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의 정신을 지배하는 성범죄, 그루밍 성폭력
약자의 정신을 지배하는 성범죄, 그루밍 성폭력
  • 오수정 기자
  • 승인 2019.05.12
  • 호수 1495
  • 6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달, 정신과 진료를 받은 환자가 의사에게 ‘그루밍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논란이 일었다. 피해자는 해당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3년간 의사와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 믿고 수차례 성관계를 맺었다. 피해자는 의사가 칭찬을 통해 신뢰를 쌓은 후 피해자와 가족 사이를 이간질해 가족으로부터 ‘고립’ 시켰다고 밝혔다. 이어 성적 관계를 형성하고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는 방식을 통해 피해자를 통제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피해자는 지난 3월 같은 의사가 다른 환자들에게도 같은 수법으로 성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듣고 본인이 ‘그루밍 성폭력’을 당했음을 깨달았다고 주장했다. 
 

그루밍 성폭력이란
그루밍 성폭력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호감을 얻거나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2017년 11월 탁틴내일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이하 탁틴내일)에서 주관한 ‘아동·청소년 성범죄에 관한 토론회’에 따르면 그루밍 성폭력은 △피해자 고르기 △피해자의 신뢰 얻기 △욕구 충족 시켜주기 △고립시키기 △성적으로 관계 맺기 △통제 유지하기 순서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루밍 성폭력은 정신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놓인 약자에게 발생하며 대개 어린이나 청소년 등의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서은주<탁틴내일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팀장은 “‘그루밍’은 길들인다는 의미를 가지며 이는 사춘기 시기를 겪고 있거나 심리적·정서적으로 위축된 아동·청소년이 그루밍 성폭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탁틴내일이 2014년부터 2017년 6월까지 접수된 미성년자 성폭력 상담 사례를 분석한 결과 전체 78건 중에서 34건이 그루밍 성폭력에 해당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처음이 아닌 그루밍 성폭력 사건
정신과 의사의 그루밍 성폭력 사건 이전에도 그루밍 성폭력 사건은 존재했다. 지난 1월 ‘조재범 전 코치 성폭행 의혹’ 사건과 지난 2013년 연예기획사 대표가 15세 여중생에게 성관계를 강요해 임신시킨 사건 모두 그루밍 성폭력에 해당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특히 지난해 11월에 발생한 일명 ‘인천 김 목사’ 사건은 기독교계 그루밍 성폭력 사건으로 주목받았다. ‘인천 김 목사’ 사건은 여성 신도 10여 명이 10대부터 10년간 청년부 목사에게 성폭행 당했다고 폭로한 사건이다. 채수지<기독교여성상담소> 소장은 김 목사가 “열악한 상황에 놓인 피해자들에게 ‘구원자’처럼 등장해 호감을 사고 ‘사랑한다’는 말로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든 뒤 성폭행했다”고 주장했다.

‘인천 김 목사 사건’으로 교회가 그루밍 성폭력의 온상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해당 사건에 대해 채 소장은 “교회 성폭력의 전형적인 형태로써, 기존부터 숱하게 발생했으나 은폐돼왔던 교회 성폭력을 수면 위로 드러낸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채 소장은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의 대부분은 그루밍의 성격을 띄고 있다”며 “목회자가 성도들에 대한 심리적 지배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교회는 그루밍 성폭력에 취약한 장소”라고 덧붙였다. 
 

그루밍 성폭력 처벌의 한계
그루밍 성폭력을 처벌하기 어려운 이유는 현재 만 13세 미만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만 강제로 처벌 가능하기 때문이다. 13세 미만의 아동과 성관계 시 ‘미성년자 의제강간죄’가 적용돼 폭행이나 협박이 없어도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13세 이상의 피해자의 경우, 피해자가 ‘강제성’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처벌이 어렵다. 하지만 그루밍 성폭력의 경우 강제성을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루밍 성폭력은 가해자 측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앞서 예시 든 연예기획사 대표가 15세 여중생을 임신시켰던 사건에서 연예기획사 대표는 징역 9년을 선고받았었다. 그러나 ‘연인 사이’였다는 연예기획사 대표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결국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루밍 성폭력은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자각하기 어렵다는 것 역시 문제다. 서 팀장은 “그루밍 성폭력은 일반 성폭력과 달리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인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며 “△타인의 시선 △질타 △2차 가해 등의 이유로 피해 사실을 밝히는 것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대안은 없나
현재 그루밍 성폭력을 대상으로 한 법안은 존재하지 않으며 성폭력에 대한 법률적 정의조차 없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지난해 12월 19세 이상 성인이 13세 이상 16세 미만 아동·청소년의 궁박한 상태를 이용해 간음, 추행할 경우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통과됐다. 이는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놓인 미성년자가 압박에 의해 ‘그루밍 성폭력’에 노출되는 위험을 최소화하고자 개정됐다. 

하지만 여기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서 팀장은 “궁박한 상태라는 의미가 모호하고 경제적·정신적으로 곤궁함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고 지적했다. “그루밍 성폭력은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 사실을 깨닫기 어렵기 때문에 개정안 또한 피해자가 직접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한계를 지닌다”고 덧붙였다. 실제 영국은 2003년 일명 ‘그루밍법’을 제정해 성인이 만 16세 이하 청소년에게 성적으로 접근할 경우 최소 10년 이하 징역형에 처하게 했다. 캐나다 또한 아동·청소년이 자발적으로 ‘동의’했더라도, 동의로 인정하지 않는다. 국내 형법은 피해자에게 범죄 책임 입증을 외국에 비해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그루밍’ 과정을 범죄로 인정하는 인식이 필요하다. 서 팀장은 “현재 우리나라는 ‘그루밍’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 연인 사이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며 “‘그루밍’이 성폭력에 해당할 수 있음을 알리고 문제삼아야 한다”고 지적하며 그루밍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또한 “그루밍 성폭력에 대해 일반 성폭력 교육에서 해당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아직은 부족한 실정”이라며 “피해자들이 본인의 행위에 대해 인지하고 깨닫게 하는 과정이 교육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도움: 채수지<기독교여성상담소> 소장
서은주<탁틴내일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팀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