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나의 존재가 어색하지 않다면
[취재일기] 나의 존재가 어색하지 않다면
  • 배준영<대학보도부> 정기자
  • 승인 2020.08.28
  • 호수 1515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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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준영<대학보도부> 정기자

단 한 번도 ‘기자가 되겠다’는 목표나 꿈을 가져본 일이 없다. 개인이나 국가의 운명을 뒤바꾸거나 그에 준하는 위력을 갖춘 사건·사고를 보도하는 일은 필자의 관심 밖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현대인의 시선이 미처 다 머물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놓인 옛것을 탐미하는 ‘역사학자’의 성격에 가깝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실을 조명하고, 시의성에 얽매이는 ‘기자’의 성격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한대신문에 입사하게 된 것은 ‘영웅’이 되고 싶어 자처한 일이었다.

필자가 수강한 철학 강좌의 교수는 마키아벨리의 역작 「군주론」의 한 대목을 다음처럼 해석했다. 행동의 성공은 비르투(Virtu)와 포르투나(Fortuna) 사이에서 결정된다. 비르투는 자신의 운명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는 능력이다. 포르투나는 그야말로 운명의 수레바퀴이며 우리가 대범하게 맞서야 하는 운이다. 비르투를 통해 포르투나에 맞설 줄 아는 자는 영웅으로 성장한다.

주어진 모든 것을 걸고서 ‘우연’ 또는 ‘운’, ‘운명’의 이름으로 스쳐갈 모든 것과 대면하는 일, 그것은 기자의 자세와 사뭇 닮아있다. 역사학자가 스쳐간 역사를 해석하고 자신을 그 해석의 연장선에 편승시킨다면, 기자는 스쳐가는 역사의 중심에 서서 운명과 끊임없이 투쟁하는 존재다. 전자는 지난날의 운명을 바르게 이해하고자 노력하지만 그것을 결코 바꿀 수 없는데 반해, 후자는 운명을 거부할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동적인 시대를 포착하는 일은 정적인 채 남겨진 시대를 거스르는 일만큼이나 매력적인 일인 듯싶었고, 그에 이끌려 필자의 기자 생활은 시작됐다.

그렇다면 정기자의 직위를 얻기까지 4개월여의 시간을 뒤로한 채 필자는 무엇을 사유했는가? 부단히 고민해 왔던 것은 ‘무엇을 쓸 것인가’라기보다 ‘어떻게 쓸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기자에게 중요한 사명 중 하나는 ‘주관적 가치’를 바탕으로 ‘객관’을 지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판단은 독자의 몫’이란 말은 객관이 주관을 버텨내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자 최후의 보루다. 무책임해 보이는 말이라도, 기자는 판단하는 존재가 아님을 아는 까닭에 그것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는다.

“한대신문의 독자가 창조적 지성인으로 발돋움 할 수 있도록 조력자가 되고 싶다”던 필자는 퇴보하거나 정체되지 않도록 보폭을 키워 내디딘다. 한 걸음 앞이 낭떠러지 같은 추락하는 현실일지라도, 그곳에 필자의 존재가 어색하지 않게 어울린다면 결코 현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이문열은 썼다. “우리에게 가장 오래 남는 것은 행복한 날을 꾸몄던 보석이나 꽃다발이 아니라 괴로움의 날에 받았던 상처의 흉터”라고. 필자가 걸어왔고 또 걸을 ‘기자’의 길이 험난할 것임을 직감한다. 절망이 밀려와 포기를 다짐해야 할 순간에도 필자의 비르투는 끊임없이 포르투나와 맞설 것이다. “절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정열”이라던 이문열의 말을 다시 한번 빌려 짧은 소고(小考)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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