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 부문 가작] 도로
[2018 한대신문 문예상 소설 부문 가작] 도로
  • 오태영<공대 융합전자공학부 18> 씨
  • 승인 2018.12.03
  • 호수 1487
  • 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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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주말에 우리 학교에 다녀왔어. 모든 게 그대로더라고. 하긴, 졸업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바뀌지 않은 게 당연하지. 떠나온 지 오래된 건 아마 나뿐일 거야. 학교는 매년 새로운 학생을 받고 보내는데, 난 어느 날 와서 어느 날 가 놓고는 완전히 가지도 못한 채 다시 돌아오고 말이야.

물론 좋았어.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겪더라도 여기만큼은 그리워할 거라는 예감도 들었어. 친구들도, 선생님도, 여기서의 인연은 나의 일부, 중요한 부분이 되어버렸다는 걸 어째서 이제야 깨달았을까. 알고 있었더라면 더욱 소중히 대했을까.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가장 익숙한 건 냄새였어. 익숙한 냄새에 온도에 빛, 소리에 둘러싸이니까 오래간만에 다시 내가 된 듯한 기분이었어. 1층 중앙의 그랜드 피아노는 아직도 안 고쳐져 있었고, 툭 하면 멈추곤 했던 엘리베이터는 역시 고장 나 있었어. 작년에 야심 차게 개장한 첨단기기 실험실은 여전히 비어 있었고, 입학처 교무실로 가는 복도는 여전히 어두컴컴했어.

학교의 어느 부분을 보든 기억이 담겨 있었지만, 나는 바로 5층 미술실로 올라갔어. 미술실은, 물론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우리가 밤새 프로젝트를 하던, 주말에 할 일 없이 그냥 나와 있던, 생일 파티를 하던, 그런 곳이야. 나 혼자 있기도, 우리 둘만 있기도, 너와 나의 친구들 모두 모여 있기도 했어. 물감과 붓이 널브러져 있는 교탁에 우리 드로잉북이 놓여 있더라. 종잇장이 그때보다 훨씬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어.

미술쌤 교무실은 어김없이 불이 켜져 있었어. 내년엔 기필코 일을 맡지 않겠다고 하시더니, 여전히 바쁘신가 봐. 문을 열기도 전에 크게 쌤, 하고 불렀더니 이게 누구야, 하고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어. 내심 쌤이 나를 반겨 주실까 걱정했는데, 그걸 듣고 바로 잊을 수 있었지. 쌤은 내가 교무실 문을 열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오셨어. 이게 아닌데. 내가 들어가고, 앉아 계시던 미술쌤이 모니터 너머로 반겨주시는 게 맞는데.

이제 대학생이니까 어른답게 악수하자, 말씀하셨어. 그것 외에는 미술쌤도 그대로셨어.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산발 파마머리, 검은색 작업복, 검은색 구두까지. 주름은 늘어난 것 같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흰머리가 눈에 띄었어. 원래 저렇게 많으셨나, 싶었지. 그래서 젊어지셨다고 말씀드렸어. 물론 믿지 않으셨지만 말이야. 오히려 한 대 얻어맞고 말았지 뭐야.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보셨어. 대학이 너무나 재미있다고, 오늘을 사느라 바쁘고 내일을 기다리지 못해 안달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예상했던 대로라고, 재미는 있지만 새로운 걸 배우진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렸어. 오히려 요즘 고민하고 있는 것은 밤에 가로등 켜진 도로가 내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정도라고 했지. 그랬더니 막 웃으시더라고. 나도 같이 웃게 되었어. 역시 너는 못 말린다고 말씀하시기에, 오죽 심심했으면 그랬겠냐고 항변했어. 대신 2학년 때부터는 성실한 대학생이 되겠다고 했어. 그랬더니 쌤이 아니라고, 너는 너대로가 제일 좋다고 말해줬어. 그 순간만큼은 웃지 않으셨어.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는데 막상 돌이켜 보니 기억나는 게 없네. 할 말도 많았고 풀어놓은 말도 많았는데 말이야. 이런 대화가 진짜 좋은 거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정말 내가 맑아진 듯한 기분이었어.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던, 있는지도 몰랐던 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거. 뭔지 알지? 그때 너도 왔더라면, 하고 생각이 들었어.

미술쌤과는 저녁을 먹고 나서 헤어졌어. 쌤은 출근 도장을 다시 찍고 미술실로 올라가셨고, 나는 그만 가려고 본관을 나왔어. 하늘이 마침 붉게 물들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네 생각을 했어. 너는 해가 비스듬히 떠 있을 때를 가장 좋아했잖아. 사물이 가지는 진정한 색이 드러나는 때라고 말이야. 나는 해가 지고 난 바로 다음을 제일 좋아했고. 하늘은 아직 파란데 가로등은 켜지는 바로 그때. 우습게도 나의 이유는 모든 사물의 색이 희미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었어. 우린 어쩜 이렇게 비슷한 듯 달랐을까.

정문으로 가려는데 왼편에 주차장이 눈에 들어왔어. 그 뒤에 있는 담장도. 우리 학교는 언덕에 홀로 우뚝 서 있어서 어차피 주변에 빠져나갈 데도 없지만, 사람 가슴 높이의 담장이 굳이 둘러싸고 있었어. 근데도 주차장 쪽의 담장만큼은 낮았고, 가파른 경사에 있지도 않았지. 그쪽으로는 빽빽한 숲이 있었고, 나무들을 자세히 보면 그 사이로 길이 있는 것만 같았어. 사람이 다녀서 생긴 게 아닌, 나무들이 자라면서 만들어낸 길. 우린 그 길이 어디로 향할지 궁금했어. 그래서 지도를 찾아보는 대신, 직접 담을 넘어서 그 길을 밟았어.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다음에 조심스레 담을 넘었어. 그땐 수월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팔이 떨렸어. 너무 오랜만이었나 봐. 3학년이 되고 나서부터는 잘 오지 않았으니까 오랜만이기도 하지. 이 길도 처음 왔던 그 날과는 살짝 달라 보였어. 무엇이 달랐는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조금 걷다 보니 공원이 나왔어. 이젠 사람들이 꽤 많이 찾아오는 것 같더라. 그땐 아무도 오지 않는 공원이었는데, 벤치에도 잎과 먼지가 쌓여 있고 길에 흙도 두툼해서 마치 이 공원 전체가 우리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았어.

우리가 친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어. 입학하고 한 학기가 넘는 시간 동안 같은 반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잘 몰랐는데, 가을이 와서야 어쩌다가 대화를 나누게 된 거야. 그것도 기숙사 4층 데크에서.

학교 바깥, 언덕 아래 공원과 숲, 그리고 도로를 향해 나 있는 발코니를 우린 그렇게 불렀어. 안전상의 이유로 출입을 금지해 놓은 그곳을, 나는 굳이 문 따는 법을 알아내서 들어갔지. 근데 네가 그때 이미 그 안에 있었어. 너도 놀랐고 나도 놀랐어. 누군가 있을 줄 몰랐던 거야. 우리 아직 학교 규칙을 무서워하고 있긴 했나 봐. 하긴, 그때만큼 기숙사 사감이 드셌던 적도 없었지.

그때 우린 처음 대화다운 대화를 나눴어. 왜 여기 왔는지부터 이야기했어. 실은 우리 둘 다 딱히 이유랄 만한 걸 가지고 있진 않았는데 무슨 대화를 그렇게 오래 했는지. 아마도 서로를 충분히 궁금해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

4층 데크가 높은 데 있긴 했지만, 뚫린 하늘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분명 거기에서 볼 수 있는 경관은 딱히 좋다고 할 만하지 않았어. 학교 담장 너머 언덕 아래의 숲과 공원만 보였더라면 훌륭했겠지만, 그 외에 차가 쉴 새 없이 지나다니는 6차선 도로가 무심하게 가르고 있었어. 도로 자체도 흉했고, 차가 거세게 다녀서 무척 시끄럽기도 했어. 저기 대체 왜 공원을 만들었나 궁금해질 정도였지. 그런데도 그 모습을 보려고 우린 둘 다 온갖 수고를 거쳐서 굳이 데크로 왔어. 심지어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하기까지 했지. 그러면서도 이유는 없었고, 그 없는 이유에 대해서 대화를 계속 나누고 있었던 거야.

여섯 시 반이 지나니까 공원 중간중간과 도로에 일렬로 서 있던 가로등이 문득 켜졌어. 해와 함께 빛이 가라앉자, 담장 너머 반짝이는 빛으로 가득한 세상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 해가 비출 때와 가로등이 비출 때의 모습은 확실히 달랐지. 가로등은 그 장소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모습만 한껏 담아내어 우리에게 보냈어. 그걸 본 순간 대화를 멈추고 잠시 그걸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어. 힐끗 너를 봤는데, 그 자그만 불빛들이 네 눈에도 담겨 있는 게 보였어. 그걸 보고 어떤 확신이 들었지. 그 확신은, 너에게 나에 대한 그 어떤 것을 말하더라도 네가 이해할 수 있다는, 그런 막연한 것이었어.

공원에 눈을 떼지 않은 채, 저기에 가자, 내가 말했어. 너는 지금? 이라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그렇게 우린 몰래 기숙사를 나왔어. 들킬까 봐 겁도 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추지는 않았어. 담장이 다른 곳보다 현저하게 낮은 곳을 골라서 뛰어넘었고, 그게 주차장 쪽 담장이었어.

나무들이 만들어 놓은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르지만, 모른다는 사실 자체에 우리는 흥분되어 있었어. 주위는 점점 어두워져서 초점이 잘 안 잡히고 공기도 차가워지고 있었어. 그때 그 숲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우리에게 무언가 보여 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빛을 머금고 있었어. 나뭇가지들이 만든 지붕 아래로 걸음을 옮겨서 안으로, 또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어.

오르막을 걷다가 다시 내리막을 걷다가,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어느새 생긴 흙길을 걷다 보니, 공원이 어느 한순간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어. 크진 않지만 그리 작지도 않은, 검은색 철제 가로등이 군데군데 박혀 있는 공원이었어. 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관리가 없었다는 게 느껴졌어.

아마 그때 우린 아이처럼 휘둥그레진 눈으로 구석구석을 담아내느라 바빴을 거야. 담장 너머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언제나 있어왔던 그곳이, 이러한 풍경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공원 가장 높은 곳의 벤치를 골라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어.

네가 멀리 보이는 학교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기에, 뭘 그렇게 보냐고 조심스레 물었어. 여기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저기서 내가 해야 했던 일,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이 모두 저기에만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 네가 말했어. 사실이었어. 학교와 공원은 바로 옆에 있지만, 공원에 있던 우리는 학교와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었어. 그곳에서는 학교의 모든 것들을 생각하고 있지 않아도 되었어.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는 꽤 늦은 시각이었어. 열 시는 넘었던 것 같아. 야간 자습에 왜 안 왔냐고 묻는 사감한테 너는 방에서 자다가 못 나왔다고, 나는 본관에서 자다가 못 나왔다고 했어. 말은 태연하게 했지만 실은 무섭기도 했어. 밤에 둘이서 자습을 빠진 것도 모자라 외출을 했다는 게 걸리면 징계까지 갈 수도 있었거든. 다행히도 사감은 우리의 거짓말에 꼬투리를 잡지 못했어. 벌점이나 조금 받고 말았지.

그 이후로 우린 자주 나왔어. 담장을 넘어 공원에 가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나와서 최대한 멀리 가 보기도 했지. 어딘가로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지만, 네가 없었다면 나 혼자서는 하지 않았을 거야. 네가 한동안 나를 바라봐 주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말해 주었어야 했는데. 그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알고 있었어야 했는데.

한창 대화하다가 잠시 멈추게 될 때, 잠깐 주위를 둘러볼 틈이 날 때면 너는 항상 내 이야기를 해 주곤 했어. 내가 듣는 음악이 좋다, 내 특유의 체취가 좋다, 이 옷이 마음에 든다…. 너는 좋아하는 것도 참 많았어. 그것뿐만 아니라 대뜸 자전거 타고 나가자고 할 때도 좋다고 했고, 음악실에 가서 피아노를 쳐 달라고 할 때도 좋다고 했어. 내가 한창 책을 읽고 있으면 너도 책을 꺼냈고, 미술쌤이 준 노트에다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면 너도 노트를 꺼냈어. 지금도 그때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네가 어째서 그렇게 좋아했는지. 내 음악은 우울하고, 옷은 추레한데 말이야.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야. 나보다 훨씬 멋진 애들도 학교에 많은데. 그런데도 너는 매일매일 새로운 말을 해 줬고, 나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꼬박꼬박 너의 들었어.

마치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우린 항상 같이 다녔어. 고맙게도 우리 둘이 다니는 것을 보고 걱정하거나 간섭하는 선생님은 없었어. 친구들조차 놀리지 않았어. 오히려 응원을 받았다고나 할까. 쌤이 말해 줬던 게 기억나. 사람마다 그 사람 고유의 색상이 있는데, 너희 둘은 그 색이 참 잘 어울린다고 했어. 우리의 색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이 참 마음에 들었어.

우리가 어떻게 멀어지게 되었는지, 솔직히 말해서 이젠 모르겠어. 마음의 크기에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네게 말했던 사실을 알 뿐이야. 너를 만나러 도서관에 들어가기 전, 네가 그 안에 있다는 게 몹시 부담이 된다고 느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 이젠 나만 보면 눈물을 참지 못하는 네게, 다른 아이에게 마음을 주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던 것마저도 그저 사실로 기억으로 있기만 하고, 더는 경험으로서 다가오지 않아.

다른 아이를 찾아보라고 말했을 때는 작년 말이었어. 한창 입시 준비로 참 바빴었는데. 바빠서 너를 멀리했다는 건 아니야. 오히려 나한테 그때만큼 학교가 편안했던 적도 없었어. 글쓰기에 취미를 막 붙여서 한창 이것저것 써 볼 때였고, 좋아하는 작가가 여럿 생겨서 그걸 읽기에도 벅찼지. 일과가 끝나고 나면 내 방, 417호로 친구들이 모였어. 3년 동안 서로를 너무 잘 알게 된 친구들 말이야. 나까지 여섯 되는 친구들은 면접 준비를 핑계로 모여서 시시콜콜하게 떠들었고, 술을 구해다가 마시기도 했어. 유일하게 신경 쓰였던 건 너를 대할 때였어.

너를 더는 아끼지 않았던 나를, 넌 한동안 바라봐 주었어. 우리가 목표로 했던 대학 결과가 나왔을 때 나는 기숙사가 아니라 집에 있었지. 나는 떨어지고 너는 붙었어. 그때 휴대전화에 뜬 네 이름을 보고 한숨과 함께 네 전화를 받은 나와 달리, 너는 내 결과를 알고선 울먹이며 말했어. 별 내용은 없었어.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고, 우리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말할 뿐이었지. 그게 뭐가 그렇게 슬프냐는 내 말에 너는 잘 모르겠다고 했어. 그냥, 이렇게 될 줄은 너무 몰랐던 것 같다고 뜻 모를 소리만 했어. 난 기계적으로 너를 달래고는 잠을 청했어.

그다음 주에 네가 쪽지를 줬어. 나는 너를 의도적으로 멀리하고 있었지만 너는 그때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울거나 우울해하지는 않았어. 그런 너를 보니 마음이 한결 편했어. 그러다가 네가 먼저 말을 꺼냈던 거야. 할 얘기가 있다고 그랬어.

다른 애가 생겼다고, 네가 수줍게 말을 꺼냈어. 조용하지만 유머 감각을 가졌고, 공부도, 코딩도 잘했고 기타도 무척 잘 치는 애였어. 공교롭게도 그 대학에 합격했기도 했지. 그런 것들이 이유가 되진 않았을 거야. 그런 걸 모두 빼고도 걘 좋은 애였거든. 그 애 이야기를 하는 널 보며 문득 이게 얼마 만에 보는 밝은 모습인가 싶었어. 그랬기에 진심으로 응원했어. 그리고 부러워했어. 사랑을 할 줄 아는 너를. 나 때문에 분명 아팠으면서, 힘들었으면서 사람에게 다시 애정을 가질 줄 아는 네가 참 부러웠어.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어. 일기라도 쓰고 싶었는데, 말처럼 쉽지 않더라고. 내가 일기조차 쓰지 못할 줄이야. 실어증이라도 걸린 줄 알았어. 무슨 글이든, 쓰고 나면 마음에 들지 않아 지워버렸어. 소설에는 아무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고, 일기는 도무지 솔직한 것 같지가 않았어. 무얼 하든 흥이 나지 않아서 글이라도 써 볼까 한 것이었는데 말이야. 아무리 유명한 영화를 틀어도, 아무리 쉬운 책을 펼쳐도 재미가 붙지 않았어. 오늘 학교를 찾아오기 전까지 계속 답답한 속으로 그저 시간을 보내오기만 한 거야.

며칠 전 노트북을 붙잡고 뭐라도 써 보려고 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파일 정리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문서 폴더를 열었어. 거기에 네가 보낸 텍스트 파일이 있었어. 순간 뭔가 싶었지만, 그 대화를 하고 일이 주 정도 지난 후에 네가 보낸 거라는 걸 금세 알 수 있었어.

내가 골라 준 노래를 듣는 게 좋다고 편지는 시작했어. 그날따라 일찍 눈이 뜨였는데, 멍하니 누워 있다가 내가 넣어준 음악을 들었다고 했어. 그러면서, 최근에 나를 피했다고 말을 꺼냈어. 내가 너를 피하는 것 같아서 그냥 그렇게 피했다고 말이야. 나랑 눈도 안 마주치고 지내는 게 나름 버티기 괜찮았다고 했어. 이전이랑 참 다르게도, 라고 덧붙여져 있는 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런데도 너는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했어. 내가 요즘 쓰고 있는 글이 뭔지, 요즘엔 무슨 음악을 듣는지 궁금하다고 했어. 다시 산책하러 가서 별거 아닌 것들로 웃고, 떠들고 싶다고 했어. 정 뗄 대로 떼어 버린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하는 건지, 뭐라도 말해달라고 편지에는 쓰여 있었어.

그래, 맞다. 네게 다른 애가 생기고 나서 너를 무척 싫어했었지. 그것마저 잊고 있었는지조차 잊고 있었지 뭐야. 왜 싫어했을까. 무엇이 잘못되었나. 당시 나의 판단과 감정을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젠 중요하지 않아.

그때 답장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항상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은 너였어. 내가 답장을 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손을 내밀었지. 나는 그것조차 거절했고. 그렇게 지금의 나는 그때 듣던 음악을 아직도 듣고, 그때 읽던 책을 뒤적이고 있어. 무슨 글을 써야 하는지도 모르고, 내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몰라. 이렇게 길게 글을 쓴 지도 얼마나 된 건지 가늠해보고 싶지도 않아.

결국 나는 내가 멀리했던 너를 다시 그리워하고 있었던 거야. 너와의 대화를 기억나는 대로 끄집어서 곱씹어 보고, 그때의 풍경을 찾아 돌아오면서. 내가 봐도 내 꼴이 말이 아니다 싶어.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네가 당시 느꼈을 감정, 사랑이라는 무거운 이름을 붙여도 될 그 감정을 약간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 네겐 닿지 않을 말들을 이렇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조차 모른 채, 혼자 끼적이면서도 돌아 볼 수 있다는 게.

그래. 아직은 네게 말을 걸고 싶지 않아. 지금 다가갔다가는 이 기억들이 내가 지금 느끼는 것만큼 네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아서. 아직 완전히 영글지 않았기에 그저 그땐 그랬지, 정도로 끝날까 봐.

우리가 앉아서 학교를 바라보던 벤치에 앉아서, 지금은 그 옆 도로를 보고 있어.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지나다니는, 주변의 산과 공원과 숲을 모조리 무시하고 일직선으로 나 있는 그 도로 말이야. 자습을 끝내고 4층 데크 난간에 기대어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도로를.

그렇게 도로를 보고 있다 보면 무척 다양한 차들을 볼 수 있었어. 그렇게 보다가 문득 궁금해하는 거지. 저 차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간혹 눈에 띄게 느린 차는 있어도 멈추어 서는 차는 없었어. 3년 동안 교통사고 한 번 일어나지 않았지. 그 긴 기간 동안 우린 많이 바뀌었을 텐데, 이 도로만큼은 그대로였어.

빠른 차, 느린 차, 택배 트럭, 마을버스, 고속버스, 소형차, 대형차… 모두 눈에 담느라 바쁠 때면 우린 둘 다 말을 꺼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어.

우린 이제 서로 대화하지 않고, 나는 저 도로를 타고 그대로 올라왔지. 너는 반대 방향으로 내려갔어.

어느 날엔 네가 대뜸 고개를 돌렸어. 내게로 말이야. 바람이 정말 무섭게 부는 밤이었어. 바람 소리가 도로의 소리를 모조리 덮어버릴 정도였지. 그런데도 넌 굳이 크게 말하려 하지 않았어. 오히려 속삭임에 가까웠어.

우리가 언젠가 저 도로를 지나면서, 저기 그대로 머무를 수 있었더라면, 하고 생각하게 될까?

나는 빠짐없이 들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어. 잠시 뒤에 다시 도로를 바라봤지. 너도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았어. 그때 네가 그래 주어서 고마웠어. 그래,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건가. 네가 그때 그렇게 있어 주어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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