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부문 우수상] 영화 「버닝」 비평 -예술의 실천적 의미를 위하여-
[2018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 부문 우수상] 영화 「버닝」 비평 -예술의 실천적 의미를 위하여-
  • 박홍주<경영대 경영학부 14> 씨
  • 승인 2018.12.03
  • 호수 1487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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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질적으로 무슨 소용이 있는지 자문해보자. 우리는 공기를 마시듯 자연스럽게 문화와 예술을 접하고 살지만 재미와 감동 정도로만 예술의 효용을 짐작하곤 한다. 그러나 작가는 기민하게 포착한 당대의 모습을 작품으로 구현해 묘사한다. 또한 앞으로의 변화를 예리하게 감지하고 나름의 청사진을 제시하여, 우리를 이끌기도 한다. 다시 말해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예술은 그것이 형성되고 향유되는 시대적 맥락과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점에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실천적이다.

영화는 영상, 음악, 이야기 등이 자본을 매개로 집약하는 총체적 예술이기에 시대상을 가장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올해 나온 한국영화 중 단연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버닝>이 비슷한 시기의 다른 영화들은 물론이고,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과도 차별화되는 것은 넓은 포괄성과 개방성이다. <버닝>은 하나의 사건과 주제에 천착하기보다는, 마치 감독의 눈으로 오늘날 한국사회 전반을 관찰한 후 하나의 이야기 속에 그 모든 것을 녹여낸 백서(白書)와도 같다.

청춘의 시대정신

'청춘'이라는 키워드는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예술의 테마이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유독 활발히 사용되었다. 이른바 '유스 컬쳐(Youth Culture)'다. 지난해, 대중가요에서 아이유와 혁오는 본인들의 나이를 내세워 청춘(Youth)를 테마로 음반을 발표했고, 디뮤지엄(D'museum) 역시 같은 테마로 전시를 한 바 있다. 고샤 루브친스키(Gosha Rubchinskiy)나 슈프림(Supreme)을 필두로 패션 문화 내에서는 역동적으로 트렌드가 발전해왔다.[1] 청춘이 대변하는 하위문화적 가치가 주류문화와 융화되어 편입되는 이러한 경향은 기성 담론이 전복적이고, 반 체제적인 성격의 하위 담론을 지속해서 억누르고 있을 수 없다는 방증이다.

대중문화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청춘'은 주로 무모하고 충동적이며, 불안하면서도 화려한 모순적인 모습이었다. <버닝>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종수(유아인 분)와 해미(전종서 분)는 모두 열악하고 불안정한 현실에서 고민하고 좌절한다. 벤(스티븐 연/연상엽 분)도 마찬가지다. 앞선 두 인물과 달리 경제적으로 여유 넘치는 삶을 사는 그는 인생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재미만 추구한다. 공허하고 불확실한 내면을 가졌다는 점에서 세 인물은 모습만 다르게 표현되었을 뿐, 기본적으로 동일한 토대에 서 있는 셈이다.

이창동 감독이 언론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직접 언급했고, 많은 관객들이 인식하고 있다시피, <버닝>은 기본적으로 청춘들의 방향 없는 분노와 목적 없는 공허함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분노와 공허는 자본격차의 고착화와 계급갈등 등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종수는 대남방송이 들리는 파주 시골집으로 돌아와 살면서 택배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는 작가 지망생이다. 벤은 서래마을에 살고 고급 외제차를 몬다. 그는 직업이 무엇인지, 심지어는 일을 하긴 하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할 정도로 자유로우면서도 경제적으로 여유롭다. 해미는 계급적으로는 종수와 비슷한데, 삶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갈구하면서도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물들을 '종수-해미 대 벤'의 계급적 이분법으로만 간단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각 인물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종수는 소설을 쓰기 위해 자신을 둘러싼 미스터리와도 같은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 구속된 그의 아버지(최승호 분)와 마찬가지로 종수는 내면에 분노가 잠재되어 있다. 그는 아무도 없는 본가로 돌아가 소를 돌보는데, 이후 종수의 내면이 변화할 때쯤 소를 처분하게 된다. 이때 소는 니체가 정신의 변화 중 첫 번째 단계로 지적한 낙타를 떠올리게 한다.[2] 영화는 종수의 시선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관객은 종수에게 이입을 하게 된다. 즉, 종수가 안개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결단을 내리고 해미의 집에서 소설을 써내려 가기까지의 예술 창작의 과정이, 실존하는 갈등의 해소와 결부되는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벤에게 느끼던 적대감을 터뜨린 종수는 비로소, 실체를 알 수 없는 권위처럼 자신을 옥죄던 부조리를 거부하는 사자가 된다. 그 장면이 실제인지 종수의 상상인지는 중요치 않다. 종수는 자신이 원하는 소설을 쓰는 예술가에 가까워져 간다.

한편 영화의 첫머리에 마치 낙타처럼 짐을 매고 걸어가는 종수를 따라, 관객은 호객 아르바이트를 하는 해미를 만나게 된다.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없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해미의 말장난은 <버닝>의 인물들을 관통하는 대사다. 해미는 부재를 잊기 위해 노력한다. 거대한 남산타워에 반사된 빛은 해미의 북향집으로는 하루 두 번만 겨우 들어올 뿐이지만 기꺼이 기다린다. 변변치 않은 형편에 빚이 있지만 도피하듯 아프리카 여행을 떠난다. 성형수술로 외적인 자존감을 채우는 듯했으나 결국 그 외면을 모든 타인에게 전시하는 노동을 한다. 이러한 모순이야말로 계급적 소산이자 경제적 합리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이러니다.

종수는 벤을 개츠비에 빗대어 "우리나라에는 개츠비가 너무 많다"고 자조한다. 이는 그의 분노가 사실 벤이라는 가시적인 개인이 아니라, 실체조차 불분명한 구조적 모순을 표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벤은 마치 남산타워 외벽에서부터 비쳐 드는 한 줄기 얕은 햇빛처럼, 해미가 의지하고 세상에서 도피해 향하고자 하는 존재다. 또한 종수로 하여금 그를 무너뜨리고 싶어하면서도 닮고 싶은 양가적인 감정을 갖도록 하는 기득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자신은 가벼운 유희 이외에서는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하는 깊은 공허함을 갖고 있다는 사실 역시 시대를 반영하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는 어슴푸레한 푸른 빛을 바라보며 부질없는 희망을 갖는다. <버닝>에서 묘사되는 강남의 개츠비는 그 자신이 대책 없는 희망의 불빛이 되고, 욕망과 증오의 양가적 감정의 대상이 된다.

<버닝>이 묘사하는 청춘의 모습은 여느 예술 작품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본질이 철없는 치기나 변덕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구조적 긴장을 반영하는 일종의 '섬세한 거울'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종수의 아버지는 공무원을 폭행하고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법의 심판을 받는다. 폭압적인 국가권력의 핍박을 견뎌낸 세대를 상징하는 종수의 부친과 달리 종수를 비롯한 중심 인물들은 직접적으로 분노할 대상이 부재하다. 종수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은퇴기에 접어든 베이비붐 세대를 대표한다. 독재국가의 폭력적 공권력에 공분하지만, 동시에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대남방송이 들리는 파주의 집에서 자연스럽게 체제 갈등을 체험한다. 분노를 만들어내는 부조리는 존재하는데, 그 부조리가 너무나 근원적이고 광범위하게 뿌리 박혀 있기에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기'를 택하게 된다.

또한 종수가 아버지의 분노를 물려받고, 심지어 아버지의 칼을 물려받아 결국 벤을 살해하게 된다는 점에서, 작중 그려지는 청춘의 시대정신은 오히려 앞선 세대를 통해서 상당 부분 규정된다고 예상할 수 있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이듯, 종수는 불가해한 미스터리를 칼을 사용해서 나름대로 결정지으려고 한 것이고 이는 영화 초반에 아버지의 칼을 발견하면서 이미 암시되어 있다. 반면 벤은 용산참사를 소재로 한 그림을 옆에 두고 가족들과 식사를 한다. 사회적 참사조차 감각적 유희로 소비할 뿐인 사람들이 분명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적합한 방식은 벤의 말마따나 "가슴에서 베이스를 느끼"도록 끝없이 유희에 침잠하는 것일 수도 있다. 원작 소설과 함께 혼합되어 영화에 반영된 것으로 알려진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방화(Barn Burning)>에서는 피착취계급인 주인공의 아버지가 방화를 통해 다소 무모하게 부조리에 저항한다. 결국 방화라는 분노의 표출은 세대를 건너 일종의 엄숙한 의례가 된다. 동 세대간 수평적 갈등은 일정 부분 부모 세대에 수직적으로 기인했고, 끝내 그 갈등과 긴장 자체가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양한 상징을 통한 넓은 해석의 폭

<버닝>은 영화 곳곳에 은유와 상징이 쓰였다. 심지어 작중 대화로 직접 메타포를 언급한다. 기본적으로 젊은 세 남녀를 묘사하며 현실의 청년층을 표현하면서도, 해석에 따라 의미의 확장이 유연하게 가능하도록 기술적 장치도 마련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고양이 메타포가 있다. 해미가 기른다는 고양이 '보일이'는 결코 종수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후반부에 벤의 집에서 처음 보게 된 고양이가, 해미가 말했던 보일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그 고양이가 보일이가 맞다면, 벤이 해미를 살해했을 의심이 굳어질 수 있다.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다. 물론 보일이와 상관 없는 고양이일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하나의 의도된 시나리오가 있고 그것을 감추었다기보다, 해석의 개방성 자체가 시나리오인 것이다. 고양이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의미한다. 해미의 집에서 직접 확인하지 않았던 이상, 벤의 집에 있는 고양이가 보일이인지 여부는 물론 보일이가 실제로 있기나 한 건지도 확신할 수 없다. "진실을 얘기해"보라던 해미는 모호하게 알던 것, 잘 기억나지 않던 것을 어떻게든 하나로 결단 내리라고 종수에게 촉구한다. 분명한 실체로서의 진실이 존재할 것만 같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있든 없든 사실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고양이 보일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암시된다. 이는 결국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종수가 벤을 규정짓고 행동하는 결단으로 귀결된다. 또한 '보일'이라는 이름은 고양이를 발견한 보일러실에서 따온 것인데, 의미적으로 끓는다는 의미를 담고 이미지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의 '버닝'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소설 <헛간을 태우다>에서 가져온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의 골격인 '비닐하우스 방화' 모티브도 대표적이다. 실제로 외딴 들판에서 버려진 채로 볼 수 있는 물리적인 비닐하우스일 수도 있다. 혹은 내부가 대강 들여다보이는 연약하고 공허한 구조물이라는 특성이 암시하듯, 일종의 존재론적 위기를 겪는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연출된 촬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종수가 비닐하우스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비닐하우스에 비친 종수의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섬뜩한 감정을 유발하는 장면은 영화의 기본 소재인 비닐하우스를 통해서 종수의 불안, 양가적 감정, 무의식에서 중첩된 모순적 자아 등을 시각화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한편 해미가 주장한 우물 에피소드는 세 가지의 기능을 한다. 고양이 상징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식에 의심을 던지면서, 해미의 형편을 시각화하여 보여주고, 종수로 하여금 소설 창작을 시작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우물이 실제로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거니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다만 해미에게서 메시지를 받은 종수가 그것을 어떻게 정의하고 결정하느냐의 문제에 더 가깝다. 또한 해미가 북향집에서 하루에 두 번 빛을 반사하는 남산타워를 바라보았듯, 먼 곳에서 막연히 다가오는 빛에라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유약한 처지가 '우물'이라는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다. 우물에 빠져 구원을 기다리는 해미의 처지는, 종수에게 불가해한 세상을 이해하여 비로소 소설로 쓸 만한 소재를 기다리는 자신의 처지를 상기시켰을 것이다.

종수가 살게 되는 파주의 집은 북한의 대남방송이 들리는 곳이다. TV 뉴스를 볼 때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극단주의적 정치에 관한 뉴스가 소개된다. 종수로 대표되는 한국의 20대는 대북관계와 미국 등 국제정치의 시류에서 과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 되묻게 된다. 도널트 트럼프의 집권과 최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은퇴 암시(트럼프 당선과 <버닝> 개봉으로부터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트럼프로 상징되는 국제적 기조, 시대정신과 다를 것이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시기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등의 상황은 <버닝>에서 이야기하는 분노의 구조적 근원을 한 눈에 확인할 만한 사례다.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개별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얽히면, 원인 모를 불안의 한 층씩을 보태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치 먼 곳에서 다가오는 파도(뉴웨이브)가 쌓이고 쌓여 이곳의 '나'를 덮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 두려움과도 같다. 청춘이 가진 분노와 불안의 원인으로 사회구조적인 요소를 지목한 <버닝>의 가장 노골적인 대목이기도 하다.

다만 이미 그 자신이 거장이자 영화계의 어른이 되어버린 이창동 감독이 바라보고 반영한 사회상이 다소 작위적이고 비일관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은 아쉽다. 예컨대 해미의 직장 동료의 입을 빌려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모순적인 시선을 지적하는 장면이 그렇다. 옳은 말임에도 영화의 전개 도중 따로 돌출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면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서 그려진 여성 캐릭터들은 그 자신의 지적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의 여성 캐릭터들은 성적으로 대상화되거나 성격이 평면적으로 묘사되었다.

단 <밀양>과 <시>에서 원톱으로 전면에 나선 주인공들은 죄악과 구원을 질문했고, 특히 <시>의 양미자(윤정희 분)는 문학의 실천적 가치를 속죄로 풀어내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본작의 시선은 이창동 감독 작품세계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는 발전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수동적이고 획일적이던 캐릭터들이 입체감을 얻고 보다 근원적 가치에 대해 질문하는 연속인 것이다.

그 밖에도 종수가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니면서까지 비닐하우스 방화를 확인하려고 하고, 해미의 실종과 관련해 벤을 의심하기까지의 과정이 충분한 개연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많은 디테일이 생략된 채 스릴을 주었던 원작의 공백에 영상으로 디테일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미흡함이다.

예술의 실천적 수용

살펴본 바와 같이 <버닝>은 2017~2018년의 대한민국을 '청춘'이라는 키워드로 담아낸 이창동 감독의 총평이자, 구조적 모순으로 발생하는 분노에 대한 일반적인 진단이다. 동시에 <버닝>을 비롯한 다방면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어떤 패러다임 자체가 반성의 대상으로 부상한다는 것은 그 패러다임이 몰락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3]

<버닝>에서 종수는 소설을 쓰고 싶어하지만 무엇을 써야 좋을지 갈피도 잘 잡지 못한다. 그러다가 해미와 벤을 만나고 존재의 위기를 겪다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해미가 없는 해미의 방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장면은 자신을 둘러싼 수수께끼같은 세계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결정이란 다시 말해 수용과 탐색을 넘어선 적극적인 의사의 피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버닝>의 종수와 같이 현실의 위기와 예술적 아이러니를 연결 지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도 우리를 둘러싼 상황에 결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이것은 매우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문학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윤리와 가치관으로 현실의 제도 및 개개인의 이해관계를 함부로 재단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듯, 예술을 현실 해석의 직접적인 수단으로 삼기엔 부족하다. 이것이 뛰어난 예술적 안목과 식견을 지닌 이들이 현실 사회에 대한 분석과 해석에 때때로 오류를 남기는 이유의 일부분일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을 통한 현실의 파악과, 현실에 바탕을 둔 예술의 깊고 넓은 해석을 위해서는 양측의 균형감각이 중요하다. 예컨대 <버닝> 중 가장 강렬한 장면인, 파주 종수 집 앞마당에서 해미가 반라의 몸으로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춘 것에 대해 이창동 감독은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6.8혁명으로부터 정확히 반 세기가 지난 오늘날 <버닝>의 해당 장면은 그 정치성과 혁명성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애국기가 휘날리고, 멀리서는 우리가 사는 사회 체제에 대한 적대와 도전의 방송이 들려오고, 알 수 없는 덫에 빠진 듯 삶이 나아질 기색이라곤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나 자신의 내면마저 모순되고 온전히 알 수가 없다. 이때 존재의 의미를 갈구하는 그레이트 헝거의 춤이, 우리 사회에서 아무도 주목하고 찾지 않는 소외된 여성의 몸으로, 낮도 밤도 아닌 때 의뭉스러운 노을 밑에서 벌어진다. 오늘날의 사회성, 정치성 뿐만 아니라 50년 전의 혁명적 전환이 상기되는 이유다. 1968년 서독에서 20대 여성 언론인이던 베아테 클라르스펠트가 나치 전범에 대한 청산을 요구하며 최고권력자이던 키징거 총리의 뺨을 때린 일화가 중첩된다.[4] 구태적이고 비인간적인 모순의 청산을 요구하는 질문이자 절규인 것이다.

종수는 결국 소설을 쓴다. 종수가 소설을 쓰는 대목 이후가 소설 속 이야기인지 사실인지보다도, 종수가 결국 그 이전까지의 경험과 좌절을 토대로 창작을 시작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사실 극중 종수 최초의 창작은 구속된 아버지를 돕고자 쓴 탄원서다. 아버지가 결코 좋은 이웃이 아니었지만 그의 분노를 어떻게든 해명해야만 했던 종수는 미사여구를 꾸며 탄원서를 쓰고 서명을 받는다. 불투명한 세상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투영하는 수단으로서 마지막에 종수가 쓰기 시작하는 소설은 자신에게 분노를 물려준 아버지(와 그 세대)를 변호하고자 했던 탄원서가 발전된 모습이다.

벤의 의미심장한 방화 취미, 아버지의 고집스런 성정과 폭력성, 해미를 향한 죄책감, 실존적으로 몸부림치는 스스로의 고민 등이 혼재되어 나타난 어린 시절의 꿈은 예술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버닝>을 대표하는 장면이다. 어머니의 옷을 불태우고 괴로워하면서도 분노를 해소하고, 정작 본인은 마치 '우물에 빠진 듯' 젖은 몸으로 떨고 있다. 종수의 본질적인 트라우마와 고통이 스스로 형상화된 것이다.

예술을 실천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해당 예술을 사회적 맥락에서 다각도로 바라보고 분석, 해석할 필요가 있다. 곳곳의 상징을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 전체의 맥락을 종합해서 하나의 방향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해석이라면, 예술의 향유자들은 예술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현실을 더 깊게 인식할 수 있다. 창작을 하는 이들은 현실을 해석하여 예술로 치환시킬 수 있다. 종수는 영화 내내 줄곧 자신에게 웃는 얼굴로 잘 대해주고, 걱정까지 해주던 벤을 죽이고 불태움으로써 그 자신이 해석한 현실을 예술로 완성시킨다. 요리를 창조와 지배의 메타포로 말한 바 있는 벤은 작중에서 일종의 신적 권능을 지녔고, 살해당한 신적 권능은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으로 연결된다.

순응의 존재에서 반항과 주체성의 쟁취로 이동한 종수의 자아는 구질서, 권능, 자본주의 체제의 요구 등을 살해하는 상상력을 발휘하기에 이르렀다. 니체가 기독교적 질서로서의 신을 살해하고자 했다면 한국의 젊은 작가 지망생은 본인의 실존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기존 질서에 도전한다. 이창동 감독이 청춘의 분노와 불안이라는 테마로 만들어낸 예술에서 보다 근원적인 지향점은, 현실에 엄존하는 모순과 부조리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예술의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다. 현실을 예술에 반영하고, 예술이 현실에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청사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탈 서사화되고 파편화된 현실과 예술을 조화시키고,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1] 네오 라이프스타일, 유스 컬처... YOUTH, YOUTH, YOUTH!, 매일경제, 2018-08-21,
http://news.mk.co.kr/newsRead.php?sc=60000007&year=2018&no=524401
[2] Friedrich Wilhelm Nietzsche,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문예출판사, 2011),
"차라투스트라의 설교", 53-56
[3] 한병철,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 13
[4] 20대 여성이 남성 총리의 뺨을? '1968년 정신'의 실재, 한겨레, 2018-04-07,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83957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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