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얼 워렌, 앤서니 케네디, 그리고 브렛 캐버노 이후
[교수칼럼] 얼 워렌, 앤서니 케네디, 그리고 브렛 캐버노 이후
  • 윤성현<정책대 정책학과> 교수 
  • 승인 2018.11.05
  • 호수 1484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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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성현<정책대 정책학과> 교수 

필자가 연구년 기간 동안 방문학자로 체류 중인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 로스쿨(UC Berkeley School of Law)에는 로스쿨이 배출한 가장 유명한 동문인 얼 워렌(Earl Warren) 전 연방대법원장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의 이름을 딴 별도의 다목적 룸이 존재한다. 얼 워렌은 대법원장 재임 기간 중 흑백 분리교육(separate but equal)은 평등에 반한다는 브라운 판결(Brown v. Board of Education)과 형사 적법절차 분야의 기념비적 판결로 우리에게도 형사법상 미란다 법칙으로 잘 알려진 미란다 판결(Miranda v. Arizona) 등을 직접 집필하며 미국의 진보적 사법적극주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하지만 그러한 얼 워렌이 공화당 대통령 아이젠하워에 의해 연방 대법원장에 임명되었고 그 이전에는 공화당 소속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냈던 유력 정치인 출신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더군다나 그는 연방대법원장과 주지사를 지내기 전에 캘리포니아 주 법무장관을 지내면서 12만 명에 달하는 태평양 연안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단지 그들이 일본계라는 이유만으로 2차 대전 중에 적법절차 없이 차별적으로 강제 수용한 조치를 공적으로 적극 옹호했던 전력도 있었다. 

동 조치의 근거가 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대해서는 1944년 당시 연방대법원에서 6대 3으로 합헌 결정(Korematsu v. United States)이 났었지만, 동 판결은 학계에서는 지속적으로 비판을 받아왔고, 특히 2018년 TRUMP v. HAWAII 사건에서는 공화당에서 지명한 보수파 존 로버츠 대법원장조차 그가 집필한 법정의견 내용 중에 주문과는 관계 없는 방론을 통해서 “Korematsu는 선고된 날부터 이미 잘못된 것이었고, 역사의 법정에서 이미 폐기되었다”고 명시적으로 서술했을 만큼 선례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반인권적 판결로 자리매김된 분위기이다. 이런 조치를 주도했던 얼 워렌이 이후 사법적극주의와 민권운동에 가장 큰 획을 긋는 사법부의 수장으로 면모를 일신한 것은 자못 아이러니컬하다. 

하지만 미국 사법사에서 이런 반전은 드문 일만은 아니다. 지난 10월 연방 상원에서 50대 48의 박빙의 표차로 인준을 받아 대법관에 임명된 브렛 캐버노(Brett Kavanaugh)의 전임자이자 젊은 시절 캐버노가 그의 로클럭으로 일하기도 했던 앤서니 케네디(Anthony Kennedy) 전 대법관 역시 공화당의 레이건 대통령이 임명했으나 동성결혼 합법화(Obergefell v. Hodges) 등의 중요 이슈에 있어서 공화당과 보수주의자들의 기대에 반하여 진보진영의 편에 서는, 소위 스윙보터의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뉴욕타임스의 한 기사에서는 이런 그를 일컬어, 타이틀이 아니라 영향력에 있어서는 그의 재임 시절 대법원은 케네디 코트(Kennedy Court)라 칭할 만 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심심치 않게 발생했던 임명권자와의 불화 내지 과감한 거역의 역사가 캐버노에 있어서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보수 일방으로 흐르게 될 것인지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아마도 그럴 것으로 예상된다는 견해가 지금으로선 훨씬 우세해 보이는 가운데, 최근 몇 년간 일부 좌클릭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같은 인물이 중도 성향으로 새롭게 캐스팅 보터로 떠오르게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보인다.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가 점차 심화되고 있는 한국의 헌정을 바라보는 데에 있어서, 이를 먼저 경험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살펴보고 음미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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