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카페의 변천과 ‘카공족’
[교수칼럼] 카페의 변천과 ‘카공족’
  • 김미영<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
  • 승인 2018.10.08
  • 호수 1482
  • 7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미영&lt;사범대&nbsp;국어교육과&gt;&nbsp;교수
▲ 김미영<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

최근, 심심치 않게 ‘카공족’에 대한 비난의 성격이 강한 기사를 보면 뜨끔할 때가 있다. 나도 가끔씩은 책 한권 들고 카페에 가는 카공족이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책을 보거나,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유는 오랜 시간 커피 한 잔만을 시켜놓고 넓은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 중의 하나가 카페인데 정말, 카페에서 공부를 하면 민폐가 되는 것일까? 카페의 기원을 거슬러 가보면 학문, 예술창조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모습과 유사한 최초의 카페, 즉 커피하우스로 알려진 곳은 1475년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 개점한 ‘키바 한(Klva Han)’이었다. 중동지역에서 시작한 카페는 사교적, 사업적 만남의 장소였다. 베네치아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전파된 17세기의 카페는 근현대 유럽의 경제와 정치, 학문이 탄생한 곳으로 변모하였다. 1650년 영국에서 처음 문을 연 커피하우스는 옥스퍼드 대학의 Angel로서 또 다른 별칭은 ‘페니대학(Penny university)’이었다. 커피 한 잔 값으로 대학생들이 학습을 하거나 토론을 하고 과학과 철학 등의 지식을 공유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커피 하우스는 볼테르와 장 자크 루소 등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토론을 하던 곳, 혁명을 잉태한 공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1930년대 예술계 거장들의 작업실이자 토론 공간도 바로 커피 하우스라는 점이다.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에서는 헤밍웨이, 피카소, 피츠제럴드 등의 모더니스트들이 커피하우스에서 사랑과 예술을 싹틔웠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가장 최근의 유명한 카페는 에든버러에 있는 ‘엘리펀트 하우스’일 것이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 K. 롤링이 무명이었을 때, 작업실이 없어 이곳에서 해리포터를 썼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지금 이 카페는 ‘해리포터의 탄생지(Birthplace of Harry Potter)’라는 자랑스러운 문구를 내걸고 있다. 이처럼 커피하우스의 시작은 사교적, 상업적 만남의 장소에서 학문·정치토론의 장소로, 예술 창조의 장소로 성격이 바뀌거나 확장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카페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우리의 카페는 근대 역사와 맞물려 있다. 자료에 의하면 최초로 커피를 접한 사람은 조선 26대 왕 고종이다. 아관파천 당시 커피를 접했다는 설이 유력하며, 덕수궁에 세운 서양식 정자인 ‘정관헌’에서 커피를 즐겼다. 일반인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카페는 1902년 서울 정동에 있었던 서양식 호텔 ‘손탁 호텔’로서 러시아 여성 손탁이 운영하였다. 한국인이 경영한 최초의 카페는 1927년 영화감독이자 소설가인 이경손이 개업한 ‘카카듀’이다. <날개>의 이상이 1933년부터 서울 종로에 ‘제비다방’을 운영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제비다방’은 이상이 직접 설계한 곳으로 당대의 모던 보이와 모던 걸, 그리고 기자와 유학파 등의 인텔리들이 몰려 든 문화의 공간이었다.

현재까지 존재하는 오래된 카페는 서울 대학로에 있는 ‘학림다방’일 것이다. 1956년 개업하였으니 60 여년의 세월을 견딘 역사적, 문화적 공간이다. 관악산으로 이전하기 전의 서울대학교 문리대가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서울대학교 문리대 제25강의실’로 불릴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이곳은 ‘다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1960년대 이후 진보적 지식인들과 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세력들의 아지트였던 것이다. 소설가 이청준과 황석영, 시인 천상병과 김지하, 연출가이자 작곡가인 김민기 등과 같은 쟁쟁한 문화계의 인물들이 단골이었다. 우리들이 카페에서 공부를 하거나 토론을 하는 오늘날의 모습은 카페의 역사를 볼 때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비하적 의미의 ‘카공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문화 공간에 어울리는 교양인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