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 모습 드러낸 범인, 자취 감춘 공소시효
[장산곶매] 모습 드러낸 범인, 자취 감춘 공소시효
  • 김종훈 편집국장
  • 승인 2019.10.07
  • 호수 1501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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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훈<편집국장>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미제사건이었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실이 30여 년만에 밝혀졌다. 지난 7월 새로 도입된 DNA 포렌식 기술을 통해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증거물에 남아있던 DNA와 교도소 수감자들의 DNA 비교했다. 그 결과 DNA가 일치하는 수감자가 있었고, 수차례의 조사를 통해 지난 1일 범인의 자백을 받았다. 

이렇게 긴 시간 만에 범인을 알아낸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범인인 이춘재의 추가 자백 내용이 더 충격적이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외에도 더 많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자백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줬다. 물론 아직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 중 일부 사건 증거물과의 DNA 일치와 이춘재의 자백 밖에 없기 때문에 앞으로의 경찰 수사를 지켜봐야 한다. 

30여 년 만에 범인이 밝혀진 상황에서 다시금 주목을 받는 키워드가 있다. 바로 ‘공소시효’다. 현재까지 드러난 점만 보더라도 이춘재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임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그를 처벌할 방법은 없다. 그가 저지른 연쇄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2006년 4월 만료됐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당시 화성 주민을 공포에 몰아넣은 이춘재를 처벌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공분했다. 

공소시효에 대한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에 이 단어가 생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공소시효는 범죄 행위에 대해 범죄 발생일로부터 정해진 기간 안에 기소가 이뤄지지 않으면 형사처벌이 면제되는 제도다. 쉽게 말해 범죄가 있고 나서 일정 기간 안에 범인을 잡지 못하면 처벌할 수 없는 제도다. 

이런 제도를 만든 가장 큰 이유는 혐의 입증에 필요한 증거에 대한 신뢰성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피해자 혹은 목격자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증거물도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희미한 기억에 의한 증언과 훼손된 증거물에 기반해서는 공정한 재판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피해자나 목격자의 기억은 당연히 희미해지거나 왜곡될 수 있다. 사람의 기억이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증거물의 훼손은 이번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 기술의 발전으로 상당 부분 극복하고 있다. 증거물의 훼손 여부나 증언의 신뢰도 문제는 기소 자체를 막을 것이 아니라 검사나 재판부로 하여금 이를 자체적으로 판단하게 할 수도 있다.

여러 논란이 있었던 공소시효는 국내에서 일부 범죄에 한해 사라졌다. 지난 2015년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폐지됐다.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로 실제로 범인 처벌에 성공한 사례도 있다. 지난 2016년 15년 전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검거됐다. 공소시효가 폐지되면서 사건 당시 수사팀이었던 경찰이 원점 재수사를 시작했고 결국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 뒤늦게 붙잡힌 법인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런 사례를 통해 경찰은 피해자의 가족과 미제사건의 범인에게 끝까지 수사하면 범인을 잡을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폐지됐지만 그럼에도 이춘재의 범행은 단죄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소급입법금지의 원칙 때문이다. 소급입법금지의 원칙은 새로 만든 법이 제정 이전의 사실에 적용될 수 없다는 원칙이다. 이 원칙은 2015년 살인죄 공소시효가 폐지될 때 이춘재의 범행 공소시효는 이미 종료된 뒤라 해당 법으로도 공소시효 만료를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춘재가 처벌을 면제받더라도 그의 범행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행인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그가 이번 범행이 밝혀지지 않았더라면 사회로 나올 뻔 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25년 간 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1급 모범수로 분류돼 있었다. 20년 이상 복역한 무기징역수에게 가석방의 기회가 주어지는 상황에서 자칫하면 이춘재는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사회로 나와 자유를 누릴 뻔했다. 단죄할 기회를 놓친 점은 아쉽지만, 뒤늦게 진실을 밝힌 것만으로도 이번 일은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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