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부문 대상] 영화 「나는 부정한다」 비평 -'진실'의 조건-
[2018 한대신문 문예상 비평부문 대상] 영화 「나는 부정한다」 비평 -'진실'의 조건-
  • 김보영<사회대 정치외교학과 14> 씨
  • 승인 2018.12.03
  • 호수 1487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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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자주 의심받는다. 의심은 때로 진실을 더욱 강화해주며 그 참됨을 보장해준다. 그러나 목적을 가진 의심은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고, 날조하는 거짓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거짓들 중 일부는 진실보다 더욱 매혹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이럴 경우, 거짓이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이 스스로를 변호해야 한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는 진실이 진실임을 알리기 위해 싸워야 했던 Irving vs. Penguin Books and Deborah Lipstadt 사건을 다룬 영화이다.

영화는 어빙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조롱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데보라 립스타트 교수는 ‘홀로코스트의 증거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고, 그 증거는 얼마나 강한가?’라는 질문을 그녀의 학생들에게 던진다. 이러한 질문들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진실을 변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이후 어빙은 그녀의 강연에 난입하면서 데보라를 당황시키고 그녀의 저서가 자신을 근거없이 비난했다며 명예훼손죄로 고소한다. 무죄추정의 원칙이 없는 영국에서 데보라와 그녀의 변호인단은 책 내용이 진실이기 때문에 명예훼손이 아님을 주장한다.[1] 변호인단은 어빙의 일기장과 저서를 읽고 직접 아우슈비츠에 방문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어빙이 반유대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이며 히틀러를 옹호하기 위해 의도적인 오류를 만들었음을 입증한다. 즉, 자신이 객관적인 역사학자라는 어빙의 주장과는 달리 그가 선동가이자 거짓말쟁이임을 증명하여 데보라의 책 내용이 진실이었음을 입증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진실과 거짓의 구분

영화는 몇몇 인물들을 통해 진실과 거짓의 대립구도를 보여준다. 홀로코스트가 존재한다는 데보라 측이 진실이라면 홀로코스트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어빙 측은 거짓이다.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는 것은 쉬워 보이지만 “시안화칼륨을 부을 구멍이 없었으니 홀로코스트도 없었다”(No holes, no holocaust)는 어빙의 주장이나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 가스처형실의 존재를 부정하는 로히터 보고서 등은 거짓 측의 주장을 매혹적으로 들리게 한다. 실제로 법원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데보라를 보며 유대인 계집이라 욕하고 어빙을 연호하는 이들의 존재는 사람들이 이러한 거짓에 얼마든지 선동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초반에 홀로코스트 존재 사실(Fact)에 대해서는 토론하지 않겠다던 데보라와의 생각과는 달리 사실의 존재 여부부터 거짓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따라서 진실은 거짓이 날조하고 왜곡할 수 있는 모든 부분에 대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는 진실과 거짓 둘 다에 속하지 않는, 관심없는 이들도 존재한다. 한 변호사의 남편은 재판 내용을 틀어놓고 복기하고 있는 부인에게 “지겨워서 못듣겠어.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 세상엔 다른 일도 많아. 언젠가는 잊고 지나가야지. 이건 집착이야. 벌써 얼마나 지났어? 평생 슬퍼하며 살 거래?”라며 짜증을 낸다. 이런 이들에게 진실과 거짓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당장 눈앞의 일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이 중요하며 과거의 진실은 할 일 없는 사람들의 외침 또는 대가를 바라는 이들의 구실일 뿐이다. 그러나 유명한 격언처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실제로 독일 민족이 제 1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망각하고 왜곡하지 않았더라면 제 2차 세계대전은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영화의 대립구도를 만든 홀로코스트에 대한 논쟁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당장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을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고 이에 관심을 기울여야 이유는 과거의 진실이 미래의 방향을 알려줄 이정표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이성과 감성: 진실을 뒷받침하는 두 개의 축

한편 영화는 진실 측 인물들 간의 대립구도를 통해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저울질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눈물을 흘리며 추모기도를 올리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손을 붙잡아주는 데보라가 감성이라면, 재판을 이기기 위해 홀로코스트 생존자나 데보라조차도 재판에 서지 못하도록 하는 변호인단은 이성이다. 이성과 감성의 대립은 영화 속 두 장면에서 대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하나는 데보라와 리처드 변호사가 아우슈비츠에 방문한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생존자들의 재판 참여를 두고 데보라와 앤드류 변호사가 다투는 장면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인 데보라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의 주장을 들먹이는 리처드에게 분노하지만 리처드와 그의 동료 변호사는 자신들이 ‘순례를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증거 수집을 위해 온 것’이라고 말한다. 앤드류와 데보라가 생존자들의 재판 증언 여부를 두고 대립하는 장면은 이성과 감성 간의 갈등 구도를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다. 생존자들에게 아픔의 목소리가 전해지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데보라에게 앤드류는 ‘재판은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의 감정적 만족을 위한 심리치료가 아니라’고 못을 박는다. 결과적으로 두 번의 대립에서 이성이 감성을 이겼고, 데보라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재판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감성이 필요없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애초에 재판이 성립된 것은 데보라가 신념을 가지고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을 비판했고 퇴물인 어빙을 그냥 놔두라는 유대인 지도층의 요구를 거부하고 합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즉, 감성을 동반한 신념이 지켜졌을 때에 ‘진실의 항변’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리처드 변호사 역시 아우슈비츠에서 데보라에게 냉정한 태도를 보이긴 하지만, 그가 아우슈비츠에 간 것도 이 재판에는 스킬이 아니라 ‘갈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앤드류가 생존자들의 증언을 끝내 반대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어빙이 그들의 상처를 조롱하고 경멸하며 모욕을 줄 것을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성을 대표하는 이들 역시 그들의 감성에 의해 동기부여를 받고 있는 것이다. 즉, 진실의 승리는 싸움의 자리에 남아있을 용기와 아픔에 공감하는 감성, 승리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이성이 합쳐져서 가능했다.

그렇다면 영화에서는 왜 두 차례 모두 이성이 감성에 승리하였는가? 이는 진실이 밝혀지는 장소가 법정이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인 데보라는 역사의 진실성이 법정에서 가려지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법정에서 홀로코스트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판결이 나더라도 홀로코스트가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없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영화 속 진실이 가려지는 법정은 철저히 승소를 목적으로 싸우는 곳으로 리처드가 지적하듯이 ‘최선이라고 느끼는 것이 언제나 최선의 결과를 낳지는 않는’ 곳이다. 데보라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은 어빙이 조롱하고 모욕하는 과정에서 논점을 흐릴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승소를 위해 불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영화의 배경과는 달리 현실에서 진실과 거짓의 싸움은 법정에서의 싸움이 아니다. 즉, 영화에서처럼 무조건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적당한 감성의 이용은 여론을 움직이는 데에 필요하다. 물론 여론은 진실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러나 여론은 무엇이 진실인가를 결정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며, 여론을 힘에 업은 진실은 거짓을 사장시킬 동력을 얻는다. 결국 거짓에 대항하는 진실은 이성과 감성 모두를 갖추어야 한다. 이성 없는 감성의 싸움은 그저 분노의 목소리가 되기 쉽고, 감성 없는 이성의 싸움은 공허한 논리싸움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진실(眞實)에서 ‘진실’(進實)로

영화는 엔딩에서 두 장면을 연달아 보여준다. 하나는 데보라가 조깅을 하다가 보아디케아 동상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장면이다. 보아디케아는 네로 황제 치하에 있던 로마의 폭정에 맞서 싸운 영국 지역의 여왕으로 그녀의 이름은 고대 켈트족 언어의 ‘승리’(boudīkā)라는 뜻에서 기원했다고 한다.[2] 합의를 권유받을 당시 동상을 찡그리면서 바라보던 데보라가 엔딩에서 환한 표정으로 이를 바라보는 것은 거짓에 맞서 싸운 진실이 완전히 승리했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영화는 단순히 진실이 승리했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가 제일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데보라가 방문했던 홀로코스트 가스 처형실의 잔해에 눈송이들이 덮이는 모습이다. 그곳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겠다는 듯이 살포시 내려앉는 눈송이는 진실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보여준다. 진실을 밝히고 증명하는 것이 아픔의 목소리를 전하는 과정이었다면, 그 이후에는 아픔의 목소리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까지가 진실이 추구해야 할 방향인 것이다.

한국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거짓들이 존재한다. 일제 강점기는 식민지 수탈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화로 가는 길목이었다는 주장, 위안부는 자발적 성 매춘부였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일제의 수탈을 증명하는 문서와 증언들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존재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계속해서 증언하고 아시아 곳곳에서 추가 피해자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학자라는 이는 책을 발간해 성노예를 매춘부로 둔갑시켰다. 이러한 거짓에 맞서 싸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영화 <나는 부정한다>는 잘 보여준다. 영화는 홀로코스트라는 유럽 현대사의 비극에 대한 논쟁을 다루고 있으나 진실이 진정한 ‘진실’이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거짓에 대항하는 모든 이들에게 교훈을 안겨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앞으로 진실과 거짓 간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 이성과 감성을 균형있게 갖추고 싸움에 임하며, 그 진실이 진정 약자의 아픔을 위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면 영화에서처럼 결국 진실은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한국 법체계와 달리 영화 배경인 영국은 명예훼손이어도 그것이 사실이라면 명예훼손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2] https://en.wikipedia.org/wiki/Boud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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