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침묵으로 가해자의 편에 서지 말라
[장산곶매] 침묵으로 가해자의 편에 서지 말라
  • 오수정 편집국장
  • 승인 2020.04.12
  • 호수 1508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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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정<편집국장>

 

‘n번방’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텔레그램 ‘n번방’ 속에서 수많은 여성이 성을 착취당했고 인권을 유린당했다. 여성을 향한 폭력으로 가득한 방 안에는 26만 명의 남성이 함께 존재했다.
‘26만 명’의 남성은 어디서 나타났을까.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무수히 반복됐던 디지털 성범죄를 계속해서 묵인해온 결과이자, 그동안 처벌하지 못했던 성착취 범죄 가담자 모두를 포괄한다. 그렇기에 ‘26만’이라는 수는 숫자의 크기,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2016년, 소라넷이 불법 촬영물이 유통되던 성범죄의 온상이었음이 밝혀졌다. 경찰은 소라넷의 회원이 100만여 명이라고 밝혔지만 처벌받은 사람은 현재까지 운영자 단 1명이다. 그마저도 징역 4년을 선고받는 것에 그쳤다. 100만여 명의 회원을 자랑하던 소라넷이 폐쇄되자 검거되지 않은 100만여 명은 웹하드로 이동했다. 2018년, 웹하드 카르텔이 등장했고 이곳에선 각종 불법 촬영물, 성범죄 영상이 조직적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웰컴 투 비디오’의 운영자가 한국인 ‘손정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기엔 128만여 명의 회원이 있었고 6개월 신생아부터 아동·청소년의 성착취 영상이 유포되고 있었다. 그러나 법원은 손 씨에게 ‘나이가 어리고 반성하고 있다는 점’, ‘부양할 가족이 있다는 점’을 참작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손 씨는 이달 말 출소를 앞두고 있다. 

여성 대상 성범죄는 이름만 바꿔가며 계속해서 우리 앞에 나타났지만 제대로 처벌 받은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매번 분노했고 또 금방 식어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차갑게 식어버린 여성의 죽음을 또다시 목도해야만 했다. 반복되는 분노는 일련의 사건들의 합에서 기인하며 유구한 성범죄 처단 실패의 역사에 우리는 후유증을 앓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여성이 잔인한 지옥 속으로 내몰린 이 사건에도 불편한 시선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한 정치인은 ‘n번방에 호기심에 입장한 사람은 달리 판단해야’한다는 망언을 내뱉기도 했다. 해당 발언에 얼마큼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돼 있는지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는 많은 이들이 n번방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무수히 노력할 동안 이 사건에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보여줬다. 또한, 일각에서는 ‘26만 명이라고 선동하지 말라’, ‘모든 한국 남성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몰아가고 있다’며 이를 남녀의 문제로 프레임을 바꾸고, 심지어는 페미니즘에 대한 비난으로까지 이어졌다. 

여성은 ‘여성을 강간하고 살해하지 말라’, ‘여성의 신체를 몰래 촬영하지 말라’, ‘안전한 나라에서 살게 해 달라’며 계속해서 생존권을 두고 절규했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성범죄를 일부 개인의 일탈로 축소하고 범죄 사실을 보고도 눈감아주는 견고한 카르텔이 형성되는 동안 너무나 많은 여성이 희생당해야 했다. 세상이 변화의 외침에 침묵하는 동안 n번방은 거대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들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멈추고, 강간 및 살인의 위협 속에서 살려달라고 처절하게 외칠 때 일부 남성들은 본인을 억울한 가해자로 만들지 말아달라고 소리쳤다. 운동장은 명백히 기울었고 우리 모두가 평등할 때까지 평등한 사람은 누구도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중립기어를 넣은 차는 내리막길로 떨어질 뿐이다. 중립과 침묵은 결국 가해자의 편에 서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혹시 당신이 느끼기에 세상은 평화롭고 평등하며, 여성의 살려달라는 외침은 감정적이고 피해의식으로 점철된 기회주의로 다가오는가. 그렇다면 본인은 한 번도 화장실에 갈 때 몰래카메라에 찍힐까 두려워 한 적이 없었거나, 혼자 자취한다는 사실이 들킬까 두려워 남성 구두를 신발장에 비치해 둔 적이 없는 위치에 놓여있는 사람은 아닌지 돌아보길 바란다. 

이젠 침묵하지 말고 함께 외쳐주길 원한다. 그리고, ‘26만 명’의 신상이 모두 공개되고 강력 처벌이 이뤄지길 간절히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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