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좋아요’의 사회학
[교수칼럼] ‘좋아요’의 사회학
  • 이재복<국문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 승인 2018.09.03
  • 호수 1480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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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복<국문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한때 나도 페이스북 예찬론자였다. 모든 것이 빠르고 복잡한 시대에 페북이야말로 최적화된 양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의 길이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내 생각이나 일상에서 일어난 소소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장으로 페북은 대단히 매력적인 데가 있다. 이 매력에 푹 빠져 나도 하루에 한두 차례 이런저런 생각과 이야기를 써서 올리곤 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손수 찍은 사진과 함께 글이 페북의 형식 안에서 구성되고 소통된다는 것이 새롭기도 하고 또 흥미롭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 양식이 이상한 강박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이 공개된, 무한히 열린 장이라는 생각이 내 안에 있는 은밀하고 내밀한 글을 올리는 것에 대해 일정한 부담감과 함께 불안감을 들게 했다. 스스로 내 의식이 나를 검열하기 시작하면서 글은 점점 장식이 가미된 온건하고 안정된, 나의 결점과 부정적인 면을 절대 드러내지 않은 채 스테레오타입화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페북에 올라온 대부분의 글이 그랬던 것이다. 개인의 은밀한 욕망이나 욕구 여기에서 비롯되는 격한 저항감이나 강한 부정성 등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드러냄으로써 페북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갈등이나 저항이 없는 온건하고 안정된 소통의 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모두가 암암리에 공유하고 있는 이 의식이 거짓 화해와 얕고 의례적인 장식(꾸밈)을 낳을 것이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겉으로 보면 이런 식의 소통은 ‘매끄러움’(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그 자체다. 상처나 갈등이 없는 매끄러움 혹은 천의무봉함이 거짓과 장식으로 이루어진 온전함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변화와 혁신을 담보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익숙해져 있다. 어쩌면 이것은 신산고초의 과정을 통한 삶의 아날로그적인 고통이 제거되고 0과 1의 비트적인 조합으로 이루어진 디지털적인 매끄러움에 더 익숙한 세대의 일반화된 모습인지 모른다. 이 매끄러움이란 몸이 사라진 혹은 그늘이 없는 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온갖 상처와 갈등을 온몸으로 삭이고 얻는 이 ‘그늘’은 이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해야 할 세계이다. 그늘이 없는 천의무봉함이란 거짓 화해와 의례적인 장식을 통해 이루어진 가짜에 다름 아니다.

페북의 ‘좋아요’는 늘 이런 거짓 화해와 얕고 의례적인 꾸밈을 요구한다. 나 역시 이런 거짓 화해와 의례적인 꾸밈을 은폐하고 있는 글에 ‘좋아요’라고 한 경험이 있다. 이 좋아요에 최적화된 것들을 올리려다보니 늘 페북은 보여주기식 자기과시와 자기만족의 글들로 넘쳐난다. 이런 것에 환멸을 느껴 페북을 하지 않고 있다. 누군가는 이것을 페북으로부터의 단절이나 도피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나의 깊은 뜻(?)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나는 이것을 페북과의 ‘거리 두기’라고 말하고 싶다. 이 거리만큼 나의 반성적 인식도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반성의 시간이 부재하면 페북에서의 시간은 공허하거나 맹목일 수 있다. 거대하고 무한한 네트(Net)의 시대, 이 네트에 접속하는 순간 우리는 자동화된 흐름 속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이 흐름 속에서도 우리가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기에서 반성의 주체는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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