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소리’의 신명을 전하다, 국악인 왕기철
‘우리 소리’의 신명을 전하다, 국악인 왕기철
  • 노은지 기자
  • 승인 2018.04.23
  • 호수 1476
  • 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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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왕기철

본교 국악과(81) 출신의 국악인 왕기철 동문(이하 왕 동문). 그의 첫인상은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해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를 보여준 명창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친근했다. 교정에 있으면서도 국악의 대중화에 힘쓰는 왕 동문의 열정은 우리 소리에 대한 무한한 애정에서 비롯됐다. 무대에서 꽃 피우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그를 만나 소리꾼 인생의 희로애락을 들어보자.

▲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왕 동문의 모습이다.

운명처럼 다가온 국악
전라북도 정읍에서 평범한 학교생활을 하던 16살의 왕 동문. 그는 서울에서 판소리를 배우고 있던 셋째 형 고(故) 왕기창 명창에게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바로 인간문화재 23호인 가야금 병창 향사 박귀희 선생이 제자를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연락을 받고 나서 곧바로 야간열차를 타고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왔죠.” 인간문화재 앞에 선 왕 동문은 형님의 어깨너머로 들은 ‘진도 아리랑’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던 박 선생은 왕 동문을 제자로 삼았고, 그렇게 운명처럼 그는 ‘소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박 선생에게 판소리를 배우게 된 그는 현재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의 전신인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왕 동문의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해준 박귀희 선생은 그에게 소리 스승을 넘은 ‘인생 스승’이었다. “가르칠 땐 호랑이 선생님이셨지만, 참 따뜻하신 분이셨어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녀를 회상한 왕 동문은 박 선생을 많은 스승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으로 꼽았다. ‘소리꾼보다 인간이 먼저 돼야 한다’는 그녀의 가르침 때문이다. “선생님께서는 ‘올바른 인간이 돼야 한다. 그게 안 되면 아무리 소리를 잘해도 훌륭한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항상 강조하셨죠.” 그런 박 선생의 가르침은 50년이 지나도 마음속에 남아 그를 ‘좋은 소리꾼’으로 이끌고 있었다.

박 선생을 비롯해 여러 스승 아래에서 날로 성장한 왕 동문은 각종 판소리 대회에서 수상하며 소리꾼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줬다. 그는 1981년 우리 학교 국악과에 판소리 전공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 후 합격해 ‘대한민국 1호 학사 소리꾼’이 됐다. 왕 동문은 한양대에서의 배움이 자신의 실력을 기르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국악과 서양 음악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런 이론을 배우면서 음악에 대한 안목을 기를 수 있었죠.”

▲ 지난해 10월 진행된 '제13회 창신제'에서 국악뮤지컬 '심청‘의 심봉사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른 왕 동문의 모습이다.

‘명창’ 왕기철, 열정으로 소리를 빚다
판소리에 연기와 춤을 더한 음악극인 창극. 대학시절 왕 동문의 꿈은 국립극장의 전속 예술단체인 ‘국립창극단’의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국립창극단 입단 준비를 하던 그는 모교인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로부터 시간 강사로 판소리를 가르쳐줄 수 있냐는 제안을 받았다. “졸업하기 전에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는 제 모습을 본 교장 선생님께서 교사 자리를 제안하셨죠.” 대학 졸업 이후 교사가 된 그는 약 13년 동안 교직 생활을 했다.

교육 현장에서 미래의 국악인을 길러내며 보람을 느끼던 왕 동문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해소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예술가로서 오르는 무대’에 대한 갈증이었다.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던 형과 동생의 무대를 보면 항상 ‘나는 언제쯤 저 무대에 서볼까’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죠.” 무대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힌 그는 안정적인 교직 생활을 과감히 그만두고,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국립창극단 오디션에 도전했다. 왕 동문은 소리부터 춤, 연기까지 준비하며 노력한 끝에 합격의 기쁨을 맛봤다.

국립창극단 배우로 활동을 시작한 왕 동문은 입단 직후 ‘흥보가’, ‘수궁가’ 등의 주연 자리를 줄줄이 꿰찼다. 하지만 처음부터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오랫동안 교직에만 있었던 그에게 창극의 연기와 춤은 너무나도 어려운 분야였기 때문이다. 왕 동문은 이러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선배 배우들의 모습을 항상 관찰하고, 끊임없이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버팀목이 된 사람은 바로 친동생 왕기석 명창이었다. “오랫동안 창극단 주연으로 활동했던 동생이 제 롤모델이었어요. 동생이라고 부끄러울 것 없이 많이 물어보다 보니 연기와 춤 실력을 차츰 쌓을 수 있었죠.”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국립창극단을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즈음 왕 동문은 또 한 번의 도전을 시작했다. 가장 권위 있는 판소리 대회인 ‘전주대사습놀이’에 참가한 것이다. ‘명창의 등용문’이라 불리는 이 대회에서 장원을 차지하는 것은 모든 소리꾼의 꿈이며, 이는 왕 동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극단 활동으로 바쁜 와중에도 꾸준히 연습한 그는 첫 도전이었던 1999년에 차하(3등)를, 그다음 해에 차상(2등)을 받았다. 권위 있는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그였지만, 왕 동문은 자신의 목표인 장원을 차지하기 위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2001년, 마침내 대통령상인 장원을 받은 그. “끝끝내 장원에 올랐을 땐 정말 기뻤어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죠.” 이를 계기로 왕 동문은 모두가 인정하는 ‘명창’이 됐다.

▲ 지난 1월, 왕 동문이 Mnet ‘더 마스터 - 음악의 공존’에 출연한 모습이다. 그는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합창단 학생들과 함께 ‘강강술래’와 ‘진도 아리랑’ 무대를 선보였다.

우리 모두 함께 “얼쑤!”
“여러분, 우리 다 같이 흥부처럼 신나게 박을 타서 부자 한번 돼 봅시다!” 지난 1월, Mnet의 음악 경연 프로그램 ‘더 마스터 - 음악의 공존’에는 ‘박타령’ 무대 중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왕 동문의 모습이 담겼다. 이처럼 소리를 할 때 관객과 ‘소통’하는 것은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다. “저는 무대에 설 때 혼자 즐기기보단 어떻게 해야 관객과 소통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해요.” 이러한 고민은 ‘어떻게 하면 국악이 사람들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우리의 전통 음악인 국악은 대중음악에 비해 쉽게 접할 수 있는 장르는 아니다. 그 때문에 왕 동문은 ‘소통’을 통해 좀 더 많은 사람이 국악을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조금 따분하게 느껴질 수 있는 국악도 소리꾼과 함께 눈을 맞추고 즐긴다면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현재 왕 동문은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다. 14년 동안 활동한 국립극장 무대에서 내려와 다시 교단에 선 것이다. 평교사에서 시작해 예술부 부장을 거쳐 교장까지. 그가 다시 교정으로 돌아온 이유는 국악의 미래인 학생들을 위해서다. “그동안 수많은 무대에 서며 쌓아온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달해주고 싶었어요.” 인터뷰 다음 날에도 학생들과 오르는 공연 무대가 있다며 밝게 웃는 모습에서 국악에 대한 왕 동문의 식지 않는 열정과 애정이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목표는 겸손했다. 그저 “소리꾼 중에 왕기철이란 사람이 있었지? 그 사람 소리 참 괜찮았어”라는 말로 기억되길 바란다는 것이다. 오로지 ‘소리’ 한 길만 걸으며 국악의 매력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한 그는 이미 그 목표를 이룬 사람이었다.

▲ "얼씨구, 좋다!"는 신명을 나타내는 판소리의 추임새다. 왕 동문은 자신의 소리도 항상 즐거운 "얼씨구, 좋다!"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 출처: 뉴시스, 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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