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섬, 선감도의 진실을 파헤치다
비밀의 섬, 선감도의 진실을 파헤치다
  • 이세영 기자
  • 승인 2020.09.20
  • 호수 1517
  • 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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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 피우지 못한 아이들이 끌려와 굶주림과 중노동에 시달려 죽고, 탈출하다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던 곳. 1942년 4월, 처음으로 200명의 소년을 수용, 이후 제5공화국 초기인 1982년까지 40년 동안 선감학원이 운영되면서 약 4천691명의 소년이 생활하던 곳. 이곳은 바로 대부도 끝자락에 위치한 '선감도'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남쪽으로 25㎞, 대부도에서 동쪽으로 32㎞ 지점에 있는 선감도엔 일제강점기 시절 문제의 선감학원이 있었다. 선감도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손가락이지만 그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선감역사박물관 1층에 전시된 사진들이다.

어린아이들이 겪은 비참한 수용 생활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 말인 1941년 10월, 조선총독부 지시에 의해 교육기관으로 세워졌다. 당초 설립 목적은 부랑아를 교화시키고 번듯한 사회인으로 양성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원생들은 기본적인 교육도 받지 못한 채 강제노동에 동원됐으며 갖은 폭행에 시달렸다. 정진각<안산 지역사연구소> 소장은 “말이 통해야 하니까 아침에는 일본어를 가르치고, 오후에는 전부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게 했다”며 “아이들에게 ‘천황 폐하의 영광스러운 군인이 되자’는 황민화 교육까지 했다”고 전했다. 이렇게 세뇌 교육을 한 뒤 건강해 보이는 아이들을 탄광으로 데려갔고, 거기서 더 성장하면 군대로 내보냈다. 이처럼 선감학원은 ‘태평양 전쟁’에 한창이던 일본이 총알받이를 비롯해 각종 전쟁물자 등을 생산하기 위해 기본적인 인권조차 박탈한 소년 강제 수용소였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부랑아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어 경찰이 부랑인으로 규정하면 아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부랑인이 됐다. 복장이 남루한 아이들을 데려가 교육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정 소장이 보여준 자료에 따르면 당시 수용됐던 4천600여 명의 아이 중 절반 이상은 고아도 부랑아도 아니었다. 아이들은 길에서 막무가내로 경찰이나 공무원들에 의해 ‘수집’됐다. 정 소장은 “천진난만하게 웃고있는 아이들 사진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며 “어른이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해서 따라가고, 처음으로 배도 타보고 바다도 보니까 무척 좋아했을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선감’이라는 지옥도에서 아이들은 견디다 못해 탈출을 시도했지만 갯벌이나 바다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정 소장은 “선감도는 지금과 달리 고립된 섬이었기에 썰물 때 갯벌이 육지처럼 보인다”며 “건너 갈만한 거리인 것 같아도 빠져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죽은 아이들은 누군지, 어떻게 죽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해방 이후에도 선감학원에선 아이들의 인권유린이 계속됐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가 폐망하면서 경기도가 선감학원을 인수했고 1982년까지 부랑아 보호시설로 운영했다. 김민환<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는 “일제가 조선인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고자 상시로 감시하고 처벌하는 체제는 해방 이후 군사정권시기의 통치방식에도 그대로 유용한 것이었다”며 “부랑아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화원과 같은 수용시설들은 그런 체제 유지와 강화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도구로 활용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서서히 드러나는 국가폭력의 실체
선감학원의 비극은 한 일본인의 용기 있는 고백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본인 이하라 히로미쓰 씨는 선감학원의 참상을 세상에 처음 알린 인물이다. 아버지가 선감학원 부원장으로 발령나면서 당시 8살이었던 이하라 씨도 3년간 선감도에 머물렀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뒤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그곳에서의 기억을 좀처럼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속죄의 마음으로 40년에 걸쳐 선감도의 이야기를 적었고, 1989년에 도서 「아, 선감도」로 대중에게 공개했다. 정 소장은 “이하라 씨가 아니었으면 이 비극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4년 5월 29일, 선감학원 위령비가 경기창작센터 창작스튜디오 2동 옆 공터에 설치됐다.

선감도에도 봄이 오길
다행히 최근에 정치권에서 아픈 역사를 치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 법률안(이하 과거사법)’이 지난 5월 20일 국회를 통과한 가운데 경기도가 선감학원 아동인권침해 피해를 적극 발굴해 진실 규명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이번 개정안은 2006년부터 4년간 활동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를 다시 구성해 일제강점기 후 제5공화국 시까지 이뤄진 인권침해 사안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도록 하는 것이 취지다. 오는 12월에 진실·화해위원회가 재가동됨에 따라 ‘선감학원사건 피해자 신고센터’는 진상조사에 필요한 피해사례를 최대한 수집할 방침이다. 

하지만 정 소장과 김 교수 모두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전한다. 정 소장은 “국가차원에서 당시에 부랑아 단속의 잘못된 점과 운영 자체가 법적 근거 없이 자의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명백히 밝히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김 교수는 “국가가 피해자에게 배상을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며 “다크투어리즘의 중심인 선감 평화공원 설치 같은 현실적인 해결책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정 소장은 “피해자의 보금자리 쉼터 조성과 생활 안정지원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피해 생존자 중 상당수는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기초 수급자들로 힘든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고 전한다. 잔혹한 국가 폭력의 결과물인 선감학원. 이 사건의 피해는 오롯이 피해자들의 몫으로 남게 됐다. 50년이 넘도록 국가에게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못 받은 피해자들, 그들을 위해 선감학원에 대한 진실규명이 제대로 되길 기대한다.

도움: 정진각<안산 지역사연구소> 소장
김민환<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이지양 수습기자 liu1535@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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