 사정 때문에 그나마 나은 선택을 한 안타까운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에 관심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고, 그들이 보기엔 난 그저 단편적인 패배자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슬퍼졌지만, 그런 나 또한 다른 누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재희야, 나는 아직도 네 속을 모르겠어.”

성연이 애매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 나도 그래.”

“한 번만 열어보면 안 돼?”

“제발 그래 줘. 그래야 누구 하나라도 날 이해하지.”

우린 함께 웃었다. 재미없는 꼰대 선생님도, 학벌 값 못하는 학원 강사도 같이 웃음지었다. 그와 동시에, 스무 살 초반의 성연과 재희도 미소지었다.

단풍은커녕 이제는 남아 있는 잎들도 별로 없을 때였다. 몇 주 전에 수능도 끝나고, 아이들이 줄어든 학원도 꽤 조용해졌다. 물론 내가 맡은 아이들에겐 이제 닥쳐올 현실이었다. 얼마 전 모의고사 성적표를 가져온 아이들은, 이제 슬슬 자기가 처한 현실에 대해 눈뜨고 있는 듯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은근히 긴장이 묻어나기 시작했고, 왜인지 시간이 갈수록 그애들을 보면 기시감이 들곤 했다. 그 이유가 그애들이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여기 남아 있던 한 살 많은 아이들의 얼굴을 닮아갔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와중에 은근히 성적이 떨어진 상위권 아이들을 보면서, 좀더 긴장하라는 충고를 하고는 수업을 마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원장 선생님과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예준의 성적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이 조금 넘게 얘기를 하면서, 원장 선생님은 계속 학원의 이름값을 들먹였다.

“선생님도 알잖아요, 예준이가 얼마나 우리한테 중요한지. 애 한 명 명문대 보내면 현수막에 이름 하나 걸고 일 년을 홍보할 수 있어요. 그게 얼마나 큰 건지 알죠? 게다가 예준이는 저대로만 가도 자기가 원하는 학교, 전부 골라 갈 수 있을 거예요. 차고 넘칠 정도로요.”

“네….”

“이번에 예준이 성적이 떨어진 건, 조금 아쉬워요. 아니, 많이요.”

“…….”

“그러니까 좀더 선생님이 신경 써 주세요. 공부 말고도 여러 방면으로도. 학생 스트레스 관리해 주는 것도 선생님들이 할 일이잖아요. 안 그런가요?”

이야기를 빙자한 일방적인 훈계를 한참 동안 듣고 나서, 기운이 빠진 채로 원장실을 나와서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곤 여느 때처럼 커피를 타 마셨는데, 왜인지 그날은 인스턴트 커피가 조금 썼다. 공정 오류로 커피 프림이 아마 덜 들어가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커피를 마셔야지, 하면서도 나는 다시 같은 믹스커피를 집어들고 있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말이다.

가끔씩 그런 날들이 있었지만, 다행히 매일은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쉴 수 있는 오늘처럼 말이다. 간만에 가진 혼자만의 시간은 행복했다. 문득 아이들이 생각났지만 일 생각은 하지 말자, 하면서 다시 노트북에 집중했다. 문득 바탕화면을 가득 채운 시험문제 파일과 수업 자료들을 보면서 화면이 정신없을 정도로 난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온갖 파일들을 겨우 폴더별로 정리해 두고 나서야 나는 맘놓고 넷플릭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왜인지 오늘은 미드가 당겼다. 길고 긴 고민 끝에 겨우 드라마 1화를 틀었을 때였다. 띵, 누군가에게 문자가 왔다.

선생님, 혹시 잠깐만 만나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문자를 보낸 건 예준이었다. 조금은 갑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무작정 이렇게 통보하듯이 연락하는 게 무례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 번도 이렇게 통보하듯 연락한 적 없었고 원장 선생님의 말씀도 있었던지라 마냥 무시하기에는 신경이 쓰였다. 약간의 의무감이 생긴 모양이었다. 원장 선생님 때문에 강제로 하게 됐다는 생각이 잠깐 스쳐가서 괜히 짜증이 났지만, 다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차분히 고민했다.

문득 성연과 나눴던 얘기가 떠오르면서 지금까지 만났던 아이들이 눈에 잠깐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교생 때 스치듯 마주쳤던 애들마저도. 그러고 나니 저 문자를 무시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건 그냥 직감이었다. 쓸데없이 드라마 때문에 감성적이게 되어서였을까. 그래서였을까, 나는 망설임 없이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딱히 급하게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준비하고 나가는 것도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편하게 입고 그애를 찾아갔다. 예준은 아파트 안의 놀이터에 있는 그네에 앉아 있었다.

“뭐야, 너 학원은 왜 말도 안 하고 안 나왔어?”

첫마디를 그런 식으로 내뱉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애와 얼굴을 마주하자 처음에 해주려고 했던 말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애가 이렇게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그래도 나름 많이 얘기를 해 보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만 신경쓰고 있던 결과였다. 그런 상황에 당황해서였을까, 생각과 다르게 좀더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해버렸다. 왜 불렀는지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래서인지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애는 그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와는 다른 멍한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내 눈치를 보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맥주 사 주시면 안 돼요?”

술집에 데려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마땅한 장소도 생각나지 않아서 일단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데려갔다. 후드티를 뒤집어쓴 예준은 여전히 처져 있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왠지 측은한 마음이 들어 괜히 더 잔소리를 했다. 뭐라도 먹고 싶은 거라도 고르라는 말에 그애는 아몬드나 뭐 그런 것들을 가져왔다. 나는 그 사이 주 두 캔을 집었다. 수입맥주 네 캔을 집을지 잠깐 고민했지만, 남은 걸 다시 들고 가기도 애매하고 더 이상 나갔다가는 어른으로서의 선을 넘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아무리 그래도 미성년자 아닌가. 교사 따위가 아니라는 핑계로는 딱 맥주 한 캔이 마지노선이었다.

계산을 하는 동안 키가 작은 아르바이트생은 우리를 흘깃, 하고 보더니 티가 나게 외면했다. 하필 내 뒤에 숨어 있는 그애 때문에 이 상황이 더 이상하게 보였다. 그래서 괜히 예준을 더 윽박질렀다. 어색한 분위기와 이상한 상황, 둘 중 어떤 것 때문이었을까. 편의점을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는 우리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게 더 기분이 나빴다. 내가 못 할 짓이라도 하는 건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떨쳐내었다.

편의점에서 나온 우리는 마냥 걷기 시작했다. 한강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우리는 가로등이 조금 떨어진 벤치에 걸터앉아 과자를 먼저 열었다. 살짝 매운 향이 팍, 하고 올라왔다. 과자를 뜯자마자 예준은 맛을 보기보다는 쑤셔넣듯이 그걸 집어먹었다. 과자는 하나둘씩 사라져갔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오가는 건 와삭거리는 과자 부서지는 소리뿐이었다. 그 오묘한 균형과 평화를 깬 건 내 목소리였다.

“미안, 아까 내가 많이 뭐라 해서 화났지?”

예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공백은 오히려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언제나 언어만이 대답이 되는 건 아니니까. 나는 잠깐 무안했지만 이내 다시 말을 건넸다.

“맥주 마실래?”

예준은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이 캔을 뜯었다. 칙, 김 빠지는 소리가 시원했다. 그 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애는 맥주를 목구멍에 들이붓다시피 마셨다. 술을 처음 마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살짝 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참는 것 같았다. 마치 스무 살 새내기들이 처음 술을 마시면서 꾸역꾸역 먹는 걸 보는 듯했다.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맥주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가 그애를 걱정하는 사이, 그애는 자세를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생에 없어져야 할 것 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이럴 때마다 알코올은 꽤나 도움이 되었다. 누구든 진솔한 얘기를 하는 데는 그것만한 게 없었다.

처음엔 그냥 학업 문제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어쩌다 보니 시험을 망쳤다, 이게 그애의 첫마디였으니까. 하지만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단지 시험을 망친 게 문제가 아닌 걸 알았다.

“실수를 할 수도 있고, 한두 번쯤은 그럴 수도 있을지도 몰라요. 근데 이런 식으로 합리화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아요. 저 혼자라면 괜찮았을 텐데,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의 기대가 걸려 있어요.”

그 나이에 맞지 않아 보이는 말들을 담담하게 하고 있었지만, 그애의 눈동자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당황하는 사이 그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냥…. 혼자 모든 걸 감당할 수는 없다, 그 말이 정말 틀린 게 없는 거 같아요. 그게 좋은 거든, 나쁜 거든 말이에요.”

“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애의 얘기를 끊지 않고 들어주는 것밖에 없었다.

“매일 밤, 꿈을 꿨어요. 항상 부모님은 저한테 실망했고, 전 거기에 매달리면서 이렇게 말해요. 죄송해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제발요…. 부모님은 언제나 그런 저를 뿌리치고, 저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혼자 남겨지면서 잠에서 깨요. 그 꿈만 꾸면, 잠을 다시 들기가 어려워요. 한참을 제 눈앞에 그 장면이 아른거리다, 제가 어떤 방식으로든 죽으면 그제서야 사라져요. 떨어져 머리가 깨지든, 손목을 그어서 피가 욕조를 가득 채우든지 하면요. 계속 그러다 보니까, 아무한테도 기댈 수도, 말할 수도 없었어요. 이미 저는 1등이라고 박혀 버렸고, 그 꼬리표에서 벗어나기엔 그거 하나만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누려왔으니까요. 이미 제게 남은 건 1등이라는 거, 그거 하나뿐이었어요.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버텼어요.”

그애는 목이 메는 듯 다시 맥주를 홀짝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처음으로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본 그 얼굴은, 정말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동안 그렇게 많이 그 꿈을 꿨는데, 그 수많은 꿈의 부모님들이 한 번에 저를 버리고 가는 느낌이었어요. 가만히 있으면 진짜 죽어버리지 않을까, 정말 그 상황에 빠져서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래서 도망쳤어요. 뒤에서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어요. 나가지 말라고 잡는 건지, 욕하는 건지 듣기 무서웠거든요.”

“아….”

무심코 짧은 탄식이 나왔다. 그애는 말을 잇지 않으려고 한 것 같았지만, 내 탄식을 듣고선 다시 입을 떼었다.

“그냥, 버티기 힘들었어요.”

그 한 마디에 더 가슴이 아팠다. 이미 처음처럼 가벼운 고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문득 교생 시절 본 그애의 얼굴이 예준과 겹쳐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우리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이런 고민을 들어줄 자격이 있을까, 내가 뭐라고 말해줄 자격이 있을까, 싶었다.

“용기를 내. 그게 뭐든 간에. 네가 하고픈 게 뭐든지.”

한참의 고민 끝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겨우 그 정도 말뿐이었다. 어떤 일에 용기를 내란 것도,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도 아니라, 그냥 막연히 용기를 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조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영양가 없는 말이었다. 서투른 선생님 흉내에 스스로도 어색해서였을까, 순간 얼굴에 술기운이 올랐다. 이내 부채질을 하면서 진정시키고는, 우리는 다시 과자를 집어먹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과자도, 아몬드도 이제 떨어지고 거의 식어버린 맥주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까 맥주를 더 사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걸 끝으로 더 이상 말은 오가지 않았다. 그저 바람을 맞으며 누군가 말을 꺼내길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 상황에서 먼저 말을 꺼낸 건 그애였다. 뭔가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절실하게도 들리는 알 수 없는 말투로, 그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응?”

“좋아해요.”
“응?”

당황스러웠다. 이 아이에게 나는 그리도 만만했을까.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에 머리가 잠깐 멈춘 것 같았다. 왜 그 아이가 그런 말을 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예전 그애와 예준이 다시 겹쳐 보였고, 그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그때 한 얘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도.

사실 그날, 그애도 내게 똑같은 말을 했었다.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나한텐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그때의 나는 거절하는 방법이 서툴렀고, 결국 내 거절은 우리 둘 모두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고등학생에게도 얕보이는 만만한 교생, 그게 내 트라우마였다. 동료 교생들은 나를 남몰래 손가락질했고, 그건 학교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교생 담당 선생님은 나를 불러 따로 이야기를 나눴고, 나는 그날 이후 유일하게 학생들을 상담할 수 없는 교생이 되었다. 아이들은 뒤에서 나를 욕하며 비웃었고, 나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반쪽짜리 교생은 상처만 남기고 마무리됐고, 그때 이후로 나는 아이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눈물을 흘리며 했던 다짐은 꽤나 오래 가는 듯했지만, 이번에도 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 버렸다. 내가 보였던 동정 담긴 호의가 또다시 가벼운 감정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게 너무 화가 났다. 절대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감정이지만, 그것마저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스스로에게도 화가 났다. 잠깐 울컥했던 감정을 추스르고 적어도 이번만큼은 상처받지 않겠다고 다짐하고는 입을 열었다.

“예준아, 미안해.”

나는 대꾸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 지금 당황스러워. 네가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때까지도 예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수월하게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솔직히 나도 너한테 이런 소리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냐. 나는 그냥 네 얘기 들어주려고 한 거야. 그런데 이렇게 이상한 말만 하면, 선생님도 널 도와줄 수 없어. 너도 지금 머리가 많이 복잡해서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헷갈리는 거 같아. 일단 너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미안해.”

예준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먼저 입을 연 건 그애였다.

“선생님은 다를 줄 알았어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애는 다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게 잘 해 주셨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애를 집으로 데려다 주려고 했지만, 그애는 나를 말없이 뿌리치고는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혼자서 돌아가는 길은 찝찝했다. 분명 이번엔 잘 해낸 것 같은데,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왠지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집에 가려고 대로변까지 걸어가고 있던 중에 성연에게 문자가 왔다.

저날 불꽃축제 한다는데, 같이 갈래?

문자를 보려고 꺼내든 핸드폰은 밝기 조절을 잘못했는지 눈이 부셨고, 짜증이 난 것처럼 얼굴이 찌푸려졌다. 나는 한참을 그 문자를 보고 있다가, 그냥 답장하지 않고 가만히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길에 주저앉아 울었다. 분명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별 일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은 이번에도 틀려버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흘깃, 한 번 쳐다보고는 비켜갔고, 그게 또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난 왜 항상 이런 걸까, 내가 잘못한 건 없는데, 왜 결국 내가 불편해지고 또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걸까. 결국 나는 달라진 게 없었다. 인간 박재희는 여전히 나약했고, 똑같은 실수는 흉터를 찢고 다시 깊은 상처를 내 버렸다. 세계를 구성하는 조각 중 하나가 말없이 빠져버린 기분이었고, 집에 돌아온 나는 그날 밤 스물세 살의 애송이로 돌아가 버렸다.

 

 

 

-3-

며칠 전부터 예준은 보이지 않았다. 학교는 물론이고 주말마다 자습하겠다고 나가던 학원에서조차. 선생님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애의 부모님이랑 연락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들은 자체적으로 체험학습 처리를 해 버리고 무단결석을 숨겼다. 이래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선생님들은 우리 학교가 명문이라는 걸 보여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내 앞자리는 한동안 비어 있었지만, 우리 학교의 1등은 여전히 완벽한 학교생활을 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였다.

문자를 받고 간 곳은 그애의 집에서 한참 떨어진 어느 아파트 놀이터였다. 아파트는 시간이 꽤 늦었는데도 불이 꽤 켜져 있었다. 한편 초등학생들이나 타려나 싶을 정도로 작은 그네에 앉아 있는 그애는, 왜인지 평소보다 어두워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옆 그네에 앉아 말을 걸었다.

“괜찮아?”

그애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살짝 무안했지만, 다시 한 번 말을 건네 보았다.

“학교는 왜 안 나오는 거야?”

그애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평소보다 조금 쉰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아니야, 별일 없어.”

그러면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미소를 보여주었다. 놀이터 가로등 불빛에 비스듬히 가린 미소가 왠지 슬퍼 보였다. 무슨 일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았지만, 이럴 때 물어도 그애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말 안 해줄 거지? 무슨 일인지.”

“미안.”

잠깐 동안 머뭇거리던 예준은 딱 그 한 마디만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서도 미소는 여전했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아무래도 불편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더 묻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언제나 그랬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리면, 그애는 먼저 자백하듯이 말을 해 주었다. 그게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였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미안, 얘기할게.”

“아니야, 미안할 필요 없어.”

이번에도 나는 틀리지 않았다. 나는 잠깐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예준은 애매하게 미소짓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

“재희 선생님.”

“응, 너 학원 선생님?”

“그냥, 많이 좋아했는데…. 아냐.”

“왜? 뭔데 그래.”

왜인지 오늘따라 예준이 답답했다. 제멋대로 잠수 타고 자기 좋을 대로 불러낸 것도 모자라서, 정작 그 이유는 제일 친한 나한테도 얘기 안 해 준다고. 괜히 화가 났다. 나만 그애를 특별하게 여겼다고 생각하니, 뭔가 더 화가 났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그애를 쪼아댔고, 그애는 그제서야 말을 꺼냈다. 뭐지, 내가 닦달한다고 해서 얘기해준 적은 없었는데.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잡고 그애의 말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게 얘기를 꺼낸 것치고는, 생각보다는 별 거 없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한테 의지하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았다고.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사람은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고. 그런 특별할 것 없는 얘기였다. 그리고 나로선 이야기를 처음 듣기도 하지만 그애가 애초에 이야기 자체가 너무 막연하게 시작됐다. 그래서 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일단 가만히 얘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어쩌면 자기 혼자 제멋대로 관계를 생각해 놓고, 또 혼자 상처받은 것 같았다. 어린애마냥 말이다.

하지만 얘기를 들어주면 들어줄수록, 뭔가 이상한 기분에 자꾸 빠져들었다. 한 번도 얘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인지 그날따라 말이 많은 예준이 어색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금 이 순간 자체가 어색했다. 모든 상황이 평소와 다르게 붕 떠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예준은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자기 말을 이어가기만 했다.

“그냥, 이젠 다 모르겠네. 날 믿어주던 사람들을 언제까지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어. 부모님도 그렇고, 학원도 그렇고. 난 언제까지 사람들에게 1등으로만 남게 될까. 대체 언제까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렇게 약한 친구는 아니었는데 우울증이라도 온 건가, 싶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우울증에 걸린단 것도 웃겼고, 무엇도 부럽지 않을 것 같은 예준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넌 나랑 다르잖아. 넌 안 그럴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까지도 쉬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하던 예준은 문득 내게 물었다.

“지우야, 난, 정말 1등이 아니면 의미 없는 걸까?”

그애의 질문에 머리를 뭔가 때리고 간 듯했다. 물론 내가 생각하기에도 1등이 최고라는 건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아직 학생이었고, 12년간의 우리가 쌓아온 결과를 판단하는 건 그 1이라는 숫자였으니까. 맞아, 1등? 우리 같은 학생한텐 그게 전부야. 넌 이제야 알았겠지. 지금껏 그건 무조건 네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난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그애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한 번도 그런 숫자를 받아본 적 없는 평범한 사람인 자신에 대한 얄팍한 부정이었을까, 이미 내 입에선 다른 말이 나오고 있었다.

“글쎄, 꼭 그렇지만은 않잖아. 물론 너를 너로 만드는 게 그 숫자뿐이라면 그렇지 않을까. 만약 1등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버렸을 때 너한테 남는 게 없다면 그게 맞겠지. 근데 아니잖아? 넌 그냥 너야.”

내 말을 들은 예준은 왠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고, 난 그걸 보지 못했다. 어느덧 시간이 꽤 지나 버린지라 예준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우린 버스 정류장까지 같이 걸어가면서 오래된 얘기들을 꺼냈다. 처음 봤을 때 기억 나냐느니, 같은 고등학교도 겨우 왔다느니 하면서. 그렇게라도 관계를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예준은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반 발자국 뒤에서 따라왔다. 한참을 그러다 보니 어느새 버스가 도착했다. 먼저 집에 가기 조금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라 어쩔 수 없었다. 버스카드를 찍기 전에, 나는 마지막으로 그애에게 말했다.

“참, 다음 주에 불꽃축제 한대. 나중에 구경이나 가자.”

그애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미소지었다. 아까 봤던 것과 똑같은 미소였지만, 나는 그 미소의 의미를 몰랐다.
“안녕.”

그애는 건조하게 인사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때 내가 같이 남아서 얘기를 더 들어줬더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애가 어떤 얘기를 더 할지도 몰랐었는데, 그러면 도움은 안 되더라도, 지금과는 그래도 다른 결과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언제나 후회는 남은 사람의 몫이었다.

다음 날이었다. 학교를 거의 다 와가는 중이었는데, 학원 앞이 왜인지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이지, 하고 앞을 막고 있는 사람들을 뚫고 밀쳤다. 벽처럼 서 있는 사람들이 잘 비켜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은 순순히 밀려났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예준을 만났다.

눈앞에 닥친 광경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보도블럭에 누워 있는 친구를 보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 발치 아주 가까이에는 예준이 항상 가지고 다니던 아이폰이 있었다. 박살난 액정에 차가운 피가 스며들어 색을 채우고 있었다. 어쩌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왠지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와 반대로 아직도 부들거리며 조금씩 움직이는 그애의 발이나 손가락은 이 상황을 더 끔찍하게 보이게 했다. 예상 못한 광경에 다리가 풀려버렸고, 옆에 있던 누군가가 나를 일으켜 주기 전까지는 일어설 수 없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원 선생님들도 나와서 그 모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 속에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재희 선생님이었다. 여기 내 친구는 어제 내게 저 사람의 이름을 꺼내며 자기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애를 죽게 만든 사람은, 어제와 별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여기 나와 있었다.

끔찍한 상황이었지만 어른들은 그 순간마저도 속물적인 얘기로 떠들어댔다. 지난번 모의고사에서 성적이 떨어져서 그랬다더라, 저 애 부모가 평소에 기대가 컸었는데, 거기에 부응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닐까. 평소에 스트레스 관리를 못 해서 그런 거다. 내가 저렇게 잘 했으면 죽기도 아까웠을 텐데. 죽을 용기로 차라리 견디지. 저렇게 공부를 잘하는 애도 죽는구나. 부모 돈도 많아서 공부 뒷바라지 걱정은 없었을 텐데. 명문 고등학교에 전교 1등이었는데, 서울대 의대도 갈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

죽은 사람에게도, 남은 사람들에게도 죄를 짓는 말들이 수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문득 내 앞에 서 있는 그들이 역겨워졌다. 그애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애가 죽은 것에 슬퍼하기보다는 그 성적을 아까워했고, 결국 그애는 죽어서까지 자기가 갖고 있던 숫자로만 기억되었다. 공부를 그렇게 잘했는데, 왜 저런 선택을 했을까. 누군가 말했다. 역설적이게도 그 사람은 스스로 그애가 죽은 이유를 너무나 잘 설명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어제 그애가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너는 그렇게 힘들었는데, 난 딴 생각만 하고 있었구나. 터져버린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잠깐 시끄러운 상황에 관심을 가지던 사람들은, 누군가가 부른 119가 오자 더 이상 나를 신경쓰지 않았다.

죽을 용기로 차라리 견뎌 보라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지. 용기? 말은 좋아. 결국 용기를 내서 선택한 게 저 결과였을 뿐이지. 미안해. 너랑 그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면서도, 왜 하필 그때 네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을까. 너는 그렇게 살아서, 살아서, 살아서, 또 살아왔던 거구나. 미안해.

그날 나는 학교에 세 시간을 늦었고, 내 출석부에는 어김없이 무단지각 처리가 매겨졌다.

 

 

 

-4-

예준이 학원 건물에서 죽고 며칠이 지나고서였다. 원조교제다, 선생이 유망한 애한테 꼬리친 거다, 잘사는 집 애 한번 빼먹어보려고 그랬다더라. 근거도 없는 자극적인 소문들은 언제나 그렇듯 빠르게 퍼져나갔다. 마치 그때처럼. 학원의 아이들은 물론이고 누군지도 모를 수많은 시선들은 갈수록 늘어가며 나를 죽고 싶게 만들었다. 학생을 자살하게 만든 선생님, 돈에 미쳐서 어린 애한테 꼬리친 년. 오해로 매겨진 꼬리표는 단단히 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났다. 결국 나는 단편적인 나쁜 년이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겐 그게 사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잘난 학원 이미지에 좋지 않고, 애들 교육에도 안 좋을뿐더러 학부모의 항의가 거세다는 이유였다. 원장 선생님은 부드럽게 말했지만, 결국 말하는 내용은 하나였다.

여기서 꺼져버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결국 이 모든 건 돈 때문이었고,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내 목을 죄어가는 걸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건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단지 아쉬운 거지, 라고 생각하면서 좆같은 내 신세를 탓할 뿐이었다.

그나마 해오던 일이 없어지자 스스로에게 갇혀 있는 시간은 늘어갔고, 그럴수록 나는 더 피폐해졌다. 갑자기 빠져버린 일상의 부분은 어느새 도미노처럼 나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성연에게 가끔씩 연락이 왔지만, 나는 문을 걸어잠그고 그애를 집에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씩 짧은 문자라도 해 주던 그애도 어느 순간 나에게 질려버렸는지, 조용히 그 짓을 그만두었다. 내 일상은 작은 것 하나까지 무너져갔고, 그렇게 무너진 일상은 다시 새로운 꼬리표가 되어 나를 구체적인 패배자로 만들었다.

긴 하루가 저물었지만 밤은 여전히 나를 어둠 속에 던져두었다. 창문을 비집고 애매하게 들어오는 빛이 어설픈 위로처럼 느껴져 오히려 울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잠들려고 했지만, 눈을 감으면 돌이킬 수 없는 그날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나는 미쳐가고 있었고, 가만히 방안에 처박혀 있다가는 죽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밤거리를 헤메는 건 무서웠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내 마음 속 균형을 맞추려면, 그 맞은편에 어떤 것이라도 가득 차 있어야 했다. 그게 무서움이든, 나조차도 모를 어떤 감정이든 말이다.

정신이 나가버린 것처럼 한참을 걷다가, 유명 감독의 영화에도 나온 적 있다던 어느 다리를 건너갔다. 사람들은 다리 밑에서, 그리고 내 근처에서 무리지어 모여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이 축제날이라는 것 같았다. 무리지은 사람들을 지나치면서 왠지 모를 소외감이 느껴졌다. 외따로 남겨진 나는 그들과 다른 이유로 이곳을 걷고 있었고, 그게 나를 더 슬프게 했다. 문득 올려다본 밤하늘은 이미 충분히 어두웠다. 나는 아직도 대교 위를 걷고 있었다. 무작정 밤하늘을 배경으로, 그렇게 걸었다.

어느덧 다리 중간에 다다랐는지, 양옆을 보니 내가 걸어온 만큼 걸어갈 곳이 남아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어서였을까, 내가 과연 어디서부터 걸어온 건지 헷갈렸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지금 나한테 남은 건, 내가 걸어온 시간이 만들어준 것들뿐이었으니까. 문득 펑, 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려왔다. 불꽃놀이가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동안 살면서 검정, 파랑, 빨강 하늘 말고는 본 적이 없었는데, 밤하늘에 그리도 많은 색깔이 수놓아지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자못 감회가 남달랐다. 그저 예쁘네, 하고 마냥 넘기기만도 아쉬운, 그런 하늘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오늘따라 잔잔해 보이는 강물엔 하늘이 그대로 비추어지고 있었다. 여의도 불꽃놀이는 그래서 두 배로 예쁜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꽃놀이는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나는 여전히 불꽃놀이의 시뮬라크르만을 볼 수밖에 없었다. 언제 하늘을 봐야 하는지 정도는 아는 사람이었기에, 지금 내가 그걸 볼 자격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딘가에라도 기대고 싶어 무심코 난간을 잡았다. 차가운 소름이 손끝에서 등골을 따라 올라갔다. 깜짝 놀라 손을 떼고는 다시 다리 밑을 보았다. 여전히 어둠조차 삼키고 있는 바닥이 있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를 눈치챘다. 강물 한가운데 이질적인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건 내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의 그것이 아니었고, 더 묘한 느낌이 들었다. 끊임없이 일렁이고 있는 그건 어떤 느낌인지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건 그 무언가가 정말 매혹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다채롭게 빛나며 손짓하는 그것에서 한참 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는지도 모르는 채, 잘못하면 물에 빠져버릴 것 같을 정도로 그걸 보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거기에 빠져 있다가, 곧 그게 뭔지 알고 미소지었다.

인생리셋버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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