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 가작] 그곳
[2020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 가작] 그곳
  • 김순요<인문대 국어국문학과 16> 씨
  • 승인 2020.11.30
  • 호수 1522
  • 6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A는 아주 유명한 크리에이터이자 ‘광장’의 최고 관리자다. 내가 집구석에서 《가상공간의 역사》를 읽고 요약을 하는 과제로 머리 뜯는 동안에 A는 ‘광장’의 유명한 쇼에서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여 실시간으로 코인을 쓸어 담았다. 한 번 출연으로도 내가 살고 있는 집 정도는 우스울 만큼 벌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A만 보면 배가 아픈 만성 질환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다.

내가 앉은 곳 맞은편 창문에서 뮤직비디오가 틀어졌다. 때 묻은 유리창에 뿌연 얼굴이 나왔다. 나는 아직 마시지 않은 라떼를 티스푼으로 저으며 창문 너머를 보려고 애썼다.

곧 B가 가수의 얼굴을 스쳤다. (편의상 B라고 부르기로 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사람과 완전히 딴판인 아저씨가 카페 안으로 들어오자,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B는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진짜 오랜만이네. 잘 지냈냐?”

나는 지금껏 참았던 긴장을 털어내듯 웃음을 터트렸다. B는 자리에 앉더니 멋쩍게 웃기만 했다. 그리고 침묵. 나는 먼저 말문을 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B는 우물쭈물 거리다가 내게 물었다.

“너 광장에 있는 A 알지?”

그리고 또 침묵. B는 일단 주문을 하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A와 나는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다. 먼저 말을 건 사람은 A였다.

“너 ‘광장’에 있지?”

한 번도 말을 섞어본 적이 없는 애였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A는 자기도 ‘광장’에 있다고 했다. 반갑다며 나를 잘 아는 체 했다.

“내가 ‘광장’에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내가 관상을 볼 줄 알아. 우연히 널 봤는데 ‘광장’이 얼굴에 쓰여 있더라.”

나는 반에 있는 애들 중에 한 명을 집어서 쟤는 어디냐고 물었다. 엿듣기로는 중형 공간인 ‘바우처’에 있는 녀석이었다. A는 빤히 그 애를 쳐다보더니 다음 쉬는 시간에 말해주겠다고 하고는 자기 반으로 돌아갔다. 물론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럼 그렇지. 내가 ‘광장’에 있는 걸 누구한테 들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A는 정말 다음 쉬는 시간에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내뱉은 이름이 ‘바우처’였다. 잘 모르는 곳이라 알아내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나는 A를 믿기로 했다.

‘광장’은 가상공간 중에서 가장 유명하지 않은 곳이었다. 제일 잘나갔던 ‘멀티 스페이스’는 한국에 있는 채널이 백 개가 넘었다. ‘광장’의 채널은 다섯 개였다. 나는 ‘광장’이 성공하려면 그 이름을 먼저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 없는 광장은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느낌을 풍겼다. 솔직하게 ‘쥐구멍’이라고 지었다면, 일찍이 은밀하고 으슥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11살 때 가상공간을 처음 접했다. 어머니가 사다 주신 신형 가상기기가 계기였다. 어머니는 가상기기만 있으면 모든 가상공간에 다 들어갈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 같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멀티 스페이스’만 해도 들어가려면 입장료가 필요했다. 거기에 다달이 세금처럼 돈을 뜯어갔다. 한 달 체험판으로 ‘멀티 스페이스’를 돌아다니다가 ‘결제가 필요한 구역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보았을 때 내가 얼마나 멍청한 표정을 지었을지, 그리고 밤늦게 퇴근한 어머니에게 그 내용을 전했을 때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광장’으로 이주했다. 무료 가상공간들 중 외국어로 적혀있지 않은 곳이 ‘광장’뿐이었다. ‘광장’은 군소공간으로 분류되어있었다. ‘멀티 스페이스’와 같은 프리미엄 공간보다 세 단계는 뒤떨어진 무료 공간이었다. 한 ‘멀티 스페이스’ 관리자는 군소공간들을 가상공간 대중화의 초석이라고 말하며 프리 스페이스(free space)로 묶었다. (순전히 좋은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광장’은 개발자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 때만해도 이미 수많은 공간들이 널려 있었고 개발자가 익명인 경우도 적지 않아서 여기에 관심을 두었던 사람들은 없었다. ‘광장’은 이용자를 모으기 위해 게임을 무료로 배포했다. 모두 구닥다리 게임들이었지만, 나는 그 게임들을 혼자 하면서 그런대로 잘 놀았다. 나는 친구에 연연하지 않는 시니컬한 주인공이었다.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더 많은 인원을 자기가 있는 공간으로 이주시키려는 경쟁이 치열했다. 매년 세력의 판도는 달라졌지만 대개 한 달만 지나면 반마다 유행하는 공간이 하나에서 둘로 통합되었다. 반장은 아이들이 가장 많이 있는 공간에서 선출되었다. 전교 회장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이러한 세력 다툼에서 자유로웠다. ‘광장’을 포함해서 프리 스페이스를 쓰는 애들은 영업 대상으로 껴주지도 않았다. 프리 스페이스를 쓰는 애들끼리도 영업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무료는 다 거기서 거기였다. 가상공간은 가상공간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구분이 되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가상공간 시장이 폭발적인 과도기에 접어드는 시점에 그러한 구분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

A는 ‘광장’의 게임에 슬슬 질려가던 참에 찾아온 행운이었다. A를 만나고 나서 ‘광장’에 들어갈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다. 거의 매일 ‘광장’에 들어가서 A를 만났다. 이제 게임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에 있는 다른 놈들처럼 친구를 만나기 위해 접속한다는 사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친구에 연연하지 않는 시니컬하고 멋진 주인공은 없었다. 그런 주인공은 화장실에서 괴음을 내며 볼일을 보지 않는다. 나는 장이 좋지 않아 팬티를 손수 빨아본 경험이 남들보다 많았던 아이에 불과했다.

A는 항상 ‘광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자주 A를 꾀어 같이 게임을 했다. ‘광장’은 우리 둘만의 비밀기지이자 고향이었다.

A는 ‘광장’의 아주 세세한 부분들까지 다 꿰고 있었다. 어느 날, A가 나에게 재미있는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어딘가로 데리고 갔다. 하도 봐서 익숙해진 찰흙 덩어리들과 조악한 프레임으로 이루어진 건물 모형들을 지나자 유독 반짝이는 유리 건물이 나왔다. 높이도 높이지만 정말 코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한 건물이라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건물의 외벽은 마치 거울처럼 주위 배경을 담고 있었다.

“이게 뭐야?”

“전망대”

“이런 건 처음 봐”

“게임만 하니까 그렇지”

“여기서 게임 말고 할 게 뭐 있어?”

탑 안에는 나선으로 빙빙 돌아가는 돌계단이 위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은 바깥에서도 적나라하게 비쳤다. 우리 둘은 한참 계단을 올라갔다. 중간 즈음부터 머리가 어지러웠다. 실수로 바닥에 떨어져서 처음부터 다시 올라가기도 했다. 여기는 엘리베이터도 없냐. 바로 이동할 수는 없냐. 나는 A에게 징징대면서 겨우 꼭대기에 올라왔다.

꼭대기에 오르자 유리창을 통해 내리비치는 햇빛이 너무 눈부셨다. 바닥도 천장도 모두 유리였다. 나는 살금살금 조심히 걸었다. 바깥과 안, 위와 아래를 구분할 수 없는 그곳에서 A는 갑자기 큰 구슬을 꺼냈다. 위에서 보면 오목하게 들어간 거울 같았는데, 정면에서 보면 양옆이 볼록 튀어나왔다. 햇빛에 구슬을 비추자 구슬에 반사된 여러 갈래의 빛줄기가 어느 지점에서 모아졌다. 문이었다. A는 그 문을 열어보라고 했다.

“들어갈 수 있는 거야?”

“응”

나는 잔뜩 긴장했다. 문을 열자 순식간에 주위 배경이 바뀌었다. 우주와 심해를 적절히 버무린 곳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고 숨이 막히도록 답답했다. 먼지처럼 나풀거리는 빛 알갱이들이 별자리처럼 많았다. 그 시절 ‘광장’에서 그런 그래픽 구현은 보지 못했다. A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만들었어.”

나는 믿을 수 없었다. A는 정말이라며 가볍게 손짓을 했다. 빛 알갱이들이 A의 손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게 뭔 줄 알아?”

A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나는 알갱이를 유심히 관찰했다. 얼핏 봐서는 그저 반짝반짝 빛나는 먼지 덩어리였다. 나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전부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야.”

A는 다시 아까의 구슬을 꺼내 그 위로 빛 알갱이들을 뿌렸다. 구슬 겉면에 닿은 알갱이가 안으로 녹아 들어가더니 곧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나왔다. 같이 게임을 하고 있는지 서로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의 뒤를 거대한 지네가 쫓고 있었다. ‘광장’의 것과는 다르게 무척 사실적이었다.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A가 말했다.

“여긴 ‘광장’이 아냐. 이 사람들 지금 ‘멀티 스페이스’에 있어.”

알갱이를 뿌릴 때마다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간혹 지나치게 선정적인 장면들(한번 보면 절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장면들)도 나왔다. 나는 허겁지겁 다른 알갱이를 뿌렸다. 반면에 A는 여유로웠다. 몇 번 더 뿌려보고 나서야 알갱이들의 빛깔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빛깔마다 구슬에 비추는 공간이 달랐다.

A는 자기가 빛깔들을 모두 구분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나는 회색빛 알갱이를 발견하고 그걸 구슬 위에 뿌렸다. 구슬이 비춘 것은 유리탑 꼭대기에 있는 나와 A의 모습이었다. 나는 A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만든 거야? 이 구슬은 뭐고?”

A는 기분 나쁘게 웃기만 하고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곳을 직접 만들었다는 A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나라면 자랑하는 김에 자기가 무슨 방법으로 만들었는지까지 나불거릴 텐데 A는 입을 꾹 다물기만 했다. 심지어 A는 구슬에게 그곳에 대한 내 질문을 물어보기까지 했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나는 순간 A가 나를 놀리는 것 같아서 몹시 불쾌했다.

우리는 그 탑에 자주 들렀다. 나는 A에게 구슬을 빌려달라고 끈질기게 빌었고, A는 절대 안 된다며 품 안에 집어넣었다. A가 그럴수록 나는 그 구슬을 슬쩍 하고 싶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A는 크리에이터가 되겠다고 선언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크리에이터가 되겠다며 나서는 애들이 많을 때였다. 자기들이 모두 특별한 줄 아는 나이였다. 내 눈에는 A도 그런 애들과 비슷해 부류였다.

나는 크리에이터로 성공하려면 남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알던 A는 잘사는 집 자식도 아니고, 재능이라고는 가끔 ‘아침에 비누를 씹었더니 이빨을 안 닦아도 입 냄새가 안나.’같은 헛소리만 잘하는 친구였다.

나는 속으로도 비웃고 겉으로도 비웃었다. A는 나름 머릿속으로 청사진을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A의 그림은 밝은 회색으로만 그려졌다. 어느 날에는 개인 방송을 하고 싶다고 했고, 다른 날에는 가상공간을 개발하고 싶다고도 했다. 나는 A보다 훨씬 성숙하다고 자신했다. 적어도 나는 A처럼 공부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크리에이터를 한다고 누가 알아줄까?”

나는 응원 대신에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는 7살짜리가 유니콘을 타고 돌아다니는 영상을 떠올렸다. 직접 만든 유니콘이라고 했다. 아이는 유니콘을 30분 만에 구현하는 과정을 생중계했고, 이 기막힌 영상의 조회수는 천만을 훌쩍 넘었다. 홀로그램 스크린에서 그 아이의 말투는 영락없는 7살인데, 유니콘은 정말 신화를 찢고 나온 것처럼 살아 움직였다. 아이는 한순간에 스타 크리에이터로 발돋움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 크리에이터라고 할 수 있지. 물론 그 7살은 프리미엄 공간에 있었다. 내가 그걸 언급하자 A는 심통이 난 듯 ‘광장’을 나가버렸다. 나는 그 날 하루 종일 A에게 사과와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야 했다.

광장이 지금과 같은 위상을 뽐내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일련의 과정은 언뜻 보면 우연의 연쇄작용인 것처럼 보이다가도 마치 누가 계획이라도 한 듯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처음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멀티 스페이스’에 있던 한 크리에이터였다. ‘멀티 스페이스’에서 건축가로 유명한 그는 그의 건축물이 ‘멀티 스페이스’의 화려한 효과 덕을 보고 있다는 일부의 평가에 발끈했다. 그리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프리 스페이스에서 높이가 1km에 이르는 큰 탑을 짓겠다며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다. 그의 리스트에 열여섯 가지의 프리 스페이스가 올라갔고, ‘광장’이 최종 선정되었다. 사람이 가장 적고 공간이 충분해 보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탑을 완공하는 데 5개월이 걸렸다. 원래 예상 기한은 약 2개월이었다. 그는 바벨탑을 지으면서 ‘광장’의 숨은 기능을 발견했다. ‘광장’의 진흙 같은 배경과 단조로운 음악, 일방적인 광선의 모습으로 내리쬐는 햇빛은 단지 기본 값에 불과했다. 이용자는 마음대로 ‘광장’을 꾸미고 부가적인 기능을 조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A와 자주 놀러 갔던 유리탑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것이 ‘광장’이 의도한 기능이었다. 문득 A가 절대 내어주지 않으려 했던 구슬이 떠올랐다. A는 그 구슬에게 광장의 모든 것을 물어보았다.

나는 듣지 못했지만, A는 그 답을 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건축가 크리에이터가 발굴하여 세상에 알린 ‘광장’의 무궁무진한 자유도는 입소문을 타고 새로운 유행을 탄생시켰다. ‘광장’은 언젠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변화에 빠르게 적응했다. 인구가 늘어나자 조용히 뒤에서 ‘광장’을 관리하던 ‘광장’의 시스템은 이용자들 중에서 ‘관리자’를 임의로 선출했다. ‘시스템’이 말하길, 선출기준은 ‘광장’을 사랑하는 마음과 돌보고자 하는 열의였다. 개발자는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시스템’의 음성만이 ‘관리자’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다. 대개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인 규칙들이었다.

‘광장’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가십거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신비하고 미스테리한 ‘광장’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전 세계의 학자들과 해커들이 달라붙었다. 그런데 ‘광장’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가상기지국(VBS. Virtual Base Station)은 마치 유령처럼 전 세계 오지를 떠돌아다녔으며, 심지어 마리아나 해구에 위치할 때도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사실은 세계정부의 사주를 받은 해커들이 비밀리에 조작한 것이라고 의심받을 만했다.

A도 15살에 ‘시스템’에 의해 관리자로 선출되었다. 12명의 관리자들 중 최연소였다. 작은 방송 채널에서 ‘광장’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던 A의 후원자 수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광장’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A였기에 A가 광장의 개발자라는 루머가 퍼졌다. 물론 A는 부인했다. 대신 ‘광장’의 환경을 효율적으로 조작하는 방법을 연달아 소개했다. 그리고 관리자의 이름으로 ‘광장’ 크리에이터 집단 아카(A.C.A, Agora Creator Association)를 창설했다. 어린놈의 소꿉장난에 누가 어울리겠냐는 생각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지만, 세상은 내 예상보다 훨씬 이상하게 돌아갔다. 아카는 ’광장‘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크리에이터들을 천천히 규합해 나가며 크기를 키웠다.

A가 이처럼 승승장구할 동안, 나는 공부했다. 학교에서 숙제를 내주면 하고, 시험문제가 나오면 열심히 풀었다. 내가 A와 달랐던 점을 꼽으라면, ‘~면’이 아니면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A는 분명 성공했다. 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광장’외에 다른 프리 스페이스에 있던 무명의 크리에이터들은 A보다 오래 활동을 해왔고 저마다 독특한 재능이 있었다. 나는 몇 번 그들의 작품과 활동을 보아왔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A의 성공은 원래 그들의 몫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다른 프리 스페이스에도 ‘광장’처럼 숨은 기능이 있었는지 아직 밝혀진 것은 없지만, 유명 크리에이터의 별난 기질과 독한 집념이 아니었다면 A는 여전히 ‘광장’ 구석에 있었을 것이다. A의 무명기간은 무수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A는 ‘광장’을 넘어 우리 가족의 식탁까지 침범했다. ‘광장’은 ‘멀티 스페이스’보다 먼저 일상생활 전반에 빠르게 스며들었다. 그러니까 ‘광장’뿐만 아니라 일상 어디에서나 A의 부엉이 아바타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불모지였던 ‘광장’에서 일찍이 남다른 호기심과 꾸준한 탐구를 통해 ‘광장’을 발전시킨 크리에이터. A는 그렇게 소개되었다. A를 인터뷰하는 방송마다 ‘어린 나이’와 ‘일반 직장인 연봉에 x배되는 월수입’, ‘창창한 미래’를 유난히 강조했다.

아버지는 물끄러미 식탁 중앙에 있는 홀로그램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집에서 가족이 마주 앉을 때는 홀로그램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저녁을 먹을 때뿐이었다. 이마저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눈길이 나를 향하고 있다고 착각할 만큼 아버지는 A의 인터뷰를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7살에 유니콘을 만들었다던 그 꼬마의 아바타도 A의 옆에 앉아있었다.

“제가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요. 저보다 뛰어나신 분들이 많으니까요.”

목구멍 뒤로 넘어갔던 밥알이 속에서 끓어올랐다. 채널을 돌리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컨트롤러가 아버지 쪽에 있었다. 나는 A가 무어라 하던 관심 없는 척 밥숟갈을 떴다. 그러나 A가 닭장 같은 집을 떠나 넓은 집으로 부모와 함께 이사했다는 대목에서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다른 거 봐요.”

A의 부엉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툭 던지듯 물었다.

“부러우세요?”

나는 약간의 지연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약 1.5초 만에 입을 열었다.

“부럽긴. 내 자식이 중하지.”

A의 불우한 유년기가 스크린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스크린에 따르면 A는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 여기서 A가 울기라도 하면 금상첨화일 터였지만, A는 울지 않았다.

스크린이 투명해지자 아버지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나 때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

“무슨 시절이요?”

“재능이 있는 누구나 일찍 성공할 수 있는 시절. 그런 애들이 한둘 있었지”

나는 왜 아버지가 과거형으로 얘기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시절이 있을 거였다. 기회를 놓치면 두고두고 욕먹을 시절이. 갑자기 나는 아버지가 그 책임을 은근히 나에게 돌리려 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근데 너도 쟤처럼 가상공간인지 뭔지 가지고 놀지 않았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은 다시 흐려졌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 없이 떠도는 와중에도 품에 간직했던 가상기기는 그 무렵 전원을 눌러도 작동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자식 앞에서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기에 우리 집이 어쩌다 망했는지 나는 알 도리가 없었다. 어렴풋이 듣기로는 아버지가 ‘~면’ 무언가를 하는 걸 거부하고 주체적으로 일을 벌이다 크게 미끄러진 듯했다. 어머니도 사태를 수습하다가 같이 미끄러진 것 같았다.

A와 연락이 끊긴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당장 있을 집도 없이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고 있는 마당에 ‘광장’에 들어갈 여유가 생길 리 없었다. 인터넷 통신요금도 진즉에 끊겨서 휴대폰 애플리케이션으로도 접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번화한 광장의 모습을 우연히 중고 가상기기를 기증받고 나서야 직접 마주할 수 있었다. ‘광장’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내 아바타의 외형과 고유 번호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광장’에 들어왔지만, A와 다시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원래 더 시골로 내려가려 했던 부모님은 ‘그래도 아들은······.’이라는 의미심장한 이유로 제2 수도권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거실에 식탁과 홀로그램 빔을 놓으면 남는 공간이 없는 좁은 집이었지만, 거실 옆에 있는 5평 남짓한 방 하나를 내 방으로 쓸 수 있었다.

한편 어머니는 아버지와 사뭇 달랐다. 어머니는 오랜 감식을 끝낸 조사관처럼 나를 한마디로 정의했다.

“너는 천재가 아니라 인재야.”

내가 천재가 아닌 까닭은 ‘천재’라고 부를 수 있는 나이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서인듯했다. 내가 인재인 까닭은 천재가 아닌데도 성실하게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어머니는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믿고 응원하겠다고 말했지만, 내가 A처럼 일찍 성공하리란 생각은 현실적으로 포기한 것 같았다. 대신에 내가 제대로 방향을 잡아 ‘저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 같았다.

A가 유명해질수록 A의 이름은 내게 독이 되었다. A의 아바타는 거리에서, 건물 전광판에서, ‘광장’ 입구에서 동그란 눈을 뜨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A를 볼 때마다 속이 쓰리더니 나중에는 배가 아파서 밥을 못 먹을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잊을 만하면 처음 A와 함께 유리탑에 갔던 날을 떠올렸다. 증세는 갈수록 심해져서 A를 봐도 못 본 척 피하게 되었다. 부모님 앞에서건, 친구들 앞에서건 절대 A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A처럼 되고 싶었다. 어머니의 ‘인재론’을 뒤집고 싶은 마음도 은근히 있었다. 나는 억지로라도 목표를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 교과서 테두리 안에서 책을 펼치고 과제를 하면서도 A가 어렸을 때 보여주었던 빛 알갱이처럼 고유한 빛깔로 반짝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식 이름은 가상 시나리오 기획자였다. 이런 이름이 있는지조차 몰랐지만 엄연히 향후 진로 분류표에서 ‘크리에이터’하위 항목에 있는 이름이었다. 처음 이 이름을 접했을 때, 걸출한 시나리오를 연출해서 이름을 날린다면 이 길로 내가 A와 나란히 설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뜬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나는 ‘광장’의 구석에 있는 소모임에 시나리오 기획안을 업로드 했다. 처참한 조회수를 지켜보면서 A에게 연락을 할까 고민했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 금방 생각을 고쳐먹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옛 친구의 단물을 빨아먹는 벌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A가 나를 그런 시선으로 보는 것이 싫었다.

‘광장’에 올렸던 시나리오들은 입시와 취업 중에 하나를 골라야하는 시점까지 별 소득 없이 다른 시나리오에 파묻혔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곧바로 유명 작가들을 배출했다는 대학 코스에 가입 신청서를 넣었다. 다행이도 그럴만한 성적이 되었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충당할 생각이었다. 대학에 가겠다는 말에 어머니는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별 말이 없었다.

어느 날, 의문의 발신인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자기가 A라고 했다. 나는 사칭 메일이라 생각하고 열어보지도 않았다. 10년도 넘게 연락을 안 하다가 갑자기 메시지를 보낼 리가 있나. 다음 날에도 A라고 주장하는 메시지가 왔다. 얼핏 보니 얼굴 한 번 보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조금, 아니 조금 많이 고민했다. A는 여전히 유명한 스타이자 ‘광장’의 관리자로 활약 중이었고, 나는 도서관 구석에 쭈그려 앉아 전자책을 두들기는 학생이었다. 그런 와중에 A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일주일 뒤에 또 발신자 미상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요약하면 이러했다. 자기는 정말 A인데 부탁할 게 있다. 너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으니 제발 답장을 달라.

혹시 내 시나리오를 보고 연락을 한 건 아닐까? 이 사람이 정말 A라면 나는 이걸 또 다른 기회로 활용하고 싶었다. 최근에 아카(A.C.A.)가 새로운 사업을 위해 인재를 모집 중이라는 소식이 ‘광장’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혹시 A는 나를 스카우트 하려는 게 아닐까. 얼마 전에 국제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내 후배가 입상한 이후로 조바심이 나던 참이었다.

우선 나는 정중히 메시지를 보냈다.

[확인 좀 하겠습니다. 저희 같이 다녔던 초등학교 어딘지 아세요?]

답장은 금방 왔다.

[1-34-295에 있는 xx초등학교 맞죠?]

[제 이름은 아세요?]

[C요. C아닌가요?]

[정말 A 맞아?]

[맞다니까!]

떨떠름했다. 그동안 잘 있었냐는 인사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A의 기기번호와 다른데. 설마 불법 계정이야?]

[사정이 있어. 만나서 얘기해줄게.]

그래도 여전히 의심스러웠기에 사흘 뒤 제2 신촌 대로변에 있는 한 카페에서 보자고 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공중철도로 20분 걸리는 곳이었다. 행여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하면 바로 튈 생각이었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어디에 투자를 하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거나 지저분한 일을 대신 해달라고 부탁해도 튈 생각이었다.

A는 자기도 고속버스를 타면 금방 그곳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돈을 그렇게 많이 벌었으면서 굳이 버스를 타고 오겠다는 말이 심각하게 못미더워서 약속 당일 날에도 갈지 말지를 고민했다.

약속 장소에 가는 동안에 A에 관한 기사들을 찾아봤다. 해외에도 A가 알려졌다더니 유명 뉴스 채널 여러 곳에 A의 아바타가 실렸다. 미국 채널 일간지에는 'Awesome A'라고 적힌 댓글들로 웹페이지 한 면이 도배되었다. 나만 꼴사납다고 여긴 건 아니었는지, 바로 다음 페이지에 적당히 하라는 의견이 달려 있었다.

“광장에 있는 A는 내가 아니야.”

B는 이상한 말을 했다. B는 나와 초등학교 시절을 같이 보낸 A가 맞지만, 광장에 있는 A는 아니라고 했다. 그럼 해킹을 당했냐고 물었다. B는 고개를 저었다. A와 B는 분명 같은 몸을 공유하고 있지만 다른 인물이라고, B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의 진지한 표정이 이토록 새삼스러울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몰래 카메라 아니면 사기라고 확신했다.

유행은 돌고 돈다더니. 이런 게 다시 유행인가? 나는 연기에 소질이 없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안 믿더라. 네가 A가 아니면 누구냐고. 심지어 부모님도 그래. 그래서 너한테 다른 계정을 구해서 연락한 거야.”

나는 카라멜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기껏 주문해놓고 B를 기다리느라 다 식었다. 나는 뭘 기대를 하고 바짝 긴장했던 걸까? 아니다.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A라면, 광장 채널 구석에 쳐 박아 놓은 초등학교 앨범을 우연히 발견하고 번호를 찾아 연락한 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수많은 인물들을 거치고 나서야 내게 연락을 했을 거였다. 그러니까 나는 B의 마지막 동아줄인 셈이었다. 나는 차근차근 되짚어봤다.

“그러니까 너는 내가 아는 A가 맞지?”

“응”

“근데 광장에서의 A는 네가 아니라고?”

B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답답하다는 듯 앞에 있는 골든 오렌지 주스를 들이켰다. 카페에서 가장 비싼 한 잔이 순식간에 빈 잔이 되었다. 한 모금만 마셔보려고 부탁할 순간을 재고 있었는데, 그런 식으로 다 마셔버릴 줄은 몰랐다.

다시 보니 B의 눈 밑이 퀭했다. 많이 피로해보였다.

“너 많이 피곤해 보인다.”

“요새 잠을 못 자.”

B는 정신과의원에서 약을 타 먹고 있다고도 말했다. 정신분열증세가 의심된다는 소견을 들었지만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나는 B가 폐인으로 전락한 꼴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말없이 카라멜 라떼만 홀짝 거렸다. 더 해줄 말이 없었다. 빨리 몰래 카메라가 끝나길 바랐다. 갑자기 B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너 초등학교 때 봤던 구슬 기억나?”

“구슬?”

“네가 틈만 나면 빌려달라고 했던 구슬.”

“어······, 응.”

“그게 원인인 것 같아.”

B는 살짝 흥분한 것 같았다. 그 구슬을 기억하고 있는 걸로 보아 정말 내가 아는 A가 맞는 것 같았다.

“내가 널 만나기 한참 전에 ‘광장’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그걸 주웠거든. 너도 알다시피 엄청 신기하게 생겼으니까. 근데 안을 들여다보니까 내가 그 구슬 안으로 빨려 들어가더라고. 나중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는데, 그 뒤로 ‘광장’에 들어갈 때마다 머리가 아팠어.”

카라멜 라떼 세 모금 째. 언제부턴가 카페의 배경음이 잔잔한 재즈풍으로 바뀌었다. 음을 따라 천장의 물결 조명이 움직였고, 물결을 따라 카모마일 향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구슬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너한테 보여줬던 유리탑도 다 그렇게 만든 거야. 내가 하고 싶은 걸 떠올리면 구슬이 다 알려줬어. 여차하면 구슬이 대신 내 몸을 움직였지.”

“계속 그랬어?”

“처음엔 내 몸만 조종하더니, 나중엔 내 행세를 하더라. 목소리, 표정, 말투까지 모조리 다. 이게 무슨 느낌인 줄 알아?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는데,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

네 모금 째. 입이 텁텁해지기 시작했다.

“마냥 좋았던 때도 있었지. 엄청 유명해졌잖아. 근데 이제는 주도권이 나한테 안 와. 내가 ‘광장’에 들어가지 않아도 혼자서 방송하고 쇼에 출연하고 사업하고 할 짓 다해. 누가 봐도 A라고 할 만큼 똑같이.”

B는 줄곧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뒤편에 있는 것이라곤 아무런 무늬도, 조명 효과도 없는 밋밋한 벽뿐이었다. B의 눈이 도대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이젠 A가 누군지도 모르겠어.”

B의 말에 공감했다. 슬슬 결론을 내릴 때였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일단 광장에 있는 걔를 만나서 대신 전해줘. 너는 누구냐고. 제발 꺼지라고. 그래도 안 되면 내 옆에서 증인을 서줘. 그 악령 같은 새끼를 사람들한테 알려야지. ‘광장’의 시스템도 모르고 있는 눈치야.”

“A가 워낙 유명해서 만나기가 어려운데.”

“걔한테 메시지 보내서 나랑 실제로 만났다고 해. 그럼 만나줄 거야. 내 추측이지만, 걔도 나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B를 다독이며 알겠다고 말했다. 덩치도 남산만 한 애가 훌쩍이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짠했다. 근데 초등학교 때는 나보다 키가 작았는데, 언제 훌쩍 컸는지 모르겠다. B가 진정이 되고 나서 우리 둘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주거니 받거니 담소를 나눴다. B는 A가 번 돈으로 호강을 누린 걸 언급하길 꺼려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말을 들어보니 할 건 다했다. 호화여행도 숱하게 다녀온 모양이었다.

카페 앞에서 헤어지기 전에 B는 꼭 다시 연락을 달라며 자기 번호를 알려주었다. 정말 진심으로 부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걱정 말라며 조심히 들어가라고 말하고, 돌아가는 길에 B의 번호를 지웠다.

B가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은 이미 정해져있다. A를 ‘광장’에서 지우는 것이다. B가 결단만 내린다면, ‘광장’의 시스템은 조용히 A를 지워줄 것이다.

하지만 내가 A를 지우라고 슬쩍 운을 띄울 때마다 B는 화제를 돌리기 바빴다. 내 생각에 B는 A를 지우는 대신 A를 되찾아오는 방법을 원했다.

그 날 나는 오래 묵은 때를 벗긴 듯 홀가분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를 구원하기 위해 일부러 B가 나에게 연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선 나부터 지금 ‘광장’에 있는 걸 지우고 새로 만들기로 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바꾸고 오래도 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