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자, 손끝으로 소통하는 세상
점자, 손끝으로 소통하는 세상
  • 고다경 기자
  • 승인 2019.04.14
  • 호수 1493
  •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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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우리나라 중소기업이 세계 최초로 점자 스마트워치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점자 스마트워치는 손목에 찰 수 있을 만큼 작고 모든 스마트폰과 블루투스로 연동될 수 있다. 두껍고 커다란 점자책과 점자단말기의 불편함을 보완해준다. 이처럼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관련 산업 및 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각장애인은 실제 점자를 활용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알아보자.

한글을 사용할 수 없다면?
시각장애인이 일상생활 속에서 점자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은 매우 어렵다. 지난 12월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는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일상생활 영역별 점자 및 점자 자료 제공 여부에 대한 조사 자료를 발표했다. 조사 대상 영역으로는 △대중교통 운행 정보 △법률 및 경찰서 법정 서류 △의약품 정보 △직장 업무 자료·문서 등 8개 영역으로 이뤄져 있다. 모든 영역에서 점자 자료 제공 여부에 ‘그렇다’라고 응답한 비율은 30% 미만이다. 이는 점자를 사용하는 시각장애인이 살아가기에 열악한 환경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점자를 사용하며 생활하는 이연주<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팀> 팀장은 “시중에 판매되는 많은 의약품이나 식품 등에 점자 표기가 없다”며 “의약품의 경우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점자 없이 이를 식별하기는 어려워 약물 오남용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고 문제의 심각성을 알렸다. 국립서울맹학교에 재학 중인 김지명<서울시 성북구 16> 씨도 “음료수에 표기된 점자가 이전보다는 세부적이지만 여전히 종류를 구분하기 힘들다”며 “주변의 도움 없이 물건을 사기 어렵다”고 불편함을 호소했다. 이처럼 점자를 통한 정보 전달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시각장애인은 비시각장애인에게는 평범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시중에서 점역 서적을 찾기 어렵다는 문제도 지적된다. 학습 참고서를 제외한 일반 서적 중 점역 된 서적의 비율은 10%도 되지 않는다. 점역 기관에 원고 파일이 제공되면 더욱 쉽고 빠른 점역 과정이 이뤄질 수 있다. 그러나 출판사는 저작권의 이유로 서적 원고 파일을 점역 기관에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원고 파일이 점자도서 제작 외의 용도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저작권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교과서나 학습 참고서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저작권 문제뿐만 아니라 제작 시기로 인해 시각장애인 학생의 학습권이 침해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기호나 수식이 많이 사용되는 참고서의 경우 일반 서적보다 점역 서적 제작에 최대 10배의 시간이 소요된다. 이는 시각장애인 학생이 다른 학생에 비해 학습 시기가 늦어지게 한다. 김 씨는 “점역 파일을 신청하는 제도가 활성화돼 있지만 점자도서 제작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한정된 제작 인력으로 인해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전했다.

이에 현재 국립특수교육원에서는 EBS에서 제작되는 교재를 점자로 제작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EBS 점자 교재 역시 제작·출시 시기나 맞춤법 문제가 지적된다. 이 팀장은 “작년까지도 점역 파일이 교재 출시일과 EBS 방송 일정과 맞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에 EBS에서 점자 교재 제작 시기를 교재 출시일과 EBS 방송 일정에 맞추겠다고 말했지만, 점자 교재 맞춤법 문제도 지적됐다. 이 팀장은 “시기를 맞춘다고 해도 교재의 품질 문제가 발생한다”며 “띄어쓰기, 문장부호, 품사 정리 등 지켜야 할 점자 규정이 있지만, 점역 과정에서 점자 맞춤법 준수 작업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EBS 교재는 수능에 직간접적으로 반영되기에 그 심각성은 더욱 크다. 점역 교재 제작 시스템 개선과 저작권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

다소 아쉬운 ‘점자 발전 기본계획’
이에 지난 12월 문체부에서는 ‘제1차 점자 발전 기본계획(2019~2023)’(이하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기본계획은 점자법에 따라 5년마다 점자 관련 전문가들의 심의를 거쳐 수립된다. 기본계획은 ‘어디서나 만나는 점자, 점자로 넓어지는 우리말’을 표어로 시각장애인의 언어생활 증진과 점자의 위상 강화를 목적으로 한다. 기본계획은 크게 △점자 발전을 위한 제도적 기반 구축 △점자 교육 및 연구 환경 조성 △점자사용 촉진 및 보급 확대라는 세 가지 추진과제로 이뤄져 있다. 기본계획은 시각장애인의 생활환경 개선 취지로 만들어졌지만, 아직 미흡한 점이 지적되고 있다.

기본계획에 따르면 점자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이용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응답한 시각장애인의 비율은 64.4%에 이른다. 기본계획 내에도 점자로 제공되는 정보가 불충분해 시각장애인이 정보에 접근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음이 명시돼있다. 그러나 기본계획은 점자 표기 환경 구축보다는 점자 표기 규격의 표준화 방안 연구에 집중돼 있다.

이에 이대성<문화체육관광부 국어정책과> 학예연구원은 “기본계획 수립 이전부터 각종 제품에 대한 점자 표기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다”며 점자 표기 확대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위 사안에 대해 “사회·경제적 파급력 등이 적지 않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문제”라고 이야기했다. 덧붙여 이 씨는 “점자 표기 의무화로 인해 늘어난 사회적 비용은 전체 소비자의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어 이에 대한 전체 소비자의 문제의식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사회 구성원 모두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기본계획 수립 이후에도 고질적인 저작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문체부는 점자출판물 제작 및 보급 활성화를 위해 점자 출판 시설 지원 등의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저작권 침해의 이유로 서적 원고 파일 제공 거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제시돼 있지 않다. 이에 이 학예연구원은 “출판사의 파일 제공 의무화는 사유재산의 침해로 이어질 수 있어 엄격한 저작권 보호 수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민간의 점자 관련 기관 중 위 수단을 가진 시설은 없다”며 저작권 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바라봤다. 저작권법에 따르면 시각장애인의 복리 증진을 위해 공표된 어문저작물을 전용기록방식으로 복제 및 배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의 지적 사유 수단과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해 다양한 이해관계를 고려한 절충안을 마련해야 한다.

문체부는 기본계획을 통해 시각장애인이 포함된 점자 정책 전문가 위원회(이하 점자위원회)를 구성한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점자 발전 기본계획 내용과 한국점자규정 개정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다. 하나의 통합된 관리부서가 있어야 더욱 체계적인 점자 발전과 보존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점자위원회의 소속이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이 팀장은 “점자법 초안에는 점자위원회가 문체부 소속이었지만 논의 과정에서 삭제됐다”며 “점자 관련 업무가 부서별로 나뉘어 있어 이를 통합할 수 있는 문체부 산하의 점자위원회 설립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기본적인 언어생활 보장을 위해
정부는 계속해서 시각장애인의 점자사용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학예연구원은 “시각장애인에게 점자가 없는 환경은 비시각장애인에게 한글이 없는 것과 같다”며 “문체부도 시각장애인의 언어권을 보장하기 위해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덧붙여 “아직은 시각장애인의 기대와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지만, 장애인 정책에 대한 다양한 가치 충돌 문제를 해결해 더욱 나은 환경을 구축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글과 같은 역할을 하는 점자사용 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시각장애인의 기본적인 언어생활을 보장하는 것이다. 비장애인 중심의 세상이 아닌 모든 사회 구성원이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사회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점자 환경 구축을 위해 기본계획 등 여러 제도를 점진적으로 보완해 나간다면 시각장애인이 더욱 편리하고 안전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시각장애인이나 정부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서로의 상황을 이해해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는 것 또한 중요하다.

도움: 이대성<문화체육관광부 국어정책과> 학예연구원
이연주<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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