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혐오의 혐오 시대
[칼럼] 혐오의 혐오 시대
  • 장소연<일반대학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17 졸업> 동문
  • 승인 2020.11.30
  • 호수 1522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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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연<일반대학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17 졸업> 동문

우리는 혐오의 혐오 시대를 맞이했다. 혐오라는 단어조차도 혐오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혐오와 차별에 관련된 내용을 접하기만 해도 피로감이 느껴지고, 이를 반대한다는 내용을 말만 해도 프로 불편러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혐오는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왜 그렇게 혐오를 혐오하면서도 우리는 혐오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미디어의 발전으로 우리는 초 단위로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있다. 생각의 재료가 무궁무진하게 많아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 독이 된 듯하다. 

넘쳐나는 재료들 사이에서 자극적인 재료들만이 쉽게 눈에 띄며, 우리는 사유할 새도 없이 그것들을 섭취하고, 소화하고, 배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섭취한 혐오라는 재료는 우리의 속을 답답하고 불편하게 만들며 분노만을 남긴 채 소화되어 또 다른 혐오로 다시 배출된다. 이로써 우리는 정신적 변비를 앓게 된 것이다.

여기서 이어지는 문제는 우리가 정신적 변비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정신적 변비란, 스스로 감정을 알아차리고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 표현 불능증을 의미한다. 하지만 필자는 심리학 관점이 아닌 미디어 환경 속에 놓인 우리의 한계를 정신적 변비라는 용어를 통해 비유해 보았다. 

각종 미디어에서 생산되는 무분별한 혐오 조장 글들은 이해와 공감을 배제한 채 분노라는 감정만을 우리 몸에 차곡차곡 쌓이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원래 가졌던 생각인 마냥 굳어지게 되는 것이다.

가령 소위 판춘문예라 불리는 네이트판의 이야기들은 그곳에서만 공유되지 않고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을 통해 재가공되어 끊임없이 퍼지고 있다. 이로 인해 어느 개인의 문제가 성별, 세대, 지역, 종교, 이념, 소수자 등 집단 전체의 문제로 치환되어 혐오를 조장하게 된다(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에게 남성은 잠재적 성범죄자, 엄마는 맘충, 기독교인은 개독, 노인은 틀딱충이 됐다). 

심지어 온라인 공간을 넘어서 언론을 통해서도 가짜 뉴스들이 보도되며 집단 간의 이분법적 혐오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러한 편 가르기 식 논쟁은 더욱더 인과관계를 파악조차 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무력감을 안겨줄 뿐이다. 결국 우리는 편리하게 내가 속한 집단의 정당성을 확고히 하려는 분노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도 정신적 변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다. 다수의 의견에 쉽게 휩쓸리기도 하며 어느 집단을 옹호하기도, 비난하기도 한다. 미디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개인으로서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패러다임의 전환은 다수의 동의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다. 혐오를 조장하는 집단은 이 과정을 뛰어넘고 변화를 이뤄내길 주장한다. 또한 반대 의견을 가진 집단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결함이 있는 집단으로 치부하기도 하며, 중립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방관자로 매도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혐오에 맞서기 위해 혐오로 대응하는 방식은 우리 사회를 더욱 병들게 할 뿐이다. 변화를 이뤄내고 싶다면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갈등을 부추기는 언론인들도 자성해야 한다. 개인의 노력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디어에 넘쳐나는 혐오에 지쳐버린 우리는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고 인과관계를 무시한 의견에 좌지우지되는 사유 표현 불능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혐오를 혐오하지 않는, 문제를 직시할 수 있는 사회를 끌어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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