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사설] 과거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학문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교수사설] 과거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학문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 한대신문
  • 승인 2018.09.03
  • 호수 1480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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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체계의 대화”에서 갈릴레오의 운동기준계는 유리처럼 매끈하게 바다를 달리는 근사적으로 관성계인 배였다. 배가 바다를 계속 달리면 전체적으로 원운동이 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영원히 계속되는 직선운동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소름끼치는 공포였다.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제거해 태양 주위를 돌게 하는 것과, 무한한 공간 속에서 정처 없이 헤매게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영원한 직선운동 때문에 ‘어떤 결정된 장소’가 없어진다는 것은 무한한 우주에서는 특별한 중심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적으로 완벽한 원운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그리고 케플러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천체를 지배하는 운동이었다. 갈릴레오는 이러한 운동을 관성계로 암시했고, 데카르트와 뉴턴에 의해 직선 관성으로 명시해 모든 물리법칙의 전제로 삼았으며, 결국 아인슈타인으로 이어졌다. 폰 바이제커는 공식적으로 1992년, “갈릴레오로부터 원자폭탄까지 곧장 길이 뻗어있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상상력을 통해 뉴턴이나 갈릴레오 역학과 같은 수준으로 도약하지 못한 것은 사실들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사실들에 지나치게 충실하려 했던 욕구가 더 많이 연관된다.

아인슈타인, 갈릴레오, 뉴턴 이론의 핵심개념인 관성 기준계는 자연을 이해하는데 직접적인 역할을 하지만 매우 추상적인 이론이다. 근대의 뉴턴역학과 현대의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이 가정하는 관성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 이 우주 어디에도 없고,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준을 잡고 싶은 정지된 곳 또한 없다. 

이렇게 존재하지도 않은 세계를 상정하는 이유는 어디에서 왔을까? 플라톤은 그 당시 소피스트들은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의 혼란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모든 영겁의 시간을 벗어난 수학의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를 주장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구를 중심으로 한 정적인 세계를 주장했던 것이다.

학자들이 공부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현실의 혼란을 회피해 우선 관념적으로 어떤 것을 상정해 언제나 변화하고 혼란스러운 세계를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뉴턴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수학의 세계다. 현실 세계에서도 수학은 분명하고 확실하다. 따라서 이러한 수학의 세계를 상정한다는 것은 어쩜 당연하다.

예를 들면, 이과 학생들이 수학이, 문과 학생들이 철학이 학문의 기본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어른들의 세상처럼 원하는 증거만 가지고 있으면 모든 것이 합리적이라는 혼란 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러한 학문하는 것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서양 사고를 지배하는 사상의 기원은 자연뿐만 아니라 사회의 변화하고 어지러운 혼란에서 탈출하고 회피하기 위해서 수학과 철학이 탄생되었다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은 없기에 우리는 수학에서 안락함을 가진다. 우리 학생들에 남기고 싶은 말은 기본에 충실한 자신의 학문학습에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모든 학문들은 바로 인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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