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피해자에 대한 불필요한 호기심 멈춰야 할 때
[사설] 피해자에 대한 불필요한 호기심 멈춰야 할 때
  • 한대신문
  • 승인 2019.04.07
  • 호수 1492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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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 정준영 씨가 불법 영상 촬영·유포 혐의로 구속되며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러나 정 씨의 영상에 여성 연예인이 등장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피의자보다 여성 연예인에게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정준영 동영상 여성 연예인 리스트’라는 이름의 ‘지라시(사설정보지)’가 유포됐고 정 씨의 영상에 등장한다고 의심받은 여성 연예인들이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올랐다. 언론은 기사 노출을 위해 앞다퉈 연예인의 이름을 기사 내용에 담았다.

대중이 ‘피해자 찾기’에 나서자 언론은 피해자 신상에 대한 보도를 쏟아냈다. 한 언론사는 정 씨의 범죄로 피해를 입은 인물이 누군지 유추할 수 있는 ‘연예인 피해자’, ‘피해자는 걸그룹’ 등의 표현을 사용해 기사의 제목에 직업군을 공개했다. 피해자로 추정되는 사람의 실루엣을 사용하거나 아예 사진이나 이름을 공개한 언론사도 등장했다. 언론은 피해자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해 대중의 관심을 유도했다.

2014년 여성가족부와 한국기자협회가 발표한 ‘성폭력·성희롱 사건 보도 공감 기준 및 실천요강’은 ‘피해자의 신원이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항목을 담고 있다. 이는 언론이 피해자의 신원이 드러나지 않게 보도해야 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보도를 위해 2차 피해 문제도 반드시 고려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 씨의 논란에서 보도 윤리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심지어 언론이 나서서 피해자의 신상에 대해 보도해 2차 피해 범죄에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지라시 속 여성 연예인의 얼굴을 포르노에 합성해 실제 정 씨의 영상이라고 유포된 것이다. 가짜 영상은 불법 음란물 사이트를 중심으로 확산됐으며 수많은 여성 연예인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됐다. 굳이 찾아보지 않으면 지라시의 내용을 알 수 없는 일반 대중에게 오히려 확인되지 않은 뉴스를 언론이 퍼나르면서 범죄에 도움을 준 셈이다.

언론의 보도로 많은 사람들이 2차 피해를 입었지만 정작 언론은 이에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남성 연예인이 대거 참여한 정 씨의 단체 채팅방의 내용이 공개되자 대화 속 등장하는 ‘여배우’에 관심이 모아졌다. 단체 채팅방에는 대화 참여자들이 준비하는 접대 자리에 ‘여배우’를 초대하려 했지만 ‘여배우’가 해외에 있어 아쉬워하는 반응을 담고 있다. 이후 연예인 A씨가 해당 여배우라는 소문이 퍼졌고 언론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그대로 기사화시키며 대중의 관심끌기에만 급급했다. 결국 A씨는 SNS를 통해 본인은 해당 사건과 관계 없음을 직접 해명해야만 했다. 근거 없는 억측으로 한 사람이 피해를 입었지만 루머 확산의 주체인 대중과 언론,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결국 언론사의 도덕적 해이가 피해자들에 대한 2차 피해를 가속화한 것이다.

언론사들의 행태에 SNS를 중심으로 ‘우리는 피해자가 궁금하지 않습니다’라는 캠페인이 펼쳐졌다. 피해자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사건의 초점은 피해자가 누구이며, 어떤 피해를 당했는가에 맞춰져서는 안된다. 모든 책임은 가해자에게 물어야 한다. 또한 언론이 피해자 중심의 보도를 멈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중 스스로 피해자의 신상을 보호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피해자가 누군지 궁금할 필요가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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