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과 함께한 민(民), 그리고 우리들의 역사
한글과 함께한 민(民), 그리고 우리들의 역사
  • 정주엽 기자
  • 승인 2018.09.17
  • 호수 1481
  • 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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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571돌 한글날을 기념하며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의 뜻은 민주주의 정신과 통한다”고 밝혔다. 세종이 한글을 발명하기 이전의 조선에서는 한문만이 유일하게 소통 가능한 문자체계였다. 하지만 한문은 그 구조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을 요해 일반 백성들이 일상에서 사용하기엔 어려운 문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의 한글 창제는 일반 민중으로 하여금 그들의 뜻을 쉽고 자유롭게 펼칠 기회를 마련해줬다. 이에 김슬옹<세종학교육원> 원장은 “한글과 민중의 성장은 절대적 관계에 있다”며 “민(民)은 한글을 통해 소통의 주체로 참여하고 사회적 권리에 대해 자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글은 5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느리지만 광범위하게 민중들의 의식세계를 넓혀왔다.

민중에게 언로(言路)를 열어준 한글
조선왕조실록에 한글 관련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시기 이후부터다. 1449년(세종 31년), 세종은 황희와 하연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황희는 재상의 자리에 있는 동안 너그럽고 후덕했으며 백성들의 여론을 귀담아들어 사람들 사이에서 명재상으로 불렸다. 반면 하연은 까다롭게 살피길 좋아하고 노쇠한 탓에 일할 때 실수가 잦아 사람들의 불만을 자주 사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익명의 누군가가 ‘하 정승아, 또 공사를 망령되게 하지 마라’라고 한글로 된 벽서를 써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대해 김 원장은 “벽서 사건은 백성 누구나 자기 생각을 적어 알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며 “이는 백성과 관료, 백성과 백성 사이에 소통의 창구가 열렸음을 드러내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3년 만에 한글로 쓰인 익명서가 나붙었다는 것은 한글 창제 초기부터 훈민정음이 정치적 담론을 형성하는 문자로 사용됐음을 나타낸다.  

이후 한글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지배층과 피지배계층이 소통할 수 있는 수단으로 발돋움한다. 임진왜란은 국가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흔들 만큼 조선의 위기를 불러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선이 무너지지 않았던 까닭은 그전까지 한 번도 역사의 전면을 장식한 적이 없는 ‘백성’ 덕분이었다. 지배층이 의주로 피난 갈 동안 민중은 죽창을 들고 왜군의 조총에 맞섰다. 「한글전쟁-우리말 우리글 5천년 투쟁사」의 저자 김흥식<서해문집> 대표는 “지배층도 전란 중 민중의 힘이 필요함을 깨달았기에 그들이 사용하던 한글로 소통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임진왜란 시기 한글로 작성된 선조 국문 유서(보물 제951호)의 모습이다.
▲ 임진왜란 시기 한글로 작성된 선조 국문 유서(보물 제951호)의 모습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선조 국문 유서’이다. 선조 국문 유서는 1593년 9월 선조가 왜군에게 투항한 조선인 포로에게 내린 문서다. 선조는 이 문서에서 왜적에게 투항한 죄를 묻지 않을 뿐 아니라 공을 세운 자에게는 신분에 상관없이 벼슬을 내리겠다고 말한다. 김 대표는 이 문서에 대해 “당시 조선 조정은 잃어버린 백성의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며 “그러한 노력은 당연히 백성이 눈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수단인 한글로 전해졌다”고 밝혔다. 김 원장 역시 “선조 국문 유서는 민의 성장에 따른 한글 확산의 근거라고 볼 수 있다”며 그 의의를 강조했다. 더욱이 김 원장은 “이러한 모습은 영·정조 시기 *윤음(綸音)에서 한글을 한자와 병기한 것을 통해 그 지속성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즉, 한글은 백성의 입과 귀를 트여 그들로 하여금 소통의 주체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동학 농민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한글 사발통문이다.
▲ 동학 농민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한글 사발통문이다.

한글, 평등(平等)으로 나아가다
조선 후기에는 문학의 저변이 서민층까지 확대되며 한글 소설과 사설시조 등이 유행했다. 김 대표는 “조선 후기에는 기생과 같은 사회의 하층민도 여가시간에 한글 소설을 읽을 만큼 한글과 서민 문학이 널리 보급됐다”고 밝혔다. 특히 *서얼에 대한 차별 철폐와 탐관오리 처벌을 주장한 허균의 「홍길동전」은 이 시기에 유행한 대표적인 한글 소설이다. 김 원장은 “홍길동전은 주류 양반들의 배타적 권력화 장치였던 서얼 제도 등의 근본적 사회 모순을 꼬집는 작품”이라며 “홍길동전과 같은 한글 소설들은 피지배층 또는 소외층을 위한 글이 많아, 민중이 계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즉 한글로 쓰인 서민 문학은 신분제도와 차별이 일상인 민중들에게 ‘평등’과 ‘개혁’이라는 인식을 공유할 수 있는 사유의 장을 제공한 것이다.

최초의 천주가사인 천주공경가가 담긴 「만천유고」의 모습이다
▲ 최초의 천주가사인 천주공경가가 담긴 「만천유고」의 모습이다

한글, 평등(平等)으로 나아가다
조선 후기에 등장한 종교와 한글의 만남도 백성들의 민주 의식을 성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 원장은 “신흥 종교는 신분제의 모순을 깨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하층민 중심으로 포교가 성행했다”며 “이는 민중의 문자인 한글을 통한 포교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고 밝혔다. 특히 19세기 후반,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한글로 쓰인 사발통문과 경전 「용담유사」를 통해 포교가 이뤄져 한자를 모르는 일반 백성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기독교와 천주교 역시 동학과 마찬가지로 한글이 포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 원장은 “기독교도 민중들에게 조선 말 신분 사회의 불평등을 타파하는 의식을 심어줬다”며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한글”이라고 설명했다. 김 원장은 “천주교는 자생적으로 ‘천주공경가’ 등의 한글 가사를 확산시켰고, 개신교는 선교사가 중심이 돼 성경의 한글 번역서를 민간에 보급했다”며 “이러한 노력은 민중의 의식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이처럼 조선 말, 종교는 한글이라는 백성의 글을 통해 자유와 평등사상을 전파했다. 조선의 민중은 한글로 작성된 종교 교리서를 통해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한글과 민의 수난, 일제 강점기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한글과 민주 의식의 싹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좌절된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이 언어를 이용해 조선인을 동화시키는 것이라고 봤다. 이후 그들은 식민지 현지인들을 철저히 노예화하려는 의도에서 학교교육령을 공포해 한국어를 금지하고 일본어 교육을 강행했다. 김 대표는 “일제 강점기 일본의 조선어 말살 정책은 시간이 흐를수록 내선일체의 장기적 관점에서 이뤄졌다”며 “이러한 공개적인 언어 말살 정책은 우리말 교육 시간의 축소와 일본어 교육의 확대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한글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은 계속됐다. 그 중심에는 한글을 가꾸고 다듬었던 조선어 학회가 있었다. 조선어 학회 회원들은 한글이 완전히 사라지면 독립 후 조선의 사상이 바로 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한글 맞춤법 제정과 함께 「우리말 사전」 편찬을 시도하며 일제 치하에서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김 원장은 “조선어 학회는 어두운 시기, 한글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숭고한 노력이자 성과였다”며 “비록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됐지만, 조선어 학회의 한글 운동을 통해 광복 이후 무너진 한글 연구를 다시 살릴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한글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이처럼 민중들은 한글을 통해 자신들의 현실을 돌아보고 독자적인 의식을 키워 갔다.  김 대표는 “한글은 민중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그들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기여했다”며 “한글이라는 문자를 통해 민중은 역사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서서히 이동할 수 있었다”고 논평했다.

한글 창제는 오늘날 SNS와 같이 조선 시대 민중의 뜻을 공유하고 표현하는 네트워크를 태동시켰다. 비록 한글 벽서와 상소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을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민중의 의견을 담는 그릇은 언제까지고 한글일 거라는 사실이다.


*윤음(綸音): 조선시대 국왕이 국민들을 가르치고 타이르기 위해 내리는 문서다.
*서얼: 조선시대 양반의 자손 가운데 첩의 소생을 이르는 말이다.

도움: 김슬옹<세종학교육원> 원장
김흥식<서해문집> 대표
사진 출처: 우리 역사넷
한국 기독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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