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그들의 이야기'를 꺼내보다
숨겨진 '그들의 이야기'를 꺼내보다
  • 오수정 기자 外
  • 승인 2019.03.25
  • 호수 1491
  • 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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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유관순, 윤봉길. 우리가 이 이름들을 곱씹을 때면 어느새 가슴 한구석 뜨거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처럼 알려진 독립운동가 외에도 각자의 삶을 통해 대한의 독립을 위해 힘썼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비록 교과서에서 찾아볼 순 없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항거의 외침을 드높인 ‘그들의 이야기’를 지금, 꺼내 보려 한다.

여성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여성은 소외돼왔다. 유관순 열사를 제외하고 여성 독립운동가를 떠올리기 쉽지 않듯 그동안 이들은 우리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영화 「암살」의 주인공 ‘안옥윤’의 실존 인물인 남자현 열사, 교과서에 소개된 김마리아 선생 등이 그나마 대중에게 알려졌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실제 우리나라 독립 유공 서훈자 약 1만5천여 명 중 여성은 357명으로 2.4%에 그쳤다. 그동안 여성 독립운동가가 주목받지 못한 이유로 김정인<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남성 중심의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독립운동은 ‘남성만 했을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여성 독립운동가 기념공연이나 기념 우표전시가 개최되는 등 여성 독립운동가를 조명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이 더 조명 받아야 하는 이유로 김 교수는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여성은 항상 배제돼있었다”며 “독립운동사를 완성하기 위해 여성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복원해야만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김 교수는 “현재 여성 독립운동가가 유관순으로만 대표되고 있다”며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남성 중심의 반쪽짜리 독립운동사를 완성하고 보다 넓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을 위해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
 

안경신 (1888~?)
▲ 안경신 (1888~?)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안경신은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 지역의 만세 의거에 참여한다. 이를 계기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해 군자금을 상해 임시정부로 전달하는 교통부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이것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자 대한광복군 총영에 가담하게 된다. 대한광복군 총영은 1920년 8월 미국 상하 의원단 100여 명이 동양 시찰차 조선을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의거를 계획한다. 그녀는 대한광복군 총영 제2대에 소속돼 평남도청과 평양부청 등에 폭탄을 투척한다. 임신한 몸으로 던진 폭탄은 불발로 폭파에 실패했지만 대한광복군 총영은 평남경찰부 일부를 붕괴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녀는 평소 조선이 독립할 길은 무력투쟁뿐이라 믿었고 이로 인해 임신한 몸에도 불구하고 폭탄 거사에 과감히 참여했다. 이런 그녀의 강력한 독립 의지에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오수정 기자 sujeong5021@hangyang.ac.kr
도움: 김정인<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사진 출처: 국가보훈처

외국인
외국인 신분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힘쓴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외국인 독립운동가는 거의 없다. 이들이 그동안 조명 받지 못한 이유로 한철호<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해방 후 친일파 청산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외국인 독립운동가 발굴 작업은 거의 이뤄질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외국인의 경우 후손이나 소재지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업적을 파악하거나 연구가 진행되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고 덧붙였다.

외국인 독립운동가가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것은 이들이 독립운동을 인류애적 가치의 관점에서 봤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 교수는 “외국인이 이해관계가 없는 타국의 국권 침탈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며 “이들은 독립운동이 인류 전체의 평화, 인권, 자유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더해 한 교수는 “이들은 일제의 만행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독립운동에 나섰다”며 “우리는 이에 대한 정당한 보답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인 독립운동가를 위해 선행돼야 할 것은 이들의 행적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한 교수는 “기록이 없는 외국인 독립운동가 분들의 행적을 앞장서서 발굴해내고 공개하는 일이 우선시돼야한다”고 전했다.

조지 루이스 쇼(1880~1943)
▲ 조지 루이스 쇼(1880~1943)

조지 루이스 쇼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 중국에서 무역업과 선박업을 하며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했다. 이륭양행이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쇼는 이륭양행 2층에 임시정부가 교통사무국을 설치해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쇼의 회사와 배는 치외법권 지역에 속했기 때문에 일본 경찰의 단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덕분에 상해 임시정부는 국내 독립운동단체와 연락할 수 있었으며 무기, 우편물, 자금 등을 운송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또한 김구, 박헌영 등의 독립운동가들 역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1920년 쇼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사실이 발각돼 일제에 의해 내란죄로 체포된다. 하지만 석방 이후에도 그는 압록강에서 변함없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정부는 쇼에게 1963년 건국 공로 훈장을 수여했으나 유족을 찾지 못해 정부가 보관하고 있었다. 정부의 오랜 추적 끝에 2012년 8월 쇼의 유족인 손녀와 증손녀에게 훈장이 전달됐다.

오수정 기자
도움: 한철호<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재외한인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재외한인들의 이름은 절대 빠질 수 없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던 1920년대 많은 독립 운동가들은 해외로 떠난다. 이런 독립 운동가들이 중국이나 만주, 미주 등 세계 각지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한인 사회의 전폭적 지원 덕분이었다. 이들은 비록 몸은 조국에 없지만, 조선인이라는 일념 아래 독립운동에 투신하거나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김도형<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은 “한인사회와 독립운동가들은 물과 고기의 관계였다”며 “그중에서도 특히 미주 한인사회는 ‘한인 독립운동 자금의 젖줄’이라고 불렸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들의 삶 역시 녹록지 않았다. 일본이나 중국, 동남아시아 등지로 강제징용·징병 된 사람이 많았고, 미주 지역으로 자발적으로 간 사람들도 대농장에서 일하며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도 그들은 조금씩 모아둔 돈을 독립운동자금에 보탰다. 해방 이후 조국으로 돌아온 이들도 있었지만, 삶의 터전이었던 곳을 떠날 수 없거나 조국으로 돌아올 여건이 되지 않아 그대로 남아있던 동포들도 상당수였다. 재외한인들은 우리와 같은 역사 그리고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 주목받지 못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김종림(1886~1973)
▲ 김종림(1886~1973)

김종림은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 20살이 되던 해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로 향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잠시 일하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북미로 이주했고 1912년부터 캘리포니아에서 벼농사에 착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 특수로 인해 쌀값이 폭등하자, 김종림은 사업가로서 크게 성공하고 한인사회에서 ‘쌀의 왕’, ‘재미동포 최초의 백만장자’로 불렸다.

성공한 삶을 살게 된 그는 민족과 조국을 돕기 시작했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고 비행기 부대를 편성하고자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종림은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과 의논해 자신의 농장에 비행 훈련장을 건설하고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했다. 이외에도 그는 흥사단 설립에 참여하고 대한인국민회와 조선의용대에 상당한 자금을 기부했다. 또한 북미 지역의 어려운 한인 동포를 구제하는 데 힘쓰며 민족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은 그는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정주엽 기자 jooyup100@hanyang.ac.kr
도움: 김도형<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사진출처: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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