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도둑맞은 불행
[장산곶매] 도둑맞은 불행
  • 오수정 편집국장
  • 승인 2020.05.10
  • 호수 1511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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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정<편집국장>

 

“나는 상훈이가 가난을 훔쳐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은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박완서의 작품 ‘도둑맞은 가난’ 속 일부 대목이다. 작품 속 가난한 주인공은 남자친구 ‘상훈’이 실은 부잣집 아들이었고 가난을 잠시 ‘체험’하러 온 것을 알고 절망한다. 

수 십년 전 작품이지만 우리는 현재에도 ‘상훈’처럼 가난의 실상은 외면한 채 자신의 이익을 더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난을 이용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이달 8일 한 패션브랜드는 ‘기생충’과 콜라보레이션 제품 출시를 예고했다. 그러나 제품 출시에 앞서 공개된 화보가 일부 SNS 상에서 논란이 됐다. 화보의 배경이 기생충 영화 속의 ‘반지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가난도 힙함이 됐다’며 ‘실제 가난의 모습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누군가의 삶을 전유하고 치장’한다고 비판했다. ‘반지하’가 내포하는 가난이라는 실상은 외면한 채 단순히 영화 속 분위기를 따라하고, 멋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난을 이용한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도둑맞은 가난’의 현실판이라고 표현했다. 

이뿐만 아니다. 과거 한 연예인이 일상을 공개하는 프로그램에서 보여줬던 모습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연예인은 지하실에 살며 상가 공용 화장실에서 찬물로 샤워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가난한 아티스트’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사실 그가 부유한 집안 출신임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가난’을 팔아 돈을 벌었다고 비판했다. 

또한 일부 대학생들은 국가 장학금을 받지 못한 억울함에 가난을 호소하기도 한다. 국가장학금 소득분위를 두고 ‘난 가난한데 왜 소득분위가 높냐’는 것이다. 가난함을 증명해야만 국가장학금을 받는 시스템으로 인해 본인은 가난하다고 느낌에도 소득분위가 높아 장학금을 받을 수 없는 것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가난으로 등록금조차 낼 수 없는 학생이 장학금을 받는 것을 두고 ‘가난이 벼슬’이라며 투덜대기도 한다. 실제 소득분위 책정에 논란이 많지만 대개는 본인이 장학금을 받지 못할 만큼은 부유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들은 가난의 타이틀을 뺏어 본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가난만 빼앗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타인의 고립을 자신의 삶을 빛내는 데 이용하기도 했다. 최근 ‘도둑맞은 아싸’라는 말이 신조어가 유행했다. 이는 유튜브에서 ‘아싸 브이로그’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시작됐다. ‘아싸 브이로그’에는 자신을 ‘아싸’라고 자칭하는 크리에이터들이 혼자 밥을 먹거나 수업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실제로는 교우 관계가 원만한 사람들이 ‘아싸’ 흉내를 낸다며 ‘타인의 고통을 콘텐츠로 소비하지 말라’고 비판했다. 누군가에게는 실재하는 고통일 수 있는데도 유행하는 패션처럼 그들의 정체성을 입고 버린다는 것이다. 특히 “인싸들이 고독함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해 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인맥과 친구만으로는 성이 안 차, 외로움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삶을 한층 더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는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의 대목을 인용한 이 글이 많은 공감을 받기도 했다. 우리가 그동안 ‘아싸’를 사회부적응자라며 희화화해왔는데 이를 ‘자신의 삶을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 정도’로 삼고 있는 것에 분노한 것이다.

가난과 고통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본인이 가난과 고통을 전시할 때 더 가난하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도둑맞은 가난’ 속 주인공은 ‘부자가 제 돈 갖고 무슨 짓을 하든 아랑곳할 바 아니지만 가난을 희롱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타인의 불행을 이용해 자신의 삶을 다채롭게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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