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를 체로 거르다
연기를 체로 거르다
  • 일일기자 김동혁
  • 승인 2019.09.23
  • 호수 1500
  • 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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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1499호 기획회의를 시작으로 한대신문 일일기자 체험을 시작한 김동혁<인문대 국어국문학과 18> 씨. 취재부터 기사 작성까지 모든 과정을 한대신문과 함께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 청년이 소크라테스를 찾아와 할 말이 많다며 그를 붙잡았다. 소크라테스는 청년에게 먼저 할 말을 세 개의 체에 걸렀는지 물어본다. 첫 번째 ‘진실의 체’는 말이 객관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사건이나 현상을 왜곡하지 않았는지 고민하는 과정이다. 두 번째 ‘선의 체’는 말이 선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세 번째 ‘유용성의 체’는 전하려는 말이 유용함을 주는지 판단하는 과정이다. 소크라테스는 ‘세 개의 체로 걸러지지 않는 말이라면 그 말은 침묵보다 못 하다’며 청년의 수다스러움을 반성하게 했다. 

기사를 쓰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고자 하는 말을 체로 수십, 수백 번 거르는 일을 반복해야 기사가 나온다. 근데 걸러야 하는 말이 연기 같아서 문제였다.

ERICA캠퍼스에서 첫 기획회의가 진행됐다. 낯선 사람들, 낯선 공간, 낯선 주제가 부담스러웠지만 어떻게든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 내가 맡은 기사 아이템인 ‘법제위원회’를 꾸역꾸역 이해하려 노력했다. 태어나서 처음 들은 내용이라 이해보다는 내 뇌에 연기를 잡아두는 느낌이었지만 계속 되새기다 보니 머릿속에서 구름으로 응축되는 느낌이었다.

뉴런과 시냅스 사이에 일종의 전기신호가 구름같이 떠다녔다. 이 정보는 내 지식을 확장시켜줬다. 여기까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문제는 이 정보를 체에 걸러 언어로 붙잡아두는 것이었다.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심금」에는 유리잔 위에 살포시 올려진 구름이 그려져 있다. 이 구름은 유리잔에 물의 형태로 얌전히 담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초현실주의라 말하는데 구름을 담을 수 있다는 생각이 그만큼 말이 안 된다는 소리다. 하지만 나는 초현실적인 그것을 해야만 했다. 머릿속에 있는 구름을 응축해 실체화된 표상으로 정제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나 키보드 위에 올려진 손가락만 까딱거릴 뿐 아무런 형태 없는 연기만 둥둥 떠다녔다.

인터뷰를 해주셨던 법제위원장 조성재<정책대 정책학과 16> 씨가 생각났다. 그분은 거침없이 자기 생각을 말하면서도 대답해야 하는 요점을 잊지 않았다. 녹취록을 작성하고 다시 읽어보면서 내가 써야 할 기사의 방향을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말은 정확했다. 조 씨는 구름을 잡아 체에 걸러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당당함이 묻어나는 인터뷰 녹취록과 내가 쓰고 있는 기사를 함께 보니 뜬구름 잡는 나의 기사에 한숨이 나왔다. 그렇지만 나의 부족함에 좌절해 있을 시간은 없다. 마감이 코앞이었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올라도 기사 쓰는 일은 계속됐다. 내가 갖고 있는 말을 체로 거르고 또 걸렀다. 하지만 연기는 체로 걸러지지 않고 떠올라 꾸벅꾸벅 조는 나를 조롱했다. 데스킹이 계속되고 지친 틈에 잠시 밖에 나가 담배를 태웠다.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하늘로 올라갔다. 그것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어떤 연기도 잡을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아 울적해졌지만, 신문사에서 같이 고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투정 부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신문사엔 모닥불 타오르듯 키보드 소리가 타닥타닥 울렸다. 다들 연기와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다시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 뒤로 달이 두 번 더 지고 나서야 유리잔에 물이 담겼다. 그렇게 맑은 물은 아니었지만, 활자로 찍힌 기사를 보니 뿌듯한 마음이 그간의 고생을 잊게 해줬다. 일일기자의 숙명은 그 순간과 함께 마무리됐다. 

신문사의 시계는 지금도 흘러간다. 하고픈 말, 해야 하는 말을 체에 거르며 밤을 지새우는 나날이다.

어느 날 신문사의 밤에 불이 들어오고 나는 그곳을 스치다 잠시 멈춰 담배에 불을 붙인다.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에 담배 연기가 너무나 선명하다. ‘아직도 그들은 연기를 체에 거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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