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정의로운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취재일기] 정의로운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 맹양섭 기자
  • 승인 2020.10.12
  • 호수 1519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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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양섭<문화부> 정기자

“지원자께서는 이번 한대신문 82기 수습기자 모집에 최종합격하셨습니다”

한대신문 82기 수습기자 2차 모집 마감을 2일 남겨둔 지난 5월 11일까지도 필자는 한대신문 지원을 망설였다. 마감 전날까지만 해도 학교 공부나 똑바로 하자는 마음으로 지원을 포기했지만 마감 당일, 어떤 이유에선지 지원이라도 하자는 마음이 들어 수습기자 지원서를 써 내려갔다.

면접에 응시하려면 5월 16일에 서울캠퍼스 학생회관 4층으로 오라던 문자는 또한번 갈등하게 했다. 코로나19로 학교에 가보지 못했는데 수업을 듣기 위해서도 아닌 신문사 활동을 위해 지방에 살던 필자가 기숙사에 입사한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주객전도였다. 특히 면접날은 두 강의의 중간고사 과제를 제출해야 했다. 이때부터 필자는 무모한 여정에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면접날 새벽에 과제 초고를 작성하고, 오가는 KTX에서 수정과 퇴고를 거쳤다. 남들이 보기엔 버라이어티한 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모두를 잃는 위험한 상황이었을지 몰라도 필자가 도전한 이상 어떤 것도 포기할 순 없었다.

험난한 모험은 정기자가 돼도 끊임없다. △방중회의 첫날부터 지갑을 분실해 경찰서에 간 날 △전문가에게 섭외 메일을 발송했지만 답장이 없던 곤경 △말을 더듬으며 취재할 때 △날이 샐 때까지 데스킹이 계속되어 신문사에서 잠든 경험, 그리고 기자의 시선을 쓰는 지금까지도 말이다.

이번 호 기사를 쓰면서 전시회 「퓰리처상 사진전」은 저널리즘에 발을 내디딘 필자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특히 사진작가 케빈 카터의 「수단 아이를 기다리는 게임」은 정의가 무엇인지 고뇌하게 만든다. 굶주림으로 쓰러진 소녀와 아이의 죽음을 기다리는 독수리를 발견한 카터는 멋진 사진을 위해 20분간 지켜봤다. 셔터를 누른 카터는 곧장 독수리를 쫓아내고 소녀를 품어 보급소로 갔다. 그 사진은 기아의 실태를 알려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지만, 카터가 아이를 방치하고 명성을 우선했다며 독자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많은 비난 속에 카터는 퓰리처상을 수상한지 얼마 되지 않고 세상과 작별했다. 카터는 전염병으로부터 현지인을 보호하기 위해 현지인에게 접근하면 안된다는 기준을 준수하고자 소녀에게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던 것이다. 독자에게 ‘정의(正義)’란 아이를 빨리 도와줘야 하는 것이지만, 카터에겐 아이에게 접근하지 않는 것이 정의인 것처럼 서로가 받아들이는 정의엔 차이가 있었다.

고등학생 땐 ‘정의로움’만을 꿈꿨던 필자의 생각은 점점 바뀐다.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적 통념이 되며, 그것은 정의와 비정의의 경계를 구분 짓는 사회적 구속이 되고 만다. 우리는 정의에 몰두해 비정의를 맹렬히 비난하지는 않았는지 성찰해야 한다.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정의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수습기자 지원서에 옳음과 그름의 경계를 허물고 싶다고 말한 것처럼 이제 필자는 ‘비판하는’ 기자가 되고 싶다. 때론 무모하고, 험난한 길을 걸을 수도 있다. 그래도 어떤 것이든 도전하고, 포기하지 않는 기자가 되고 싶다. 이 마음 그대로 한대신문에 남아있는 마지막 그 날까지 무엇이든 닿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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