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오늘 진짜 퇴사”
[장산곶매] “오늘 진짜 퇴사”
  • 이예종 편집국장
  • 승인 2020.11.30
  • 호수 1522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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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예종<편집국장>

신문사 홈페이지에 실어둘 좌우명을 자유롭게 써오라는 말에, 장난스레 적어뒀던 나의 좌우명은 ‘내일 퇴사’였다. 나에게 내일이라는 것이 참으로 늦게 왔는듯 싶다. 2년이 돼가는 오늘에서야 겨우 내일에 다다른다. 끝 무렵임을 직감한 뒤, 이제 한 단어는 붙이고 한 단어는 바꿀 수 있다. ‘오늘 진짜 퇴사’. 

더 이상 한대신문사에서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 무언가를 쓸 수 없고, 더 이상 같은 마음으로 행할 수 없다. 어딘가 쨍하게 아려오긴 하는데, 단언컨대 후회는 아니다. 아마 그 이유는 내가 소화되지 않을 만큼 버찌를 우악스럽게 집어삼켜온 조르바로 걸어왔기 때문이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 창조를 위해 파멸도 마다하지 않는 차라투스트라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쭉 돌이켜보니 ‘기사’라 부르는 글자 뭉텅이만 나홀로 쌓은 것이 40개가 된다. 그만한 기사들을 뜯어 고치는 과정을 지나서 잉크로 찍어내 지워지지 않는 글자들만 수만 개에 달한다. 멀리서 바라보니 까만 것은 글자고 하얀 것이 배경이다. 마치 수십번의 대국을 치룬 것만 같다. 이 기사들이 지금은 차갑게 식어버려 더이상 읽는 이 하나 나오지 않는, 생을 다한 곤마(困馬)로 느껴지긴 하지만, 언젠가 옛날엔 분명 따뜻했던 날이 있었던 녀석들이다. 원고들을 다시 쓰다듬고 복기하며, 행간에 묻어있는 기억을 되짚는다. 대개 행간은 독자가 읽어내는 것이지만, 재밌게도 내가 쓴 기사의 행간만큼은 어떤 독자도 읽을 수 없다. 오로지 나만 읽을 수 있는 암호문이다.

냉난방 아이템을 받아쓰면서 취재를 위해 도착한 인터뷰 장소 앞에서 어색함에 혼자 서성이던 내가, 노천카페에서 처음 보는 학우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가서 인터뷰를 해달라며 초콜렛을 건내던 내가, 학교 건물 수십 동을 발로 뛰며 부서진 천장의 석면 사진을 찍던 내가, 추레한 옷에 조명도 받지 못하면서 고려인을 위해 빛을 내는 박사의 옆에 서있는 내가, 학교 인터뷰이로부터 ‘왜 그런식으로 제목을 썼냐’는 핀잔을 듣는 내가 행간 속에 담겨있다. 어떤 독자도 알 수 없는, 가혹하게 외로웠던 취재의 순간들이 쌓여져 있다. 

이처럼 행간을 읽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마 ‘당신이 달을 보기 전까지 달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냐’는 아인슈타인의 질문에 적어도 오늘 이 글에선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내가 쓴 글을 마주하고 돌아볼 때만 존재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며, 오로지 나만이 느끼고 부여할 수 있는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 신문사에 있는 우리의 글은 누군가에게 읽혀야만 존재 가치가 있음을 부정하진 않겠다. 내 글이 누군가에겐 단지 땔감일뿐인 죽은 나무껍질 가공품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도 동의한다. 

그렇지만 자신만은 이 기사에 어떤 혼이 실려있는지를 안다. 최소한 자신에겐 기사가 죽은 나무껍질이 아니라 생명을 움트게 하는 영구적인 토양이 될 수 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것이라 단정하고 자신의 내딛음에 혼을 싣지 않는다면 이곳은 무의미하며 삭막한 황무지가 돼버린다. 그래서 이 과정은 글의 영역이라기보단 삶의 영역에 해당한다. 필자는 치열했던 2년을 지나왔다. 아주 긴 시간이었지만 짧은 시간이기도 했다. 필자가 신문사에서의 시간을 삶이 아니라 글로만 점철해 왔다면, 아마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와 도돌이표를 찍었으리라. 이제 필자는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마지막 기사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종이를 꺼내어, 새로운 문장의 첫 단어를 생각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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