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한대신문 문예상 시 부문 대상] 독(讀)의 건너편
[2018 한대신문 문예상 시 부문 대상] 독(讀)의 건너편
  • 양진호<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2기> 씨
  • 승인 2018.12.03
  • 호수 1487
  • 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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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대나무들이 저린 몸을 뉘어
푸름에 지친 볕에게 침상을 놓아주었으나
오월의 독서는 손이 많은 덩굴이라
끊어진 마디에도 침 뭍은 검지를 내리며
그 길을 따라 종이를 넘고 서재를 지나
툇마루에 또아리를 튼다
볕은 땀에 전 갓과 수염도 벗지 않고
눈 밑에 무거운 기미도 따내지 않고
숲의 정사政事는 마루 아래 팔자걸음으로 벗어놓은 채
마당 한가운데 모란에 줄기를 뻗는다
검은 대나무는 길 속에 허방을 만들어 놓았지만
모란은 허방 속에 길을 만들었다
독서욕이 칭칭 감은 몇 채 헛간부터
공맹의 서당이나 석가의 보리수 그늘이
느린 볕마냥 아늑하게 바랐지만
입술 질끈 깨물어 영원에 핏빛 한 번 물들이는
모란의 속에는 한 번도 들지 못했다
저 화분도, 가지와 줄기도
제 속에서 나온 등불을 한 철도 견딜 수 없어
계절에 돋는 달콤한 상처를 모른 척한 거다
초경하는 모란을 달래려
볕은 서재에서 바람 한 줄기를 꺼내온다
바람은 둔부나 입술에는 닿지 않고
은은한 머리맡에 닿는다
곱게 땋은 향기는 다음 계절로 이어지는 동아줄
몸 가진 것들이 붙들 수 없는 투명한 혈관
오늘도 볕은 입술을 거르고
길게 늘어진 허방을 슬며시 감싼다
그때 모란은 입술 한 장 내어주며
필멸의 색을 고스란히 새겨 넣는다
서재를 벗어나 마당에 뿌리내린 노송이
찰나를 놓친 벌로 굵은 우듬지에
찰랑거리는 주석을 수없이 달아놓고 있다


* 겸재 정선의 「독서여가」를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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