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뒤에 사람 있어요"
"카메라 뒤에 사람 있어요"
  • 한대신문
  • 승인 2019.03.04
  • 호수 1489
  •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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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잃은 드라마 제작 현장

자신들이 만든 드라마의 성공에도 웃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2월 인기리에 종영한 SBS 드라마 「황후의 품격」 제작진이다.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황후의 품격」 마지막 회는 16.5%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는 같은 시간대 방송한 수목극 중 가장 높은 수치다. 시청률 1위 드라마를 만들고도 그들이 웃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방송 제작 현장에 만연한 ‘장시간 노동 관행’ 때문이다.

장시간 노동이 ‘관행’이라니
지난해 12월 「황후의 품격」 제작진은 방송사와 제작사를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고용노동부에 고발했다. 그들의 고발 취지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근로계약서 미작성, 두 번째는 장시간 노동이다. 현 노동법상 방송업계는 근로자의 주 68시간의 노동 시간을 지켜야 하지만 이들은 주 117시간을 근무한 것으로 드러났다. 방송 제작 현장의 열악한 근무 환경이 문제가 된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2016년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조연출로 일하며 장시간 노동 관행과 비정규직 계약해지 업무 등으로 괴로워하던 이한빛 PD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죽음으로 방송 제작 현장의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이름을 딴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이하 한빛센터)가 설립됐다. 한빛센터는 매년 이한빛 PD의 추모제를 열어 방송 산업의 문제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실효성이 없는 정부와 방송사의 약속
이에 정부 5개 부처 △고용노동부 △공정거래위원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문화체육관광부 △방송통신위원회는 문제 해결을 위해 ‘방송프로그램 외주제작시장 불공정 관행 개선 종합대책’(이하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방송 제작환경 개선 조항을 포함한 주요 대형 드라마 제작사의 드라마 제작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홍승범<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사무차장은 “오랫동안 관행처럼 이어진 방송 제작산업 문제에 정부가 나섰다는 점이 의미가 크지만 진행 과정을 보면 방송 산업의 현실에 맞지 않는 실효성 없는 대책만 내놓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가장 큰 문제는 종합대책의 적용대상에 CJ E&M이 지상파나 종편 방송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홍 사무차장은 “현재 방송산업에서 CJ E&M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고 기존의 제작사들을 적극적으로 인수하며 시장을 장악해나가는 모습을 보인다”며 “이런 상황에서 CJ E&M을 제외했다는 것은 산업에 대한 파악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방송사 역시 제작 환경 변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지만 말뿐이었다. 한빛센터에 접수된 SBS 「친애하는 판사님」 제작총괄 PD가 스태프에게 보낸 편지 내용에 따르면 SBS는 ‘300인 이상 사업장’과 ‘근로자성 인정’ 등의 근로기준법 조건과 무관하게 근로기준법 취지에 맞춰 드라마 제작 현장의 주당 68시간 노동시간을 준수할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외주 제작사 소속 또는 프리랜서 노동자가 상당수를 차지하는 프로그램 제작진의 노동 환경을 법적 차등 없이 개선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뜻을 밝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SBS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의 촬영 보조 스태프가 40도가 넘는 폭염에서 5일간 76시간 일하다 내인성 뇌출혈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근로기준법 개정됐지만 안 지키면 그만
근로기준법상 모든 근로자는 적정 근로시간을 준수해야 하지만 특례업종에 속한 근로자는 예외다. 지난해 7월 개정된 근로기준법이 시행되면서 ‘방송업’과 ‘영상·오디오 기록물 제작 및 배급업’이 노동시간 특례업종에서 제외됐다. 드라마 제작 스태프 역시 개정안에 포함된 ‘주 52시간 근무제’의 적용을 받게 된 것이다. 드라마 제작사는 지난해 7월부터 올해 7월까지 유예 기간을 받아 모든 사업장에서 주당 68시간을 초과해 근무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근로기준법은 무용지물이다. 박지순<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방송업계의 특성상 촬영 일정과 장소가 유동적이며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고 일하는 노동자가 많아 근로관계 역시 모호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 같은 이유로 정확한 근로시간 파악이 어렵기 때문에 근로기준법 준수 여부를 감독하기 어렵다”며 제작사와 방송사가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방송사와 제작사는 근로기준법을 아예 무시하거나 3일 동안 68시간 몰아서 근무하고 나머지 3일을 쉬게 하는 꼼수를 사용한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일괄수주계약 일명 ‘턴키계약’이다. 턴키계약이란, 드라마 제작현장에서 제작사가 조명·음향·장비 등 각 분야 방송 스태프와 일일이 계약을 하지 않고 중간에 팀별 감독급과 일괄계약을 맺는 것을 칭한다. 턴키계약을 맺은 근로자는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지 않는다. 이 경우 제작사는 사용자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이는 외주 제작이므로 총지시자인 PD와 방송국에 업무 환경에 대한 책임을 묻기 어렵다. 케이블 방송사에서 방송 제작 스태프로 일하고 있는 익명을 요구한 A씨는 “외주 노동자들은 전환율이 아주 빨라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다”며 “스케줄이 유동적이어서 근로 시간을 측정할 수 없다 보니 추가 수당도 없다”고 말했다. 턴키계약을 맺은 스태프들은 몇 시간을 일하든 같은 임금을 받는 터라 추가 근무 수당이 없다. 제작사와 방송사는 일당으로 계약한 스태프에게 2~3일 동안 20시간 이상 장시간 일을 했어도 2~3일 치 일당만을 지급한다.
 

방송 스태프들의 연대가 시작되다
한빛센터는 방송 제작 현장 노동자들의 제보를 받아 해당 제보에서 문제가 된 제작사와 방송사에 근로 환경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홍 사무차장은 “제보가 들어왔을 때 해당 사건 문제 해결에 그치지 않고 전반적인 드라마 제작 현장 개선으로 이어지게 하려고 한다”며 “사측에 문제 해결 촉구와 함께 협의를 통해 드라마 제작 가이드라인을 제정한다”고 밝혔다. 한빛센터는 지금까지 △CJ E&M △SBS △YG스튜디오플렉스 △몬스터유니온과 협의해 드라마 제작 가이드라인을 제정했다. 한빛센터는 제작사와 방송사에 적정 근로 시간 준수 외에도 A·B팀 운영을 통한 2교대 근무로 실질적 근로시간 단축과 스태프 협의회 설치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홍 사무차장은 “제작비용 증가가 부담스러워 많은 제작 현장에서 B팀이 운영되고 있지 않지만 실질적 근로시간 단축을 위해 꼭 필요한 시스템”이라며 인력 보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스태프 협의회 설치를 통해 드라마 제작 현장의 잘못된 관례를 없애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7월에는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이하 희망연대노조)가 출범했다. 최초의 방송 노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방송 제작 노동자는 대다수가 비정규직 노동자로 구성돼 있다. 그들은 일명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면 일을 구하기 어렵다. A씨는 “방송업계 특성상 건너건너 물어보면 다 아는 사이”라며 “평판이 나빠지는 것이 두려워 문제가 있는 걸 알지만 참는다”고 전했다. 이 같은 이유로 만들어지지 않은 노조를 연차 15년 이상의 스태프와 방송사 정규직이 힘을 합쳐 설립했다. 출범 이후 희망연대노조는 지속해서 기자회견을 열고 방송사 관계자와 면담을 요청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만재<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 조직국장은 “개인사업자로 취급되는 방송 제작 현장의 근로자들이 근로 계약자 형태로 전환하기 위해 희망연대노조가 노력하고 있다”며 “지난해 8월, KBS에 요청한 면담이 성사돼 우리가 요구하는 바를 전달했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묵인하게 했던 ‘관행’이라는 이름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방송 제작 환경 개선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며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 있다. 시청자를 웃게 하는 브라운관 너머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인권이 있는 촬영 현장이 당연해지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란다.

도움: 박지순<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홍승범<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사무차장
이만재<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 조직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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