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무대는 아직도 어둡다
그들의 무대는 아직도 어둡다
  • 임해은 기자
  • 승인 2018.04.23
  • 호수 1476
  • 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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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되지 않는 처우에 한숨 쉬는 단역 배우들

단역 배우는 어디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나?
지난 2017년 MBC 드라마 「역적」에서 드라마 사상 최초로 단역 배우가 엔딩 크레딧을 장식했다. 무명의 역할을 맡아 열연을 펼친 배우 최교식 씨가 그 주인공이었다. 이후 최 씨는 2017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 시상자로 등장했다. 그 자리에서 최 씨는 “지금도 땀 흘리고 있는 수많은 무명배우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하지만 최 씨의 바람과는 다르게 단역 배우들은 불합리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하나의 예로 영화 「기술자들」 사고를 들 수 있다. 촬영 당시 유리로 된 세트가 무너지는 사고로 단역 배우 3명이 다쳤지만,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지지 않고 사고 이후에도 15시간 이상 촬영장에 방치됐다. 더군다나 그들은 제작사 측으로부터 치료비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 이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현재 단역 배우들은 제작 현장 속 부당한 처우로부터 무방비한 상황이다. 지금부터 단역 배우가 겪고 있는 처우 문제에 대한 실상을 파헤쳐보자.

단역 배우들의 열정, 그러나 현장은 힘듦으로 가득 차
익명을 요구한 A 씨는 한 극단에서 약 4개월 동안 단역 배우 아르바이트를 했다. 평소 노래 부르는 것을 즐기던 A 씨는 좀 더 큰 무대에서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싶다는 생각에 단역 배우에 도전했다. 연습은 주로 수업을 마친 후인 오후 6시부터 밤 늦게까지 진행됐다. 하지만 연습 시간은 임금에 포함되지 않았다. 공식적인 무대에 올라가 공연한 시간만 임금으로 책정됐기 때문이다. 연기에 대한 열정이 더 컸던 A씨는 최저 임금에 못 미치는 돈을 받으면서도 무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A 씨는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오게 됐다. 공연 주최 측에서 연기 경력이 더 많다는 이유로 A 씨의 배역을 다른 배우에게 내준 것이다. 원래는 지난해 9월부터 올해 1월 1일까지 일하기로 돼 있었지만 해당 계약이 구두계약으로 이뤄졌기에 A 씨의 해고는 너무도 쉽게 처리됐다. 결국 A 씨는 주최 측의 일방적인 결정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극단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단역 배우 울리는 부당한 처우
이런 단역 배우에 대한 부당한 처우는 비단 연극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도 홀대받는 단역 배우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임금’ 문제이다. 단역 배우들은 일한 만큼의 보수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주요 원인 중 하나는 편성 시간에 따른 출연료 지급 방식이다. 드라마의 주연과 조연급 배우는 ‘회당 출연료’로 계약을 맺는다. 하지만 단역 배우의 경우 편성 시간으로 출연료가 결정된다. 권상집<동국대 경영학부> 교수는 “드라마의 경우 실제 방영 시간이 70분 또는 80분이라고 해도 단역 배우는 철저하게 60분 기준으로만 출연료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편성 시간보다 더 긴 시간으로 방송이 방영된다고 해도 그 분량에 대해서는 추가적으로 출연료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예를 들어, 한 단역 배우의 60분 분량 드라마 출연료가 50만원이면, 실제 방송이 90분 방영됐을 경우 늘어난 시간만큼의 해당되는 수당을 추가적으로 받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며 임금 문제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또 다른 원인은 객관적이지 않은 등급표 기준이다. 등급표란 방송사가 회당 출연료 계약을 맺지 않는 조·단역들의 출연료 정산을 위해 만든 일종의 기준표를 뜻한다. 이를 통해 방송사가 연기자의 등급을 6~18등급(1~5등급은 아역)으로 나눈 뒤, 편성시간에 따라 지급해야 하는 회당 출연료를 책정한다. 배우들은 노동시간을 정확히 측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방송사 측이 등급표를 활용해 배우별로 출연료를 지급하고자 한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 등급표의 기준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출연한 작품의 수, 연기 경력, 인지도 등이 기준이지만 이것들은 매우 주관적”이라며 등급표 기준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임금 문제와 더불어 오랜 대기 시간 문제도 존재한다. 지난 1월 청와대 국민 청원에 예술계의 노동환경기준법과 임금기준법 제정을 요구하는 청원이 올라왔다. 올라온 글은 대부분의 촬영 현장에서 단역 배우는 장시간 밤을 새워 대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며, 야외촬영인 경우, 흙바닥 비닐하우스나 창고에 온열 기구 몇 개를 놓고 대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청원은 많은 이들에게 현재 드라마와 영화 촬영 현장이 얼마나 열악한지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김경식<충주대 영화학과> 교수는 대부분의 단역 배우는 아침에 이동할 때, 퇴근할 때 스텝들과 같이 이동한다고 전했다. 그는 “주연 배우들이 도착하기 전에 촬영장이 모두 세팅돼 있어야 한다”며 “언제든지 촬영에 바로 투입될 수 있도록 단역 배우들은 먼저 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대기 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긴 대기 시간을 버티고 촬영에 들어간다고 해도 짧은 촬영 후 곧바로 다시 대기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좀 더 나은 촬영 현장을 위해
대다수의 단역 배우들은 서류를 통한 정식 계약이 아닌 단순히 말로 성사되는 구두계약을 맺는다. 이런 계약의 경우 문서상으로 증거가 남지 않아 방송사·제작사에 대한 임금 지급의 압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권 교수는 “방송사·제작사와 단역 배우들 간의 문서화된 출연료 계약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며 “방송사·제작사와 출연자 간의 출연료 지급 보증을 받도록 해야지만 불합리한 출연료를 당연시 생각하는 업계 구조적인 관행이 사라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권 교수는 출연료 지급에 있어서 방송사·드라마 제작사 간 단일화된 계약서 양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단순히 ‘60분 출연료’가 아니라 방송 편성 시간 60분에 해당하는 임금이 기본으로 지급되고, 추가적으로 방영돼 늘어난 편성 시간은 그만큼 추가로 지급돼야 한다. 그래야지만 방송사, 영화사의 출연료 미지급과 같은 부당한 처우를 막고 법적으로 출연료를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불합리한 처우로부터 단역배우를 구제할 별도의 법안은 없다. 그저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파견 근로자 등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권 교수는 “단역 배우들을 위한 법을 제정해달라는 국민 청원을 계기로 단역배우 출연료 및 인권에 대한 보장을 구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방송사 편성 시간에 의한 출연료 지급 의무화 △서면 출연료 계약서 작성 의무화 △출연료에 대한 방송사·영화사의 지급보증 의무화 △출연 배우에 대한 처우 지급에 대한 외부 감사 의무화 등을 법안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전했다. 

임금 문제, 대기 시간 문제 등 불합리하고 부당한 처우에 대한 정책적 해결과 동시에 이들을 고용하는 방송사·제작사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김 교수는 “단역 배우가 겪는 부당한 처우가 한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는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작품 속에서 주연 배우만 존재한다면 과연 그들이 빛날 수 있을까? 뒤에서 묵묵히 연기하는 단역 배우들이 있기에 그들이 빛날 수 있었던 것이다. 방송사·제작사는 단역 배우들의 노고를 인정해주고 그들이 처한 상황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도움: 권상집<동국대 경영학부> 교수
김경식<청주대 영화학과> 교수
정주엽 수습기자 jooyup100@hanyang.ac.kr
자료 출처: 김재범. 영화 ‘기술자들’, 단역 배우 촬영 사고 후 방치 논란?…제작사 “강력 대응”. 뉴스웨이,2015.01.18,http://news.newsway.co.kr/view.php?tp=1&ud=2015010809092883198&md=20150108111312_AO, 2018.04.21
영화계를 비롯한 예술계의 임금기준법과 노동환경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해주세요. 국민 청원, 2018.01.04, http://www1.president.go.kr/petitions/79640, 2018.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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