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소개-철학이란 무엇인가
신간 소개-철학이란 무엇인가
  • 취재부
  • 승인 2006.09.24
  • 호수 15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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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쿠바를 둘러싼 미·서(스페인) 전쟁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의 평범한 한 나라로 남은 스페인은 자신들에게 가장 적합한 정치, 경제, 사회, 삶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다양한 제도를 받아들여 시험하였지만 그 과정은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의 연속이었다.

미겔 데 우나무노, 아소린, 피오 바로하,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등으로 대표되는 스페인의 98세대는 15세기 지리상의 발견 이래 사백 년 동안 지속된 대제국의 몰락을 눈앞에서 보면서 두 가지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했다.

 다 뭉개진 자존심이나마 되살려 과거를 발판으로 위기를 극복하든가, 아니면 이전 자신들을 둘러싼 모든 것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국가와 정신세계를 창조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 책은 제국의 영광을 뒤로 한 스페인이 대혼란을 겪던 1929년, 마드리드 대학에서 시작되었던 오르테가의 강의를 모아 엮은 것이다. 스페인의 대표적 지성, 오르테가가 빛바랜 조국의 영광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삶의 풍경을 이끌어내고자 스페인 철학사상 처음으로 대중 철학 강의를 연 것이다. 당시 이 강의는 그야말로 전국적 화제였다고 한다.

철학과 교수 및 학생, 문인, 군인, 정치인, 일반 공무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이 강의를 위해 몰려들어 이들을 수용할 공간을 구하느라 오르테가가 애를 먹었고, 퇴근 후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강의를 직장인 퇴근 시간에 맞추어 달라는 편지가 빗발치는 등 이 강의를 둘러싼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아직도 스페인 지성계에 하나의 전설로 남아 있다.


알베르 카뮈로부터 ‘니체 이후 유럽 최고의 철학자이자 문장갗라는 찬사와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정신적 스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그의 가장 큰 미덕은 무엇보다도 그 내용의 풍부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 특유의 지적 전통과 엄격한 독일 철학의 세례를 동시에 받았던 오르테가의 사상은 우선 근대 이성중심주의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난다. 이 책은 바로 오르테가의 근대 철학에 대한 비판과 그것을 대체할 오르테가의 사상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표적 저서로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강부터 6강까지 오르테가는 우리가 왜 철학을 하는지, 인식, 정신, 사유, 우주 등 철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의 근원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고대 그리스와 중세 철학이 지니는 한계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근대 철학이 태동하게 되었는지를 검토한다. 일반적인 철학서와 달리 우리의 습관적인 사유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에서 이 책은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본격적인 근대 철학에 대한 비판은 7강부터 시작된다. 근대 철학의 토대는 주체, 즉 사유하는 자아에 대한 신념이었다. 자연 혹은 세계는 인식의 이차적 수준으로 격하되었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이성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믿음에 따른 이성중심주의 형이상학이 전개된 것이다. 이에 대해 오르테가는 세계의 의미를 복원한다.

즉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과 자연은 결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과 공간에 따라 지속적으로 생성, 변화하는 존재로서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실재라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나와 나의 환경이다.”


이 책은 강의록이다. 강단에서의 강의가 아니라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강의를 모아 놓은 강의록이라기엔 다소 난해하지만, 대제국이었던 조국의 쇠퇴를 눈앞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한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자의 창조적인 변화에 대한 열망이 생생한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천 년 서양 철학사를 꿰뚫고 있는 저자가 마침 내 앞에서 직접 철학이란 무엇인지, 왜 우리가 철학을 해야 하는지를 친밀하게, 그리고 격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을 접하면서 독자들은 자신의 삶 자체가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새삼스레 깨닫게 될 것이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정동희 옮김/민음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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