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다 : see 先
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다 : see 先
  • 우지훈 기자
  • 승인 2019.05.06
  • 호수 1494
  • 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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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여 영원하라!, 전시회 ‘대안적 언어-아스거 욘, 사회운동가로서의 예술가’

▲ '대안적 언어-아스거 욘, 사회운동가로서의 예술가'의 전시 광경이다.

서유럽과 미국 중심의 서양미술사에서 북유럽 출신 작가를 접하기란 쉽지 않다. 전시회 ‘대안적 언어-아스거 욘, 사회운동가로서의 예술가’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덴마크 출신 작가 아스거 욘(Asger Jorn)을 소개한다. 아시아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그는 코브라,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등 아방가르드 운동 조직을 설립하고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삶 속에서 예술을 실현하고자 했던 아방가르드 운동은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기존 예술 개념에 반기를 들었다.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아스거 욘은 사회와 소통하는 예술을 지향했다. 여러 공동체를 만들며 활동했던 그의 생애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창작 활동 역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협업을 하거나 관람객과 소통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그런 그의 경향이 드러나는 여러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대중과 함께 실을 짜서 만든 태피스트리 작품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이한다. 그의 회화 작품에서 느껴지는 입체파와 추상표현주의 경향은 앞서 명성을 떨쳤던 피카소, 칸딘스키 등의 화풍을 모방한 것이다. 그는 시대가 지났다고 과거 유행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자신만의 관점으로 재해석해 세대 간 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자 했다.

여러 언어를 섞어 붙인 작품명과 이름 없는 작품들로 관람자에게 자신의 의도를 일방적으로 강요하기보단 열린 해석을 환영하고, 관람자를 능동적인 존재로 격상시켰다. 그는 대중에게 잊혀진 작품 위에 덧칠을 해 동시대성을 불어넣어 대중과 다시 소통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소비자본주의의 상품과 이미지를 비판하며 삶의 변화를 자극하는 작품도 남겼다. ‘광고’라는 상업 매체를 일부러 철자가 틀리게 패러디하거나 소비자본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는 형태였다. 소비자본주의 매체를 소비자본주의 비판을 위한 수단으로 전환시켜 모순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이렇게 예술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아스거 욘의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5전시실 및 서울박스에서 9월 8일까지 열린다. 학생증을 제시하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그가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지금 만나러 가보자.

글·사진 우지훈 기자 1jihoonwoo@hanyang.ac.kr

낳은 정과 기른 정 사이, 영화 「도우터 오브 마인」

▲ 영화 「도우터 오브 마인」의 한 장면이다.

2만8천 유로. 한화로 약 3천6백여만 원. 영화 「도우터 오브 마인」의 주인공 ‘안젤리카’가 갚아야 하는 돈의 액수다. 술에 찌들고 빚에 시달리며 엉망이 된 삶을 살아가는 그녀에겐 딸 ‘비토리아’가 있었다. 자식을 양육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그녀는 친딸을 지인 ‘티나’에게 입양 보냈다. 어느 날 그녀는 채권자가 고용한 법률 사무소로부터 자택 퇴거 통지서를 받고 고민에 빠진다. 이사 가기 전 마지막으로 비토리아를 만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비토리아는 본능적으로 티나가 친모가 아님을 알아챈다. 안젤리카와 티나의 만남 이후 비토리아가 자신을 멀리하려는 느낌을 받는 티나는 친모 안젤리카를 원망하기 시작한다. 딸과 친밀했던 감정적 유대감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해 좌절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영화는 진정한 모정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영화 「도우터 오브 마인」은 제목 그대로 엄마로 살고 싶은 여자와 엄마가 되고 싶지 않은 여자 그리고 ‘그 둘 모두의 딸’에 관한 이야기다. 비토리아가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난 후 비토리아를 둘러싼 두 인물의 감정이 심화되는 모습이 영화 내내 비언어적으로 전달된다. 표정이나 제스처를 섬세하게 표현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관객을 스토리 속으로 완벽히 몰입시킨다. 세 여성이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카메라가 롱테이크로 비추는 장면은 특히 본 영화에서 놓칠 수 없는 최고의 순간이다. 자기 정체성에 의문을 품었던 비토리아가 안젤리카가 친엄마임을 확신하고 걷는 장면에는 어떤 대사도 없다. 영화는 주인공의 표정과 걸음만으로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드러내며 비토리아가 겪었을 감정의 파동을 관객들에게 온전히 전달한다.

안젤리카가 자신이 키우는 동물을 자식 대하듯 나름의 방식으로 소통하며 그들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도 눈길을 끈다. 그녀의 마음속 숨겨진 따뜻한 내면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토리아를 입양 보낼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세 주인공의 감정이 다채롭게 표현되고, 낳은 정과 기른 정을 아이의 눈높이에서 거짓이나 과장 없이 바라보는 영화 「도우터 오브 마인」. 가정의 달을 맞이한 요즘 어머니란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이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어떨까.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왜 말하고 사유해야 하는가, 연극 「보도지침」

▲ 연극 「보도지침」의 한 장면이다.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을 배경으로 하는 연극 「보도지침」은 1986년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월간 잡지 「말」에 ‘보도지침’을 폭로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건의 판결과정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당시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은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내려 기사 보도 여부나 방향, 내용까지 결정하며 언론 및 표현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를 억압했다.

보도지침 사건을 바탕으로 하는 이 연극은 말과 사유를 통제하려 했던 당대 사회를 그대로 재현한다. 연극의 주인공 모두는 대학 시절 함께 연극부 활동을 하며 동고동락했다. 그들은 동독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됐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를 공연으로 올렸다가 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당한다. 연극은 이후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된 그들이 보도지침 사건을 계기로 법정에 다시 모여 충돌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연극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킨다. 중세 말기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호르헤’라는 인물은 장서관을 장악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희극편이 대중에게 알려지기를 꺼린다. 그는 지식이 추구되는 게 아니라 보존되는 것이라 여겼다. 사람들이 희극을 긍정성을 깨달아 웃게 되면,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 신을 찾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르헤가 종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웃음을 죄악시하고 지식 추구를 통제하려 했던 것처럼, 우리 역사 속 보도지침과 금서 지정을 다루는 본 연극은 말과 사유를 억압하며 기성 권력이 유지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자유가 억압된 군사 독재 정권을 종종 중세와 같이 ‘암흑의 시대’라 부르곤 한다. 앎의 등불이 꺼진, 그래서 까막눈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던 두 시기를 이렇게 불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연극은 관객들에게 지식 추구가 억압되고 침묵하는 삶이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지, 누군가를 배제하는 일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묻는다.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에 누가 정보를 장악해 권력을 쟁취하고, 그 속에서 잊혀진 목소리는 무엇일지 생각하게 만든다. 계속해서 말하고 사유해야 할 이유를 연극 「보도지침」을 통해 느껴보자. 연극 「보도지침」은 대학로 티오엠 씨어터에서 7월 7일까지 전석 5만 원(학생 할인 시 3만5천 원)에 관람할 수 있다.

글·사진 우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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