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사설] 언어는, 진실은 프레임 바깥에 있다
[교수사설] 언어는, 진실은 프레임 바깥에 있다
  • 한대신문
  • 승인 2018.01.02
  • 호수 1470
  •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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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의 어떤 장면은 홀린 듯이 수없이 반복해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쓰리 타임즈>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연애몽’을 여는 3분 가량의 오프닝 장면이 그렇다. 비좁은 당구장에서 네 남녀가 게임을 하는 중이며, 카메라와 음악은 그런 그들을 쓰다듬듯 그윽하게 흐른다. 공들여 계산된 조명과 공간, 동선, 색감도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상대에게 품은 미묘한 감정을 절제하는 두 배우의 눈빛 연기가 압권이다. 남자는 큐대와 공만 응시하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을 극도로 의식하는 중이다. 여자는 남자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으려 자꾸 뒷걸음치면서도 남자가 자신의 눈길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다. 카메라는 좀처럼 그런 두 사람을 한 프레임에 담지 않는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가 닿는 곳은 늘 프레임 바깥이다.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는 프레임 밖에 있고, 여자를 의식하는 남자도 프레임 밖에 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이 어쩌면 프레임 바깥을 바라보는 행위가 될 수도 있음을 증명하는 신묘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다.

프레임과 스크린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모든 것이 다 있다. 프레임 안의 것들만 보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보고 다 아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런데도 프레임 안의 것들만이 절대불변의 진실이라고, 내가 보았으니 분명히 옳고 그러니 당신들도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그들은 지금 본 것이 세상의 얇은 일면만을 깨끗이 도려낸 표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는 미숙한 시각의 문제라기보다는 결핍된 상상력 때문이다. 얼핏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프레임 바깥의 공백을 적극적인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는 사람만이 진실에 도달할 자격이 있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상력이 결핍된 언어들은 실상을 호도하고 타인을 밀어내며 편견을 강화하고 고통을 은폐한다. 온갖 벌레들로 넘쳐나는 말들은 우리를 윽박지르고 모욕하며 자조하게 만든다. 단 한 컷의 프레임을 목격하고나서 ‘맘충’이라고 호명하는 순간, ‘독박육아’와 ‘약자혐오’라는 프레임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 여지는 박탈된다. 래퍼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말투와 흡사한 신조어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상상력을 담고 있는 새로운 언어이다. ‘더불어돌봄제’나 ‘차별금지법’, ‘기본소득’, ‘에너지 민주주의’ 같은 언어들을 활발히 상상하면 상상할수록 프레임 안팎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사족을 붙이자면 언어와 진실은 물론이고, 삶의 소소한 즐거움도 프레임 바깥에 있을지 모른다. 모처럼 여유로운 방학을 맞아, 익숙한 영화 보기의 프레임을 벗어나 이른 아침 혹은 늦은 밤 오직 하루 한 회만 상영하는 영화를 보러 가는 것도 퍽 행복한 일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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