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명의 동인, 6명의 신문에 대해 이야기하다
6명의 동인, 6명의 신문에 대해 이야기하다
  • 김종훈 기자
  • 승인 2019.09.23
  • 호수 1500
  • 1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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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신문 1500호 기념 동인 좌담회

▲ 좌담회에 앞서 사회자인 편집국장이 동인들에게 좌담회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 있는 모습이다.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김한수 동인 △김동기 동인 △엄길청 동인 △연제호 동인 △김정기 동인 △황경렬 동인 △변시영 동인이 앉아 사회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한대신문사’라는 공간에서, ‘한대신문’이라는 신문을 만든 6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6명 모두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신문을 만들었지만, 서로 다른 시기에 기사를 써 내려갔다. 그만큼 신문에 대한 생각이나 기억은 서로 다르다. 본지 1500호 발간 그리고 창간 60주년을 맞아 6명의 동인이 모여 모두의 교집합인 ‘한대신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좌담회는 지난 7일 서울캠퍼스 학생회관에서 열렸다. 참여한 동인은 △14기 황경렬 동인 △17기 엄길청 동인 △18기 김동기 동인 △19기 김정기 동인 △30기 연제호 동인 △38기 김한수 동인 △51기 변시영 동인으로 다양한 기수의 동인이 모였다.

좌담회에서는 △과거 한대신문의 위상 △당시 한대신문의 학내·사회에서 역할과 성격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한대신문 기자에게 전하고픈 조언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눴다. 그 시절 한대신문의 모습과 동인들의 기자 시절 이모저모를 엿볼 수 있는 알찬 시간이었다.

과거 한대신문의 위상

수습기자 경쟁률 10:1에 달해
신문에 기고 원하는 사람도 많아
신문을 많이 가져가려는 학생도
있어 배포대 앞에 기자가 서 있기도


황경렬 동인: 제가 기자로 활동한 70년대 우리 신문의 영향력은 상당했죠. 지금처럼 그때도 교내에 언론사 3곳(△한대신문 △한대방송국 △한양저널)이 있었습니다. 그중 신문사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만큼 신문사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학생도 많았습니다. 수습기자 경쟁률이 무려 10대 1에 달했죠. 위상이 높았던 것뿐 아니라 많은 학생이 신문을 읽고, 기고하려고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신문이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죠. 

김정기 동인: 제가 활동하던 때도 영향력이 컸죠. 총학생회나 동아리와 비교해도 학교에서 신문사의 영향력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수습기자 경쟁률 이야기에 덧붙이자면 수습기자 모집 시험을 위해서 강의실을 3개나 빌려야 할 정도였죠. 

연제호 동인: 지금은 신문이 월요일에 나오지만, 당시엔 신문이 화요일이 나왔습니다. 화요일이면 정문에 많은 학생이 신문을 가져가기 위해 모였죠. 그중에 여러 부를 가져가려는 사람도 많아 신문이 부족할 뻔한 적도 있었죠. 그래서 지금과는 달리 신문을 배포대에 놓지 않고 기자가 배부하는 형식이었어요. 
 

당시 한대신문의 학내·사회에서 역할과 성격 

시대에 따라 신문의 성격도 변화
산업화·민주화 겪는 사회와 함께
신문도 그와 같은 길을 걸어와
특정 기사 두고 주간과 갈등도


연제호 동인: 제가 활동하던 때는 80대 초 민주화되기 직전이었어요. 그런 사회 분위기와 겹쳐서 신문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담은 분위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엄길청 동인: 제가 기자로 있던 때엔 산업 구조의 변화와 함께 사회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민주화 그리고 노동자의 낮은 처우에 대한 관심이 컸던 시기였죠. 하지만 당시 기성 언론은 외부로부터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에 대학언론인 우리 신문이 그 역할을 대신했어요. 우리 신문을 포함한 당시 대학신문이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기반을 만드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당시엔 신문이 학술적인 색채를 갖고 있었습니다. 학내에서 쓰인 기술 관련 논문을 신문에 정말 많이 실었어요. 한대신문이 우리 대학 내부의 역량을 기르는데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김한수 동인: 86년부터 88년까지 제가 활동하던 당시에도 비슷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신문을 발행하는 과정에서 기사의 수위를 두고 갈등이 있기도 했죠. 그만큼 사회의 여러 열망을 기사로 담아내려고 고군분투했습니다.

황경렬 동인: 저도 4·19 특집 기사를 기획하면서 비슷한 경험이 있었어요. 주간 교수와 제목을 두고 마찰이 있었습니다. 제목에 들어간 단어 하나를 두고 설전을 벌였죠. 단어 하나 때문에 4시간이 넘게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런 상황을 겪으면서 원하는 글을 쓰기 정말 쉽지 않다는 걸 통감하기도 했죠.

연제호 동인: 같은 4·19 특집 기사를 기획하면서 저는 더 큰 갈등이 있었어요. 제가 편집국장이 되기 전까지 4·19 특집 기사를 주간 교수가 허락해주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편집국장이 되면 어떻게 하든지 특집 기사를 쓰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죠. 그런데 주간 교수가 또 특집 기사를 반대하는 겁니다. 결국 파업을 선언하고 신문사를 뛰쳐나왔습니다.

그래서 그해 신문을 보면 4월부터 여름까지 비어있어요. 파업이 길어지면서 어린 나이에 편집국장이었던 저도 마음을 졸이고 있었습니다. 결국 학교와 극적으로 타협해 신문사로 돌아왔던 기억이 있네요.

변시영 동인: 김영삼 정부 때 활동한 저는 선배님들과 비교했을 때는 사회 분위기가 부드러워졌어요. 그래서인지 신문에도 그런 사회 분위기가 이어진 것 같습니다. 당시 연세대학교에서 벌어진 *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 사태 이후 운동권 내부에서까지 자정의 목소리가 나왔죠. 여기에서 이어져 학생의 본분과 학생기구의 정치 참여 여부를 놓고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세로쓰기가 일반적이었던
70년대에 가로쓰기 전격 도입
학내 언론협의회 조직을 통해 
언론3사가 힘을 모으기도 해


황경렬 동인: 당시 다른 대학 신문뿐 아니라 기성 신문도 모두 세로쓰기로 신문을 발간했어요. 우리 신문이 거의 처음으로 가로쓰기로 신문을 냈죠. 이건 굉장히 자랑할 만한 점이라고 생각해요. 아마 제 기억엔 우리 신문과 이대학보가 가로쓰기를 가장 먼저 도입했습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굉장히 앞서나간 거죠. 

하지만 그로 인해 힘들었던 기억도 있죠. 우리가 처음이라서 참고할만한 신문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부터 열까지 틀을 만들어나가야 했어요. 그래도 그 과정에서 뿌듯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김정기 동인: 제 기억엔 한글학회 회장이었던 국어국문학과 김윤경 교수님이 그 분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분의 영향도 상당히 있는 것 같네요. 당시 생소했던 가로쓰기를 전격적으로 도입한 것은 우리 신문이 변화에 개방적이고 열린 문화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이런 변화가 다른 대학 신문과 기성 신문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생각해요.

김동기 동인: 저는 취재기자가 아니라 사진기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취재기자와는 조금 다른 추억이 있네요. 당시 대학 스포츠의 인기가 굉장했어요. 그래서 현장 취재를 자주 가곤했습니다. 현장 취재에 갈 때면 한대신문 기자증을 꼭 매고 다녔어요. 그 기자증이 제 신분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해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취재를 나가면 사진을 찍다가도 틈이 나면 경기에 빠져 구경한 기억이 있습니다.

김한수 동인: 신문사 활동을 하면서 학생 기자가 힘이 없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학내 언론들이 연합해서 ‘언론협의회’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회장을 맡아서 총학생회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코너를 바꾼 기억도 있네요. 1면의 ‘행당여적’이라는 코너를 지금까지 편집국장 칼럼으로 남아있는 ‘장산곶매’로 개편했습니다. 

황경렬 동인: 제가 문화부장이었을 때 했던 대담이 기억에 남네요. 지금은 우리나라 대표 소설가 중 하나인 최인호 작가와 대담을 했어요. 대담을 진행할 때만 해도 그리 유명하지 않았는데 대담 후 「별들의 고향」이라는 작품으로 대중에게 막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신문사에서 큰 작가를 미리 알아봤다는 말을 듣기도 했죠.

변시영 동인: 제가 편집국장이 되기 전까지 여자가 편집국장을 한 적은 한 번밖에 없었다고 알고 있어요. 지금이야 누가 편집국장을 하든지 중요하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분위기가 조금 달랐습니다. 

그만큼 여자가 편집국장을 하는 일이 드물어서 조금 주목을 받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의식적으로 강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한 기억이 나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에요.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한대신문 기자에게 전하고픈 조언

한대신문만의 것을 찾아야
학생 외의 대학구성원도 고려해야
독자 참여형 코너 같은 방법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도 필요


연제호 동인: 굳이 기성 언론을 따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기성 언론이 잘하는 부분도 있지만 우리만의 것, 한대신문만의 것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뭘 할 수 있는지 찾고 거기에 집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정기 동인: 한대신문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지금 한대신문은 학생에 비해 교수와는 꽤 멀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학생 외의 대학 구성원도 고려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대학교에는 학생 외에도 교수, 교직원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해요.

황경렬 동인: 신문을 읽지 않은 사회 분위기에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학생 참여형 코너를 만들어 독자에게 다가가면 학생들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제가 활동할 때도 ‘사자후’라는 독자 참여형 코너가 있었는데 과거 신문을 참고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군요.

또 중립적인 기사를 쓰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떤 사안이든 양쪽에서 볼 수 있어요. 그럴 때 편을 가르는 기사나 한쪽에 치우친 기사는 지양해야 합니다.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했으면 합니다.

엄길청 동인: 대학신문인만큼 기성 언론보다 미래에 대한 담론을 담는 매체가 되면 좋을 것 같네요. 또 경제나 사회 분야에 있어 학생들의 시각을 넓혀주는 기사를 쓰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김동기 동인: 좋은 종이 신문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웹으로 기사를 전하는 홈페이지도 중요합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통해 웹으로 기사를 보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에 그 부분도 신경 쓴다면 더 나은 신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 사태: 1996년 연세대학교에서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 행사를 열려는 학생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1천 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사진 노승희 기자 seunghi0703@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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